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를 향한 야릇한 내 마음
모든 자식에게 하늘이 준 가장 값진 선물은 어머니라고 했다. 어머니에겐 자식이 전부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요즘, 자식 떼어놓은 어미, 그 어미를 향해 있는 만 두 살배기 손녀의 애절한 심정을 읽어 가고 있다.
“개미다, 개미, 할라버지! 개미다.”
“그래, 개미다.”
이내 쪼그려 앉는다. 나도 따라 앉는다. 한참을 지켜보고 있다가 집어 들려고 한다.
“아서라, 잡으면 안 돼.”
“왜~에”
“엄마 개미니까.”
“엄마 개미?”
“그래, 엄마 개미다.”
“엄마? 엄마 어딨는데? 어디에 있는데~에?”
“수민이 엄마는 선생님 가고 없다.”
“싫어, 싫어, 어~엄마!”
아차, 하는 순간,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다.
“어, 비행기”
“어디?”
“저어기.”
“야, 비행기다. 비행기야! 안녕~”
손 흔들기에 정신없다. 그러곤 또 혼자말로 “엄마, 안녕~”이라고 한다.
사물 익히기와 말 익히기에 한창인 때라서 그런지 질문이 이만저만 아니다. 어느 것 하나 거저 넘어가는 게 없다. 그러고는 그 끝엔 반드시 제 엄마를 그려간다. ‘오매불망’이란 말, 이 어린 가슴에 벌써 새겨져 있음인가.
“할라버지!”
“왜”
“꼬꼬야 있다.”
“꼬꼬야?”
비둘기 한 쌍이 모이를 쪼아 먹고 있다.
“꼬꼬야가 아니고 비둘기다.”
“비둘기?”
“그래, 비둘기다.”
“비둘기야! 노올자.”하며 다가간다.
비둘기가 날아가 버린다. 날아오른 곳을 향해 한동안 서 있다가 “후루룩했다.”하며 돌아선다. 그러곤 한숨을 짓는다.
“할라버지!”
“응”
“꼬꼬야다.”
“꼬꼬야?”
이번엔 참새 떼다.
“꼬꼬야가 아니고 참새다.”
“참새?”
“꼬꼬야다. 꼬꼬야.”
“참새야, 참새.”
“아니야, 꼬꼬야다. 꼬꼬야라고 했잖아.”
이쯤이면 내가 한 발 물러서야 한다.
집 안에서는 또 어떠한가. 노래 부르기, 율동 하기, 그림책 읽기에서 제 신명을 끝낼 땐 반드시 제 어미의 음정, 몸놀림 형태로 마감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제 성이 찰 때까지 반복한다. 그래도 되지 않으면, 양 사방 다니며 집히는 대로 휘저어 놓고는 오도막이 앉아 그 반응을 기다린다.
특별한 기색 보이지 않고 마주 앉아 있노라면, 이번엔 한글 자모 판을 벽에 세워놓고 막대로 글자를 짚어가며 뭐라고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봉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앞에 앉아서 제가 지적하는 대로 따라 읽으며 받아쓴다. 조금이라도 자세가 비뚤어지거나 즉시 따라하지 않으면 가차 없이 손들고 꿇어 앉아라 한다. 그래 놓고는 놀란 얼굴로 가까이 다가 와선 “내가 엄마다. 선생님이다. 알랐지?”라고 하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야, 멍멍이다. 멍멍아! 노올자.”하며 내달린다.밭 언덕에 있던 강아지가 놀라 달아난다.
흙더미고 가시밭이고 가림 없이 내달린다. 허둥지둥 나도 따라 달린다. 순간, 숨이 목에 차오른다.
“할라버지!”
“왜?”
“재밌지?”
“그래 재밌다. 요놈아!”
“요놈?”
“그래 요놈아!”
“요놈 하지 말라요. 말라고요.”
“알았다.”
“알랐제?”
“애 보느니 비탈 밭 매는 게 더 났다.”라고 한 말이 있듯이 완전 녹초가 되는 생활을 하고 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할 때라면 몰라도 가당찮다. 힘은 또 얼마나 샌지 종아리 걷어붙인 채 용을 빨빨 써며 달라붙을 땐 항우장사도 불감당일 것 같다. 몇 번을 ‘나자빠라’ 졌는지 모른다. 다 거짓말 같지만 참말이다.
뜸들이기, 겁주기로 제 할애비 다잡기를 예사로 한다. 애교 떨기는 또 어떻고,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울리고 웃긴다. 앙탈과 보챔에 지쳐 서운한 빛이라도 보일 양이면 잽싸게 파고들며 “할라버지! 사랑해.”하며 볼을 비비고 입맞춤하며 등까지 토닥거린다.
“할아버지는 수민이가 싫어 응응.”
“울지 마, 할라버지!”
“엄마만 찾는 수민이가 정말 싫어 응응, 응응.”
“울지 마, 할아버지! 뚝”
“응응, 응응, 수민인 할아버지가 싫은가 봐.”
“사랑해, 뚜욱! 울지 마. 울지 마.”
“흑흑, 흑흑......”
“울지 말라고 했잖아. 뚜~욱!”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손녀의 얼굴이 엄청나게 심각해 보인다.
“할라버지! 수민이 왔심미다.”
“할라버지! 안녕.”
이는 손녀가 나에게 아침, 저녁으로 하는 인사말이다. 손녀에서 시작되어 손녀로 끝나는 하루해다. 나의 일진은 손녀에게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 어른들이 손자, 손녀를 쉬 가까이도, 멀리 하지도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가까이하면 할애비 수염 하나 안 남기고, 멀리하면 맘에 걸려들어 잠 못 이루는 밤 많아진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어느 한 시도 어미 향한 제 맘 놓치지 않는 것 같이, 저를 향한 한결 같은 내 마음 어이 놓칠 수 있으랴. (끝)
2006, 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