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cjstory.com%2Fdata%2F200605%2Fimages%2F051_t01.gif)
푸르른 날들이 계속되었으나 햇빛이 강해질수록 슬픔은 근육을 키워 건강해만 갔다. 마치 나뭇잎들이 광합성을 하듯 슬픔의 들숨과 날숨은 거칠었다. 죽을 만큼 지치되 결코 죽지는 않는 것이 그리움과 외로움인 듯했다. 고창에 들어서자 푸르른 날들처럼 푸르른 들판이 계속된다. 눈이 시려 모르는 척 뒤돌아서도 널따란 평야가 밋밋한 하루처럼 한없이 펼쳐져 있다. 그 넓은 평야 위 하늘은 맑기 그지없고 구름은 뭉텅뭉텅 그림처럼 떠가고 바람은 어깨를 툭툭 치며 영혼을 타넘고 다닌다. 보리밭이 이어달리다가 때 이른 푸성귀밭이 이어달리다가 지평선에 닿으면 푸르른 하늘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 푸름의 속내는 붉디붉었으니 푸름은 아픔의 다른 말 같았다. 고창의 땅은 그 붉기가 농익은 과실이나 벌어질 대로 벌어진 꽃 같다. 이제 지는 일밖에 남지 않은 꽃의 붉기가 그러하리라. 이제 막 끝내는 일밖에 남지 않은 사랑의 붉기가 그러하리라. 그것이 아무리 이파리들의 푸름에 휩싸여 있다 해도, 벌건 상처의 냄새를 풍기고 있단 걸 우린 다 알고 있으니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cjstory.com%2Fdata%2F200605%2Fimages%2F051_m_i02.gif)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했다. 고창에선 어딜 가든 땅으로 돌아간 이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고인돌 2,000여 기가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번듯한 자리에 무덤을 썼을 것이란 생각으로 고인돌을 찾아갔다. 그러나 마늘밭 한가운데, 마을 정자나무 곁에, 어느 집 부엌 곁에, 뒷집 담 너머에… 어디든 놓여져 있다. 옛 사람들은 죽은 자를 늘 곁에 두고자 했던 것일까, 어찌되었든 죽은 자들을 멀리 산에 두지 않고 함께 지내는 모습이 고귀해보였다. 생과 죽음을 선 그어 나누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10여 년 전 고창을 지나며 소에 쟁기를 걸어 붉은 밭을 갈아엎고 있는 농부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밭에는 커다란 고인돌 한 기가 놓여져 있었다. 나는 그가 마치 그 무덤의 주인인 것만 같았다. 그도 어쩌면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그 밭에 몸을 눕히고 싶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는 일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고창은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조밀한 고인돌 분포지역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죽림리와 상금리에 고인돌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것들의 모양새는 북방식이라 하는 탁자식, 윗돌이 지상에 나와 있는 개석식, 남방식이라 하는 바둑판식이 있는데 그 세 가지 형식이 다 어우러져 있다. 그 크고 잘생긴 돌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 마치 선사시대로 들어선 것만 같다. 게다가 사람 생김만큼이나 같은 모양의 돌이 없으니 무덤의 주인을 잘못 찾을 일은 없었겠구나 싶다. 마음을 다른 곳에 둘 일 없겠구나 싶다.
고창읍성으로 간다. 읍성을 밟으며 걸으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고창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책을 즐긴다. 노란 유치원복을 입은 아이들도 햇살 속으로 소풍 나와 도시락을 먹는다. 읍성의 안쪽에는 한옥들이 앉혀져 있고 그 주변으로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숲의 안쪽에서 보면 읍성을 거니는 이들이 나무 사이사이로 보인다. 하늘을 타고 오르는 듯한 모습들이 마치 치성을 드리러 가는 무리들 같다. 초록이 물오른 숲 가운데서 나는 그만 사랑일랑은 고인돌 속에 넣어버리고 그들 무리 속으로 내달음질치고 싶어진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cjstory.com%2Fdata%2F200605%2Fimages%2F051_t02.gif)
“괜, 찬, 타, …/괜, 찬, 타, …” 눈이 내린다고 했던 미당처럼, 함함한 배꽃잎 흩날리는 과수원의 어느 여린 나무 아래서 나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고 주문을 왼다. 그리고 다시 길을 가는 오후다.
선운사로 간다. 계곡을 따라 거슬러야 하는 선운사 입구는 고즈넉하다. 계곡물에 제 얼굴을 비춰보는 나무들이 조용조용 울렁댈 뿐. 나무 아래 군락을 이루고 있는 꽃무릇들이 이제 곧 꽃을 피워 올리면 물 위에도 고스란히 그만큼의 꽃이 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제 마음을 비춰보고 싶을 것이다. 안개비가 내린다. 우산을 쓰고 연등 아래를 거니는 여인들의 모습이 안개비처럼 잔잔하다. 그러나 우산 아래의 말없는 얼굴들은 꽃 다 지고 남은 꽃받침들처럼 가년스럽다. 그 얼굴빛이 사랑의 뒷자리처럼 헛헛하게 여겨졌던 건, 동백꽃 때문이었을 것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tfile.nate.com%2Fdownload.asp%3FFileID%3D46099759)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만 남아 있더라는 미당의 시처럼 선운사 동백은 느지막이 핀다. 그래서 남해의 동백이 다 지고 난 지금, 선운사 동백은 가장 어여쁘게 피어 있다. 대웅보전 뒤로 수령이 500년 넘은 동백나무들 3,000여 주가 꽃을 피웠다. 처마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저 붉음, 온몸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저 붉음 앞에서 나는 고통도 아름답다고 또 주문을 왼다. 나도 동백꽃처럼 온몸으로 지고 싶은 나날들이 있었으므로. 그리고 그런 날들이 저기 마중 나와 있으므로. 하나 둘 찾아왔던 사람들이 쌓고 간 돌탑 위에도 눈물처럼 동백꽃 떨어져 내린다. 그들의 바람처럼 내 바람도 꽃으로 얹고 돌아선다. 이미 땅으로 지고만 사랑도 사랑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