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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Siddhartha) 태자의 수행과정>
싯다르타 태자는 오랜 고민과 망설임 끝에 과감히 출가를 결행했다. 그러나 일단 출가는 했으나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무슨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수소문 끝에 당시의 선지식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를 찾아갔다. 그는 바이샬리(skt. Vaishali)의 바라문 스승이요, 바라문의 대선지식(大善知識)으로 그의 사상은 수정주의(修定主義)였다.
수정주의(修定主義)란 선정(禪定) 수행을 통해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깨달음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 유행했던 종교적 수행으로는 수정주의와 고행주의가 있었다.
• 수정주의(修定主義)는 괴로움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욕망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 어떠한 의식(意識)이나 사념(思念)도 생기지 않도록 하는 선정(禪定)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고행주의(苦行主義)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음을 모든 괴로움의 원인으로 보고, 이 욕망은 주로 육체적
유혹이나 자극에 의해 생기기 때문에 육체적 고행의 수련을 통해 모든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싯다르타 태자는 먼저 알라라 칼라마 선인(仙人)을 사사(師事)해 수정주의의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을 닦아나갔다. 그리하여 무색계선정 제3단계인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 이르렀다. 그런데 일체의 사념이나 의식이 없는 정(定)의 상태에서는 욕망과 고통이 없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지만 정(定)의 상태에서 현실로 돌아오면 다시 사념과 의식이 일어난다. 즉, 괴로움으로부터의 영원한 해탈이란 영원히 사념이나 의식이 없어야 하는데,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 이상의 것을 배울 것이 없어 이번에는 마가다국에 있는 바라문의 스승 웃다가 라마풋다(Uddaka Ramaputta)를 찾아갔다. 그는 알라라 칼라마와 같은 수정주의자였다. 그의 지도 아래 싯다르타는 무색계 선정의 최고 수준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익혔다. 그리하여 스승의 경지까지 넘어섰으나 이들의 방법으로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고(苦)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상의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의 곁을 떠났다.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삼매수행은 여덟 단계로 나누어져 있고, 차원이 높아갈수록 번뇌가 정화된다. 이를 팔선정(八禪定)이라고 하는데, 초선⋅이선⋅삼선⋅사선⋅공무변처선(정)⋅식무변처선(정)⋅무소유처선(정)⋅비상비비상처선(정)의 여덟 단계를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초선⋅이선⋅삼선⋅사선은 아직 몸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선정이므로 색계선정(色界禪定)이라 하고, 공무변처정⋅식무변처정⋅무소유처정⋅비상비비상처정은 물질의 속박은 벗어났으나 정신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선정이므로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이라고 한다.
비상비비상처정은 이 무색계선정(無色界禪定)의 마지막 단계이다. 우리 중생이 느끼는 번뇌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생각이 조금도 없고 아주 맑고 미세한 생각만 조금 있는 경지로서 비상비비상처정이란 일체 공(空)이라고 하는 상(想)까지도 뛰어넘어 상(想)이 없는 데까지 수련을 진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미 그 당시 싯다르타 태자께서는 보살십지(菩薩十地) 가운데 마지막 법운지(法雲地) 경계에 도달해, 두 학자를 넘어섰으나 바라던 성과를 얻지 못해 그들과 결별하고, 수행 방법을 바꿔 당시 유행하던 고행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고행을 실천하기 위해 마가다국의 보드가야(Bodhgaya-Buddhagaya)라고 하는 마을 가까이 있는 우루벨라(라(Uruvelā, 優樓頻螺)의 고행림(苦行林) 숲으로 갔다. 그곳은 맑은 니련선하(네란자라강) 강물이 흐르고 있어서 수행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 곳에서 교진여(憍陳如, 콘단냐) 등 다섯 수행원들과 함께 고행에 들어갔다.
고행을 나타내는 산스크리트어 ‘타파스(tapas)’는 열(熱)을 뜻하는 말로 고행을 통해 신체에 열이 축적되면 그 열의 힘에 의해 목적하는 일이 성취된다고 믿었다.
최고의 수도자인 두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던 싯다르타 태자는 그들의 가르침으로는 자기 자신의 실존적 과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당시 일반화된 수행인 고행을 통해서 그 해답을 얻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싯다르타 태자는 대단한 고행을 실천했다. 다 해진 삼베옷을 입거나,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낡은 옷을 입었으니 거의 거지꼴이었다. 식사에 초대 받아도 가지 않았다. 집안에 들어가 음식을 얻지도 않았다. 문 앞에 내놓은 음식도 살코기나 물고기는 먹지 않았다. 오직 야채만을 먹었다. 때로는 저절로 떨어진 과일을 주워 먹었다. 하루에 한 끼만을 먹었고, 또는 이틀에 한 끼, 사흘에 한 끼를 먹었다. 이윽고 칠일에 한 끼를 먹다가 드디어는 보름에 한 끼를 먹었다.
또 온갖 고행 끝에 숨을 쉬지 않는 선정(禪定)에 들고자 했다. 입과 코로 드나드는 숨을 그쳤을 때, 두 귀에서 나오는 바람은 굉장한 소리를 냈다. 그것은 마치 대장간의 풀무가 내는 소리와 같았다. 또 굉장한 바람이 머리를 괴롭혔다. 그것은 마치 힘센 사람이 날카로운 칼끝으로 머리를 찧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참을 수 없는 두통이 왔고, 굉장한 바람이 배를 가르는 것 같았다. 온몸에 심한 열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실로 냉엄하게 노력했고 늘 긴장해 있었다. 그의 마음은 어지러워지지 않았으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몸은 심하게 떨렸고 안정되지 못했다. 그러나 육체의 고통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은 없었다.
그는 다시 단식을 하기로 뜻을 세웠다. 조금씩 먹는 양을 줄여갔다. 그의 몸은 점차 쇠약해져 끝내는 극도로 여위었다. 손과 발은 풀잎의 마디와 같이 되고, 궁둥이는 발목과 같이 되고, 등뼈는 드러나 앙상하고, 늑골(肋骨)은 드러나 마치 허물어진 집의 서까래와 같았다. 일어서려고 하면 머리를 땅에 박고 넘어졌다. 손바닥으로 몸을 만지면 몸의 털은 모근(毛根)과 함께 빠져 나갔다. 이와 같이 겪은 격렬한 고행은 과거 어떤 사람도, 현재 어떤 사람도, 미래 어떤 사람도, 그와 같이 고행한 사람이 없고, 고행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철저한 고행을 실행했다. 그는 죽은 사람과 같이 돼있었다.
그러나 육체를 괴롭히는 것은 육체의 극복이 아니라, 도리어 육체에 대한 집착만을 더 할 뿐이었다. 온갖 고행과 수행을 했음에도 그는 범인(凡人)의 규범을 뛰어넘는 성자(聖者)의 지견(知見)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와 같은 혹독한 고행을 통해, 범인(凡人)의 수행을 초월할지언정 성자(聖者)의 지혜를 얻을 수는 없으며, 반드시 깨달음을 얻는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중요한 것은 육체를 괴롭히는 일이 아니라 육체를 잊는 일이며, 육체를 잊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일이며, 나아가 마음이 스스로 청정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드디어 지혜를 얻었다. 이 거룩한 지혜는 곧 거룩한 힘이어서, 이 힘을 따라 실천하는 자는 바른 고(苦)의 소멸에로 이끌려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같이 극도로 쇠약한 몸으로는 해탈의 즐거움을 얻기 어렵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니련선하(네란자라강)에서 6년간의 묵은 때를 씻고 강가 언덕의 풀밭에 지친 몸을 뉘였다. 마침 이 근처를 지나던 우루벨라 촌장의 딸 수자타(Sujata)가 바친 우유죽(유미죽/乳米粥) 공양을 받아 한동안 먹고 기력을 회복했다. 수자타는 싯다르타에 다가와 유미죽을 발우에 담아 바치며 다음과 같이 기원했다.
“이 우유죽을 받아 드시고 반드시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소서!”
그리하여 붓다를 열반에 들게 한 춘다(純陀, Cunda)의 공양과 함께 이 수자타의 공양은 붓다 일생에
가장 중요한 두 번의 공양 중 첫 번째가 되는 것이다(현재 붓다가 정각을 이룬 보드가야엔 수자타 사원이 있다).
헌데 이를 지켜 본 다섯 비구들은, ‘사문 고오타마는 타락했다. 그토록 고행을 하고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문이 여인이 주는 유미죽을 받아먹고 어떻게 최고의 경지에 이르겠는가. 정진을 포기한 고오타마는 타락했다’고 생각하고, 그의 곁을 떠나 녹야원으로 가버렸다.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 돌 의자에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단좌명상에 들어가려는데, 엉덩이가 배겨서 앉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목초(牧草)을 지고 가는 농부에게 풀을 얻어서 푹신하게 깔고 가부좌를 하고 조용히 명상에 들어갔다.
그는 결코 바른 깨달음을 이루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인간의 근본문제인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하고 비장한 각오로 선정삼매에 들어갔다.
이때 온갖 마구니들이 유혹했으나 안주(安住)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그는
제일선정(第一禪定)에서는 욕망과 악을 떠나 마음의 잡념을 있는 그대로 초월해 기쁨을 맛보았다.
제이선정(第二禪定)에서는 마음의 잡념을 가라앉히고 안으로 고요함을 얻었다.
제삼선정(第三禪定)에서는 앞에서 경험한 기쁨까지도 초월하고,
바른 생각(正念)과 바른 지견(正知見)을 얻어 몸으로 즐거움을 느꼈다.
그리고 최후로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어지고, 근심도 기쁨도 없어져 안온(安穩)한 느낌만이
계속되는 청정한 제사선정(第四禪定)에 이르렀다.
그는 이 마지막 선정에 의해 마음은 바르게 통일되고 청정해졌으며,
번뇌를 떠나 자유로워졌고, 부동(不動)의 경지에 도달해, 초저녁에 천안통(天眼通)을 얻었다.
천안통에 의해 중생의 나고 죽는 운명을 관찰해 바른 지혜를 실현하자 어둠을 사라지고 광명이 나타났다.
다시 선정에 들어 마음이 청정한 한밤중에 숙명통(宿命通)을 얻었다.
숙명통에 의해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전생(前生)을 알게 됐다.
그는 인간적인 모든 고뇌를 완전히 해결하고,
어둡고 어리석음의 근본인 번뇌를 완전히 깨뜨린 지견(知見)의 광명(光明)을 얻었다.
그리하여 출가한지 6년이 되는 음력 섣달 초여드렛날 어둠을 가르고 동이 트는 서광(曙光) 속에서
샛별을 보며, 대우주의 진리를 체득하고 부처님이 되셨다.
이때 천상계의 신(神)들은 일제히 부처님을 찬탄하며 꽃을 뿌렸다. 그 꽃들이 쌓여 무릎을 덮었으며,
그 순간 모든 어둠은 사라지고, 모든 세계는 기쁨으로 가득 찼다. 부처님의 머리 위에는 보석의 천개(天蓋)가
걸리는 것 같았고, 광명은 삼천대천세계를 비추는 듯했다.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들은 이 일을 찬탄하고
새로이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덕(德)을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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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Hermann K. Hesse)가 쓴 소설 <싯다르타>는 붓다의 이름인 ‘싯다르타’와 동명이인의 한 인물이
진리를 찾아 나서며,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는 작품 속의 붓다를 ‘고타마’라 칭하고,
주인공의 이름을 ‘싯다르타’로 따로 구분하고 있다.
소설의 배경이 붓다가 생존했던 시대이며, 싯다르타의 삶이 붓다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작풍에서
주인공은 붓다와 별개의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진리를 향한 고뇌는 같은 차원에서 그려진다.
헤세가 거의 일 년 반 동안 창작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정신 치료를 받은 후 발표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일 년 반 동안’을 사람들은 ‘이 작품을 위해 헤세가 실제로 일 년 반에 걸쳐 깨달음의 과정을 거쳤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든 이 소설은 동서양의 정신적 유산을 시적으로 승화한 일종의 종교적 성장소설로 볼 수 있는데,
영원을 향한 갈망과 인간의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초월에 대한 의지를 단순하고도 서정적인 문체로 담아냈다.
자아의 발견을 위한 길이 하나로 정형화돼있지 않음을 시사하면서 철학이나 종교,
그 밖의 모든 신념에 맹목적으로 의지하고자 하는 고정관념을 부정하는 작품이다.
인도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친구 ‘고빈다’와 함께 출가한다.
그리하여 사문들과 수행한지 3년 정도 지났을 무렵에 ‘고타마’라 불리는 한 인물이 나타났는데,
자신의 내면에서 세상의 번뇌를 모두 극복하고 윤회의 수레바퀴마저 정지시킨 세종, 부처라는 분이었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함께 수행하던 사문의 최연장자에게 떠나겠다는 결심을 알렸다. 고타마의 제자가 되기를
자청했지만 고타마의 가르침만으로는 자신이 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친구 고빈다와도 헤어지게 된다. 즉,
그는 불교를 창시한 고타마(석가모니) 밑에서 수행할 기회를 얻었지만, 부처의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친구 고빈다를 두고 홀로 길을 떠난 것이다.
이후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갈망하는 그는 가장 밑바닥의 자아를 알기로 결심하고 방탕한 세속 생활에 실제로
몸을 담근다. 중년이 될 때까지 사랑하는 여인과 부유한 상인을 만나 세속의 욕망을 즐긴다. 또 아름답고
현명한 기생 카마라에게서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상인 카마스바미에게서 부와 허세를 배운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이런 생활을 윤회와 어린애의 유희로 보고 경멸하며 도박에 몰입하다가 속세의 생활에서
도망친다.
그러나 자살하기 직전, 희망에 찼던 청년 시절의 기억과 강의 신비스러운 음성이 그를 지켜준다. 그 후 뱃사공
바수데바의 조수로 살아가다가 속세의 쾌락에 대한 정신적인 오만도 초극한다. 바수데바를 길잡이삼아 강의
가르침을 받은 싯다르타 자신은 어느 때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세계가 녹아 없어져 자신으로부터 떠나 가버리고 마치 하늘에 떠있는 별처럼 홀로 외롭게 서 있는 순간부터 예전보다 자아를 더욱 단단하게 응집시킨 채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는 겸허한 완성자에 이르고, 어느 날 여전히 평화를 못 찾고 구도의 길을 걷는 붓다의 제자인 친구 고빈다는 강가를 찾아와 완성자 싯다르타를 확인한다.
헤르만 헤세는 ‘진리는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일생에 꼭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시도가 바로 이 작품으로 담아냈다는 것이다. 어쩌면 부처님의 구도 과정을 이해는 데 도움이 될 듯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