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복고왕정(3)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1815년 3월 20일 밤 파리에 돌아온 나폴레옹은 자기의 불명예와 국민의 의아심을 씻기 위하여 자유를 수호하는 계몽 정치의 수장으로 처신하였다. 에르크만과 샤트리앙(Erckmann-Chatrian)의 <1813년의 신병 이야기(Histoire d’un conscrit de 1813)>(1864)라는 작품에서 주인공 조세프의 시계방 주인 굴덴은 나폴레옹의 귀경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보고 온 사람이 말하는데, 황제께서는 분명히 파리로 돌아오셨대. 군인들은 그러기를 바라고 있지. 재산에 위협을 받은 농민도 그렇고. 황제가 그 섬에서 반성하여 전쟁 같은 생각은 버리고 조약을 맺어주면 좋은데. 더구나 누구에게나 자유와 재산을 보장해 주는 좋은 헌법을 만들어주면 좋은데. 부르주아들도 나쁠 것 없지, 좋아할 거야.
나폴레옹은 이 ‘좋은 헌법’의 기초를 콩스탕(Benjamin Constant)에게 위촉하였다. 콩스탕은 나폴레옹에게 추방되어 독일에 숨어 있다가 갓 돌아온 공화주의자였다. 나폴레옹이 그에게 헌법의 기초를 위촉한 것은 곧 자기는 시민적 자유주의 정치를 실시하겠다는 적극적 의사의 표시였다. 콩스탕은 4월 중에 ‘제국 헌법 부가법’을 기초하였다. 의회는 양원제이고 모든 법률은 의회에서 심의되고 보통선거제가 도입되는 등 루이의 1814년 헌장 보다 훨씬 광범위한 자유가 규정되어 있었다. 그 헌법은 보나파르티슴과 자유주의의 연합이었다. 이 연합은 보나파르티슴의 이른바 자유제국(l’Empire liberal)의 구상으로서 보나파르티슴의 정체를 한결 더 애매모호하게 하였다. 보나파르티슴이 마치 자유의 챔피언이나 되는 것처럼 선전하여 나폴레옹의 전설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 자유 제국이라는 애매모호한 정치적 위장이었다. 그것은 낡은 프랑스와 새 프랑스의 명백한 대조를 흐리게 하여 19세기 프랑스의 방향을 어지럽게 하였다. 콩스탕의 헌법은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130만 대 4,200으로 승인되었다. 유권자는 500만을 넘었건만 투표에 참가한 자는 4분의 1도 안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나폴레옹은 군대의 충성은 획득할 수 있었으나 전체로서의 국민의 충성은 크게 얻지 못했던 것이다. 국민의 마음속에는 불안이 가득 차 있었다. 이 불안 의식은 나폴레옹의 100일간의 재통치 기간 내내 줄곧 전국의 뒤덮고 있었다.
한편 전후 처리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던 빈의 열국 회의는 나폴레옹의 탈출 소식을 듣고 황급히 이견을 조정하여 불의의 도발자에게 대비하였다. 3월 25일 4대 연합국은 쇼몽 조약을 재확인하고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나폴레옹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는 웰링턴 휘하의 영국군 9만 6,000명과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ucher)휘하여 프로이센군 12만을 먼저 치기로 하였다. 그는 6월 6일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6월 18일 워털루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나폴레옹의 참패였다. 그는 두 빈 손을 내밀며 “쓰러진 용사들이여, 나는 패하고 내 제국은 유리처럼 깨졌다”고 소리질렀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결국 22일 퇴위하고 29일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할 계획이었으나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10월 15일 남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되었다. 그는 거기서 5년 반을 더 살다가 1821년 5월 5일에 죽었다.
이 5년 반은 나폴레옹 전설을 만들어내는 데 다시 없는 중요한 시기였다. 만일 이 5년 반의 유배 생활이 없었더라면 프랑스 국민의 뇌리에 오래도록 아로새겨진 전설적인 나폴레옹상(像)은 만들어지지 못했으리라. 유배지에서 나폴레옹과 생활을 같이한 역사가 르스 카즈(Emmanuel de Las Cases)와 구르고(Gaspard Gourgaud) 장군 및 몽톨롱(Charles Tristan de Montholon) 장군이 남긴 나폴레옹 전기들은, 1815년 이후의 반동 체제에 대한 반발과 낭만주의의 안개 속에서 문학적인 나폴레옹 전설을 프랑스 국민에게 심어주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죽지 않고 프랑스에 살아남았다. 약 100만의 생명을 군신에게 바친 나폴레옹에게 19세기의 프랑스인은 증오의 비(碑)를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1840년 12월 15일 프랑스 국민은 그의 유골을 세인트헬레나에서 파리로 이장하여 국민 영웅으로 모셨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조카 샤를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이념(Des idees napoleoniennes)>(1839)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백부의 정치이념만이 프랑스를 구제할 수 있다고 선전하더니, 드디어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고 이어 제2제국의 황제가 되어, 전설적인 나폴레옹의 구현자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보나파르티슴은 프랑스의 19세기 역사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유럽과 프랑스에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첫째, 부르봉 왕가가 진정한 통치자의 자격이 있느냐의 문제였고, 둘째는 프랑스 국민이 평화조약을 지킬 의사가 있느냐의 문제였다. 연합국의 입장에서는 프랑스를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이전과 같은 관계에서 대할 수 없게 되었다. 1814년의 평화조약은 나폴레옹을 징계하기는 했으나 프랑스 국민을 적으로 취급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과연 옳았느냐는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컨대 연합국은 프랑스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이 18세는 벨기에에 망명하던 중 계속하여 프랑스왕으로 행세했지만 연합국과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의 왕을 따로 구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영국의 웰링턴이 루이를 강력히 지지하였다. 웰링턴은 탈레랑과 푸셰를 설득하여 루이와 잘 협력하도록 하게 하였다. 루이는 이 세 사람의 도움으로 재빨리 행동하여 자신을 폐위시키려는 연합국의 계획을 앞질러 6월 28일 프랑스 국경을 넘어 7월 8일 파리로 돌아왓다. 연합국은 이 기정사실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워털루의 승리자는 웰링턴으로서 이제는 그와 영국의 발언권이 워털루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던 것이다. 연합국은 웰링턴의 지지를 받는 루이를 물리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연합국은 평화에 대한 프랑스의 어떤 위협도 막아야 한다는 결의가 매우 강하였다. 나폴레옹의 평화 교란에 뻔뻔스레 동조한 프랑스 국민은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 9월까지 100만 이상의 연합군이 프랑스 국토의 3분의 2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1815년 11월 20일 제2차 파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전년 5월 1일에 체결된 제1차 파리조약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가혹하였다. 프로이센 군이 라인 강 좌안 지방을 점령하고 이 지방의 필리프빌과 마리앙부르를 할양받았다. 프랑스는 스위스와의 접경인 위링그 지방의 군사시설들을 전부 파괴하였다. 그리고 몽블랑 도를 샤르데냐 왕에게 반환하였다. 프랑스는 군사적, 영토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7억 프랑의 배상금을 5년 이내에 연합국에게 지불해야 하고, 배상금이 완제될 때까지 15만의 연합군이 프랑스 동부 일대를 점령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도 프랑스 정부는 4대 연합국 대사들로 구성되는 관리 위원단(Control Commisiion)의 감시와 지시를 받아야 했다. 이 위원단은 정기적으로 회담하여 프랑스의 온갖 문제를 조사 검토하였다. 특히 러시아 대표 포초 디 보르고(Carlo Andrea Pozzo di Borgo)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루이 18세의 프랑스는 연합국의 피보호국의 지위로 전락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프랑스의 운명을 매우 불행하게 만들었다. 1814년에 맞닥뜨렸던 문제들만 해도 프랑스로서는 극복하기 어려웠는데 이제 백일천하 사건은 프랑스의 문제를 몇 배나 더 어렵게 만들었다. 두 번이나 망명길에 올랐다가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루이 18세의 복고 왕정이 몇 배나 더 어려워진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었으며, 결국 15년 후 어이없이 왕국이 무너지게 되는 원인이 무엇이었던가는 흥미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