우리 지역에 있는 본당이며 더구나 김제 지역의 복자이며 순교자인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의 순교기념성당으로 지정되었음을 축하하며 이 지역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전하며 살아온 복자의 삶을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본받도록 해야겠다
▶ 교구 공문
†. 주님! 저희가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고,
아들의 마음으로 느끼며,
성령의 힘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지개발위원회와 요촌성당(제 2지구) 주임사제는 현재 조성된 복자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의 순교터(추정지, 제 1공영주차장)의 상태와 환경은 순교역사를 왜곡하고 순례의 의미를 훼손하여 순교성지조성에 어떠한 유익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임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요촌 본당이 순교성지의 보존과 성역화 작업을 추진하는 한편, 순례자들에게 영적 도움을 적극 베풀 수 있게 하기 위해, 요촌 본당을 '김제순교성지 순교자기념성당'으로 지정한다(2023. 6 사제평의회). 끝.
-복자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의 생애-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우스(또는 스타니슬라오)는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뒷날 전주에 살던 먼 친척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그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유항검 덕분이었다.
유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한 스타니슬라오는, 기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여 열심히 실천해 나갔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전주를 방문하였을 때 그에게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한 스타니슬라오는 유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그해 3월에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열심인 신자 김천애 안드레아와 최여겸 마티아를 동료로 맞이하게 되었다.
한 스타니슬라오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지만, 그들의 신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한 스타니슬라오는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곳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6일(음력 7월 1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형조에서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한정흠은 제사를 폐지하였으며, 천당으로 일찍 가지 못한 것을 오히려 한탄하였다. 그는 죽음을 삶처럼 보았고, 그릇된 도리로 많은 이를 유혹하였다. 그러니 죽음을 면할 수 없는데도 ‘예전부터 이단을 배척한다고 형벌을 가하거나 죽이면서까지 금지시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방자하게 발악한 죄는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한정흠 스타니슬라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