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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전
1. 박 어사가 구천동 인민을 신도로 다스린 일 조선 영조 시대에 박문수 어사는 유명한 남도 어사였다. 재능과 덕망이 조야에 떨쳤다. 이 때 호서의 도둑 이인좌와 영남의 정희량 등이 군사를 이르켜 난리를 일으켰다. 그들은 상여 속에 병기를 싣고 청주에 들어와 병사 이봉상과 영장 남연평을 죽이고 안성의 청룡산 위에 진을 치는 것이었다. 봉조하 최규서가 변을 고하였다. 영묘조는 크게 놀라 박문수로 하여금 날뛰는 도둑을 토벌케 한 후 백성의 근심을 보찰하사 박문수에게 팔도 암행 어사를 제수하셨다. 이리하여 박문수가 인정을 살피며 덕유산으로 들어가니,이산은 골짜기가 깊어 맹수가 들끊는만큼 거기 사는 백성 이외는 함부로 출입을 못 하는 곳이었다. 여기서 박 어사는 어쩌다 잘못으로 밤에 그만 길을 잃어 버리고 방황 끝에 심한 기갈을 느끼며 지쳐서 낙엽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문득 보니 그의 앞쪽에 등잔불이 은은히 비쳐오고 있는게 아닌가. 그는 일어나 등불을 찾아갔다. 그러자 천만 뜻밖에도 인가가 즐비한 큰 마을이 나서는 것이었다. 밤은 이미 깊어 집집이 문을 닫고 만리가 고적한데 한 골짝에 당도하니 창 밖으로 등불이 비쳐 나오고 방 안에서 사람의 소리가 괴이하게 들려왔다. 그는 크게 놀라 한 옆으로 피해 창 틈으로 엿보았다. 늙은 사람 하나가 단도를 빼어 들고 누운 사람의 배 위에 올라앉아서 칼로 찌르려고 하며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이 놈 죽어라!" "이 놈 죽어라!" "죽어라!" 그런데 누운 사람은 다만 죽겠습니다. 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 어사는 기침을 크게 하고 창문을 두드렸다. 주인이 나와 영접하였다. 어사가 주인을 따라 방 안에 들어서니 누웠던 사람은 없어지고 단도를 가지고 흉행하려던 사람뿐이었다. 어사가 좌정한 후에 자기의 성명과 거주를 댄 다음 길을 잃고 들어온 시말을 말하자 늙은 사람은 만면에 수심을 띠고, "내 성은 유씨요, 이름은 안거입니다." 하고 깊이 탄식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밥과 과자를 가지고 나오는 것이었다. 어사는 치사하고 밥상을 받은 후에 주인의 내력을 자세히 물어 보았다. 그러나 유안거라고 성명을 밝힌 주인은 진상을 밝히기를 꺼렸다. 어사가 간곡히 반문하자 그제서야 주인은 자기의 전후 시말을 차례로 말하였다. 본적은 경성이고 아내 최씨와 더불어 세 살난 아들 득주 하나를 데리고 덕유산 아래로 내려온 지 열두 해에 득주를 무주 김정언의 질녀와 성취시켰으나 가계는 점점 어려워가기만 하였다. 마침 이 동네 구화선이라는 사람의소개로 이 곳으로 이사하여 학구로 종사한 지 십여 년이 되었다. 이 곳의 환경은 사방 육십 리가 무인지경이다. 토인이 개척한 것이 어느 시대인지 모르나 다만 구가와 천가 두 성바지가 대대로 거주하므로 이 동네의 이름을 구천동이라 하였다. 구천동 백여 호에 내 집 하나 섞여 살고 있는데 양서의 학채 수입으로 처음 들어올 때보다는 생활 정도가 풍족하다. 이야기를 들은 박 어사는 다시 물었다. "내 주인께 오늘 저녁의 일을 묻고자 하니 주인께서는 숨기지 마시오. 아까 창 밖에서 보았을 때 주인이 소년을 흉행하려 했소. 그 어찌된 일이오?" 유안거가 놀라며 말이 없더니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그 소년은 내 아들 득주입니다. 이웃에 천운거라는 자가 있어 제 재종 질녀를 취하여 그 며느리를 삼았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은 동수입니다. 천운거의 집이 본래 난잡하여 동수의 처가 부정한 행실이 있는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내 자식 득주와 이번에 간통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우리집 부녀를 탈취하려 합니다. 내 아내 최가는 천운거가 탈취하고, 내 며느리는 천동수가 탈취하여 혼례를 올린다는 것인데 그 혼례일은 내일입니다. 오늘 밤이 지나면 천가 부자가 와서 신부를 내놓으라고 할 것이니 강약이 부동으로 저희 하자는 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욕을 앉아서 당하느니 차라리 한 칼로 내 자식을 죽이고 아내를 죽인 후에 나도 죽으려 하니 공은 어서 떠나시오." "내일 혼례하는 시간이 어느 때쯤이나 되겠소?" "신시 초가 될 것입니다." "주인은 염려 마시오.내 이 길로 나갈 것이며 내일 신시가 되기 전에 좋은 소식을 전하리다." 박 어사는 구천돌을 떠나서 무주읍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군수를 시켜 광대들을 대령케 하고 그 중에서 땅재주 잘 하고 용감한 자 네 명을 골라 각각 색깔이 다른 군복을 지어 입히고 자기도 군복으로 갈아 입은 후 덕유산으로 향하였다. 오정이 다가오자 천가 부자가 유안거의 집으로 들어와 늙은 최씨 부인과 그 며느리 김씨 부인을 붙잡아 않히고 혼례를 올리려 하니 구천동 사람들이 일시에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이 때 신장 하나가 교배청으로 들어가 좌정하더니 교배상을 벼락같이 치며 도방 청제 대장군을 부르자 공중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며 한 신장이 마당 가운데로 떨어져 동쪽에 비켜서는 것이었다. "서방 백제 대장군!" 중앙 신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또 한 신장이 마당으로 떨어져 서쪽으로 서는 것이었다. '남방 적제 대장군!" 다시 대답 소리가 공중에서 들리며 한 신장이 떨어져 남쪽으로 비켜섰다. "북방 흑혜 대장군!" 이번 신장은 북쪽으로 비켜섰다. "나는 중앙 황제 대장군으로서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이 곳에 왔다. 상제께서 무주 구천동에 괴악한 두 사람이있으니 잡아 바치라 하셨기에 내 여러 신장을 불렀으니 사방 신장은 합력하여 이 중에 사모 관대한 두 사람을 잡아 가라." 사방 신장이 일제히 달려들어 천운거와 천동수를 문 밖으로 잡아내어 독수리같이 몰아가는 것이었다. 이 때 천운거 부자를 잡아간 사람은 박문수 어사였다. 본읍에셔 데리고 온 광대 네 명으로 하여금 유안거의 집을 사방으로 뛰어넘어 들어가서 천운거 부자를 압령해 가지고 나오다가 구천동 삼십 리밖에 이르자 광대를 시켜 그 후 그들을 때려 죽여 깊은 산속에 파묻은 다음 박문수는 여러 지방을 두루 살피고 경성으로 돌아와 성상께 아뢰어 엎드려 절하였다. 이에 성상은 박문수의 직품을 높여 정이품을 하사하시고 내직으로 선용하셨다.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나자 남방이 병화 이후에 인심이 어지러운 바 있어 다시 박문수를 삼남 수의 어사로 파송하셨다. 박 어사는 영남 삼도를 시찰하게 되었다. 그의 발길은 자연히 덕유산 밑에 이르게 되었다.생각하니 십년 만이었다. 박 어사는 유안거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하여 유리걸객의 행색으로 다시구천동에 들어가니 이왕에 보지 못하였던 기와집 한 채가 반공에 솟아 있었다. 박 어사가 의아하여 그 기와집으로 찾아와 알아보니 주인의 성명이 곧 유안거였다. 박 어사는 속으로 반가워하였다. 그러나 유안거야 어찌 박 어사를 알아 볼 것인가. 밤이 저문 후에 박 어사는 유안거에게 그 후의 일을 물었다. 다음은 그가 대답한 내요이다. "내 이 곳에 들어온 지 십칠 년입니다. 들어온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네 청년을 가르쳤으나 처음엔 살림이 넉넉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십년전에 이 곳 구천 양성이 재물을 합자하여 이 집을 지어 나를 주었고 그 후부터 주민 백여 호가 매년 수확의 일부를 내 집에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 수입에서 해마다 남은 것을 저축하여 토지를 사들인 것이 수백 석이 넘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주민의 진공은 해마다 증가되어 가기만 하니 가세가 자연히 풍족해졌습니다. "어째서 십년 이래로 주민이 당신에게 진공하게 됐소?" "내 일찍이 신도라는 것을 믿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 곳에서 그것을 안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 곳 토착민과 더불어 그 일을 목도 했으니까요. 십년 전에 내 집과 이 곳 천가집 사이에 불미한 관계가 있어서 내 집이 곤욕을 당하고 집이 장차 멸망하게 되었었지요. 그 때 우연히 하늘에서 옥황상제께서 다섯 분의 신장을 내려보내시어 내 집과 문제가 있던 천가 두 사람을 잡아 올려가신 후로 오늘날까지 시체도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 일로 본토민들이 놀라 서로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저 집은 하늘이 아는 집이니 감히 존경치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다투어 내 집에 진공을 융숭히 하게 되었습니다. 나로선 내가 무슨 덕이 있어 하늘의 이와 같은 은혜를 입는가 하고 도리어 두려운 마음이 생겨 이 곳 토민의 자제들을 정성껏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이 곳 신진 청년은 십년 전 이 곳 사람들에 비하면 많이 깨었습니다." "상제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오." 박 어사는 이 말 한 마디를 남기고 그 이튿날 구천동을 떠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남방을 다스린 지 수년에 수의 사또를 하직하고 내직으로 다시 올라가니 그 후부터 사방이 태평하여 인민이 마음을 놓았고 자연히 조정에는 일이 없게끔 되었다. 영조께서 한가하실 때에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각기 평생의 경력을 말해 보라 하시니, 박문수는 덕유산에 들어가 구천동 인민을 다스린 일과 유안거에 대한 사실을 말씀드렸다. 영조께서 물으셨다. "그 후에 유안거를 다시 만났을 때 어째서 상제의 은혜를 말하고 경의 일은 말하지 않았소?" "신이 그 때 신의 일을 말했더라면 구천동구를 나서지 못하고 죽는 것도 죽는 것이지만, 유안거의 일문이 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다음 구천동 인민이 다시 화와 액운을 만나 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이 자리가 아니었다면 평생에 어찌 입을 열겠습니까?" 상감 이하 여러 신하가 모두 박문수의 도량을 절찬하여 마지않았다.
2. 남궁로 군수가 시비로 딸을 삼아 시집보낸 일 삼한 시대 변한국에 진주국 창원 군수 석진은 본래 금주 사람으로 나이 사십이 넘어 상처하였다. 그 죽은 부인의 소생은 팔 세된 딸 하나뿐이었는데 이름을 계향이라 하였다. 부인 생전에 부리던 계집종 춘매를 수양딸로 삼았는데 춘매의 나이는 계향보다 다섯이 많았다. 둘은 서로 떠나지 못하고 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내아에 들어가 석진이 그 딸 계향과 춘매에게 장난을 시키는데, 계향이가 치는 공을 춘매가 받아서 한 번 차자 공이 굴러 뜰 앞 길은 굴로 들어갔다. 춘매는 그 굴 속에 팔을 디밀어 공을 꺼내려고 하였으나 굴이 깊어 꺼내지 못하였다. 곁에서 보고 있던 군수가 계향에게 공이 스스로 굴 밖으로 나오게 할 도리가 없겠느냐고 물었다. 한참 생각하던 계향이가 춘매로 하여금 물을 길어다 붓게하자 공이 물 위에 떠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 후로 석진 군수는 불의의 변으로 환곡 쌓은 창고에 불이 나서 천여 석의 환미가 다 없어져 버렸다. 그로 말미암아 석진은 관직에서 쫒겨나고 일천오백 냥을 배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석진은 청백한 관원으로 평소에 저축이 없었으므로 그 배상 능력이 없었다. 석진 군수는 이 일로 인하여 심화병을 얻고 십여 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때의 나라 풍속은 그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고 부족되는 것은 가족을 관비나 사비로 공매하여 징수하는 것이었다. 계향과 춘매는 공매에 붙여졌다. 그 때 마침 그 지방에 진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죄에 관련되어 삼 년 동안이나 미결수로 옥에 갇혀 있었는데 석진 군수가 도임하여 그의 억울함을 알고 상부에 고하여 그를 무죄 석방하였던 것이다. 진도는 계향과 춘매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깍듯이 예우하였다. 상인인 진도는 멀리 나가 있는 날이 많은데 멀리 있을 때도 계향의 의복감과 식료품은 특별히 좋은 것으로 가려 부치고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계향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이에 진도의 아내는 불쾌감을 가지고 계향을 미워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진도가 다시 멀리 외지로 떠난 어느 날 아침, 춘매가 떠놓은 세숫물이 너무 일찍 떠놓았으므로 진도의 아내 진파가 세수할 시간엔 다 식어 있었다. 진파는 춘매를 한나절이나 두고 두들겨팼다. 그것을 보다못해 계향은 진파 앞에 나가 공손한 말로 만류하였다. 그러나 진파는 춘매와 계향을 떠밀어 물리치고 계집 하인배에게 호령하는 것이었다. "저 석자 여자 두 년이 집에 들어와 스스로 교만하다. 원인은 내 집에 팔려온 계집애를 주인이 높인 데서 온 것이니 어찌 그들을 상전 대우 하겠느냐. 다음부터는 석 소저라 부르지 말고 계향이라 불러라." 이 날 진동에게서 사람이 와 봉물과 편지를 진파에게 전하였다. "봉물은 석 소저의 혼숫감이니 석 소저 거처하는 방에 잘 간수하오. 남은 말은 내가 십여 일 후에 도착하겠기로 적지 않소." 편지를 읽은 진파는 계항에게 온 봉물을 제 방으로 들이고 계향의 방으로 쫓아 들어가더니 기왕의 진도로부터 온 봉물까지 빼앗고 떠들어댔다.그리고 생각하였다. "진도가 돌아올 날이 멀지 않다 . 그가 돌아오면 나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두 사라믕 없애 버리는 게 상책이다." 이튿날 이웃의 장파라는 노파를 불러들이니, 노파는 인신 매매하는 거간꾼이었다. 계향과 춘매를 팔기 위해서였다. 노파는 크게 기뻐하였다. "지금 이고을 사또께서 무남독녀를 진해 부윤의 자제에게 시집보내는데 계집종을 구하는 중이오. 계향은 거기 팔면 되겠거니와 춘매는 내 생질에게 시집보내 주겠소?" "그러시오." 이 고을 군수의 성명은 남궁로로 지금의 진해 부윤 고달이란 사람과 동문수학한 벗이었다. 고달 부윤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고만민이요, 둘째는 고억민이었다. 형이 나이가 차매 매파를 남궁 군수에게 보내어 청혼하였다. 남궁 군수는 허혼하고 혼례일을 시월 중순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딸 서경이에게 딸려보낼 계집종이 없어 장파를 불렀다. "우리 애와 비슷하며 총명한 아이만 구해 오면 천금을 아끼지 않으리라." "몸값은 백오십 냥만 내시오." 장파는 계향의 몸값을 받아 진파에게 전하고 계항을 데리고 나섰다. 남궁 군수의 가족들은 계향의 아름다움을 보고 경탄하였다. 장파는 내아에서 나와 진파의 집으로 가서 춘매를 데려다가 제 생질 정갑룡과 성례시켰다. 계향은 서경 소저의 시비로 들어간 후로 시중에 열중하였으나, 지난날의 자신의 신분을 생각하니 한심스러웠다. 하루는 뜰에서 빗자루를 멈추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때 마침 남궁 군수가 보고 우는 이유를 물었다. 그리하여 계향의 본래 신분을 알게 된 남궁 군수는 계향을 서경과 자매의 의를 맺게 하였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고달 부윤에게 부쳤다. "근일 딸자식의 시비를 구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비는 전 군수 석진의 딸이었습니다. 동관의 자식은 곧 내 자식이니 어찌 내 딸의 시비를 삼겠습니까. 또 내 딸을 이 아이보다 먼저 시집보내는 것은 동관 사이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먼저 이 아이를 위하여 사람을 구한 후에 내 딸의 혼사를 마치고자 하니 혼인을 후일로 미루어 주십시오." 고달 부윤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뜻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계향을 내 며느리로 허락해 주십시오." 이제 남궁 군수가 다시 편지를 보냈다. "의탁이 없는 규수에게 장가드는 것은 비록 높은 의리라 하겠으나 이미 정한 연분을 고치는 것은 대의에 어그러집니다. 반드시 기왕 정한 언약을 지켜 주십시오." 부윤은 편지를 받고 부끄럽게 생각하며 편지를 썼다. "딸로서 딸을 바꾸려 하였음은 내 집에서 의를 중히 여겼기 때문이요, 이왕의 연분을 끊고 다른 연분을 취하려 하였음은 당신께서 예법을 지키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게 둘째 아이가 있으니 바라건대 영애는 내 장남과 혼인을 그대로 이루게 하고 계향은 내 차남 억민에게 허락하십시오. 그리고 혼인도 같은 날에 함이 좋겠습니다." 드디어 혼수를 나누어 차등이 없게 하고 길일을 기다려 부윤집의 신랑을 쌍으로 맞아들이니, 그 밤 새벽에 사모 관대한 한 관원이 남궁 군수의 문에 나타나 말하였다. "나는 이 고울 전 군수 석진입니다. 이 고을에서 죽은 후 천계에서 상제를 모시고 있던 중 의탁 없는 내 딸을 건져 주시기에 그 사실을 상제께 말씀드렸더니 상제께서 특별히 공의 유덕을 생각하시고 공에게 아들 하나를 지시하여 공의 문호를 빛나게 하셨습니다." 그 후 과연 남궁 군수 부인이 오십 이후에 아들을 얻으니, 아들이 자라서 제 부모 생전에 마한으로 들어가 벼슬이 영상에 이르고, 고달 부윤의 두아들도 본국에서 부귀가 혁혁하였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진도가 집에 돌아와 아내의 행악을 알고는 고달 부윤의 지베 찾아가 진파의 죄를 대신 사과하고 춘매의 일을 알리니 고달 부윤은 춘매와 정갑룡을 불러들여 집사람을 삼았다. 진도는 진파의 불량함을 한하여 진파를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서 젊은 계집을 얻어 아들 형제를 낳으니, 이것이 모두 선을 쌓은 결과임을 말할 것도 없겠다.
3. 배진국공이 평생에 인정 승천한 일 중국 한문제 때 세도로 한창 유명하던 둥퉁이라는 신하가 있는데 임금의 은총이 지극하였다. 그런데 이 때 관상 잘 보는 허부라는 사람이 둥통의 상을 보고 말했다. "한때 부귀가 비할 데 없으나 종리문이라는 주름살이 입으로 들어갔으니 필경은 굶어 죽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문제가 말하였다. "둥통의 부귀는 내게 달렸는데 누가 둥통을 곤궁케 하겠는가?" 그러고는 서촉 동광을 둥통에게 내주어 돈을 벌어 쓰게 하니 둥통의 부함이 나라와 견줄 만하였다. 한번은 문제가 우연히 부스럼이 생겨 고름이 터져나오게 되었는데, 둥통이 입을 대고 빨았다. 이 때 마침 황태자가 들어오므로 문제는 황태자에게 말하였다. "부스럼을 빨아 보아라." "지금 막 생선회를 먹었기 때문에 옥체에 가까이 가지 못하겠습니다." 황태자가 나간 후 문제는 말하였다. "지정이 부자간보다 두텁다." 황태자는 그 말을 전해 듣고 은근히 둥통을 미워하였다. 그 후에 문제가 죽고 황태자가 즉위하니 그가 곧 한경제였다. 한경제가 둥통을 국화 위조범으로 몰아 둥통의 재산을 국고에 넣고 둥통은 빈방에 가두어 음식을 끊게 하니, 둥통은 과연 굶어 죽었다. 이 때 기세가 일세를 휘두르던 주아부도 종리문이 입으로 들어가 있었다. 경제가 아부의 위엄이 너무 굉장함을 꺼려 황실범으로 죄를 얽어서 옥에 가두니 아부는 분함을 못 이기고 스스로 굶어 죽었다. 이 두 사람은 부귀가 굉장하였으나 얼굴에 나타난 흠으로 인하여 상가의 술법 속에서 죽었다. 그러나 상서에 그렇지 않은 구절이 있으니, 가령 부귀의 상을 타고 난 사람일지라도 남에게 악을 행하면 자기의 복을 감하는 수가 있으며 흉악한 상을 타고난 사람일지라도 심지가 곧고 남에게 선을 많이 행하면 복을 얻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으로 당나라 때 배도라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 역시 입으로 종리문이 들어간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집안이 가난하여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다가 향산사라는 절에 들어가 우연히 그 우물 곁에서 보물 하나를 주웠다. 배도가 보물을 제자리에 놓고 그 곁에 앉아서 잃어버린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얼마 후에 젊은 부인이 울면서 와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았다. 배도는 그것을 부인에게 내주었다. 그 후 관상하는 사람이 이 배도를 보고 말하였다. "그대의 상모가 변해 버렸소. 지금은 굶어 죽을 상이 아니니 무슨 은덕을 베푼 일이 있습니까?" 배도가 보물 찾아준 이야기를 하자 관상쟁이는 배도가 후일 부귀할 것이라고 하였다. 과연 배도는 그 후 영달하여 영의정이 되었다. |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고령박씨 박문수 - 남궁로 - 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