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94 편
진리의 영을 수여하다
. 중도자 위원회
. 서기 30년 5월 27일(토)
. 예루살렘, 마가의 집
194:0.1 약 1시경, 신자 120명이 기도에 전념하고 있는 동안, 모두가 이상한 것이 방에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모두 동시에 새롭고 깊은 느낌, 영적 기쁨ㆍ안전ㆍ자신감을 의식하게 되었다. 영적 힘을 이렇게 새롭게 의식하고 나서, 하늘나라 복음과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려는 강한 욕구가 뒤따랐다.
베드로가 일어나서, 주가 약속했던 진리의 영이 오신 것이 틀림없다고 선언하고, 그들이 성전으로 가서 좋은 소식을 선포하자고 제안했고, 그들은 그대로 하였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버지요 사람이 아들이라는 복음을 전하라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이들은 주가 부활했다는 뉴스를 전하려고 생각했다. 그들은 권능을 받고,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 예수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을 전파했지만 뜻하지 않는 잘못에 빠졌다. 베드로는 생각지 않고 이 실수에 앞장섰고, 바울도 그의 뒤를 따랐으며, 바울은 좋은 소식의 신판으로부터 새 종교를 만들어냈다.
하늘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로 사람들이 아들이요 형제라는 진리이다. 그날부터 기독교는,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 신자의 친교 체험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주를 죽이고 그의 가르침의 영향을 말소하려고 애썼던 세력을 이겼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한 것은 당연하다. 또한 예수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기억하고 주님이 여전히 살아 계시며, 약속하신대로 영이 실제로 그들에게 임했다는 확신에 감동하는 것이 더 쉬웠다.
194:0.6 이 신자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기쁨ㆍ권능ㆍ영광에 싸인 새로운 존재로 변했다고 느꼈다. 주는 그들에게 하늘나라가 권능을 가지고 오리라 일렀고, 더러는 그가 무슨 의미로 말씀했는지 깨닫는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왜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형제라는, 예수의 말씀 대신에 예수에 관한 새로운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1. 오순절 설교
194:1.1 사도들은 40일 동안 [예수가 승천하기까지] 숨어 있었다. 이날은 유대인의 오순절이었고, 세계의 온 구석으로부터 (아마도) 수십만의 방문자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다. 겁이 난 사도들이 몇 주 동안의 은둔 생활에서 솟아나서 이제 대담하게 성전에 나타났고, 거기서 메시아가 살아났다는 새로운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2시쯤에, 베드로는 주가 성전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자리에서 일어서서 열렬하게 연설하였고, 그 결과로 2천 명의 혼들이 승리했다. 사도들 가운데 여섯 명, 베드로ㆍ안드레ㆍ야고보ㆍ요한ㆍ빌립ㆍ마태가 이 모임에 참석했다. 그들은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이야기했고, 말씀을 그리스어ㆍ히브리어ㆍ아람어로 전했으며, 또한 말할 만큼 익숙한 다른 언어로도 몇 마디 하였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사도들이 대담해진 것에 놀랐지만, 사도들의 이야기를 믿는 무리 때문에 그들을 건드릴 수 없었다.
4시 반쯤에, 2천 명이 넘는 새로운 신자들이 사도들을 따라서 실로암 못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베드로ㆍ안드레ㆍ야고보ㆍ요한은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이 후에도 얼마 동안 [스테반이 죽기까지] 예수 믿는 자들은 유대교의 한 종파였다. 사도들을 포함해서 그들 모두가 유대인 예식 체계의 기본 요건에 여전히 충실했다.
2. 오순절의 중요성
194:2.1 예수는 사람이 악마의 자식이라는 미신으로부터 사람을 되찾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위엄을 갖기까지 올려놓은 복음을 가르쳤다. 세상을 떠난 뒤에 그는 진리의 영을 대신 보낸다. 진리의 영은 각 세대를 위하여 예수의 말씀을 다시 진술하도록 고안되어 있다.
이 영의 첫 사명은 사람 안에 진리가 자라나서 성격화하는 것인데, 인간의 최고의 자유 형태는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사명은 신자에게서 고아라는 느낌을 없애는 것이다.
아들의 영을 수여한 것은 나중에 조절자의 보편적 수여를 위하여 정상 인간의 지성을 준비시켰다. 진리의 영은 아버지와 창조 아들, 이 두 분의 영이다.
진리의 영을 뚜렷이 지적으로 의식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 이 영은 결코 영 자신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가엘을 의식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네가 진리의 영과 친교한다는 증명은 미가엘과 향상된 친교를 가지는 체험에서 발견된다.
이 영은 또한 땅에서 사신 주의 삶을 조명하고 재해석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왔다.
194:2.6 다음에 진리의 영은 예수의 육신의 삶에서처럼, 영(靈)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들 개개인이 새롭게 살도록,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의 실체를 다시 목격하도록 돕기 위해 왔다.
진리의 영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실체를 생생하게 알도록 이끄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한 사람의 일생을 살았다. 하나님으로부터 죄있는 사람을 구하려고 예수가 몸값을 치렀다는 복음으로 크게 왜곡되었지만, 예수에 대한 이 소식이 하늘나라 복음의 가르침을 많이 지닌 것은 사실이다. 머지않아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형제라는 이 감추어진 진리가 솟아나서 온 인류의 문명을 효과적으로 바꿀 것이다.
이러한 지적 잘못은 신자의 영적 진보를 방해하지 않았다. 진리의 영이 내린 뒤 한달이 안 되어, 주와 함께 보낸 4년보다, 사도들 하나하나가 영적으로 더 진보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유익한 복음의 진실을 예수가 부활한 사실로 이렇게 갈아치운 것도, 그들의 가르침이 빠르게 전파되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쉽게 만들었다.
“영의 세례”(baptism of the spirit)라는 용어가 이 무렵에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렇게 진리의 영이 수여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영적인 면이 개인적으로 확대된 것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4:2.11 진리의 영이 수여된 이후로 사람은 세 가지 영의 가르침과 안내에 지배된다: 아버지의 영인 생각 조절자, (영원한) 아들의 영인 진리의 영, (무한한) 영의 영인 성령이다.
초기의 진화 종족은 일곱 보조 지성 영에 지배된다. 사람이 위로 올라감에 따라서, 일곱 영이 사람 안에 거하게 된다. 진보하는세계들에 있는 이 일곱 영은 다음과 같다:
1. 아버지가 내리신 영―생각 조절자.
2. 영원한 아들의 영적 계심―온 우주의 영 인력.
3. 무한한 영의 영적 계심―지성 존재들의 지적 관계의 영적 근원.
4. 아버지와 창조 아들의 영, 진리의 영, 대체로 (지역)우주 아들의 영으로 간주된다.
5. 무한한 영과 우주 어머니 영―성령, 이것은 대체로 (지역)우주의 영으로 간주된다.
6. 지역 우주 영의 지성 영―일곱 보조 지성 영.
7. 아버지와 아들들과 영들의 영―생각 조절자와 융합하고 최후 군단에서 신성한 지위에 오른 필사자가 가지는 새로운 이름의 영.
진리의 영이 수여된 것은 상승하며 하나님을 찾는 것을 도우려고 계획된 그 마지막 영 자질을 세상과 민족들에게 가져온 것이다.
3. 오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94:3.1 진리의 영, 쏟아진 이 아버지와 아들의 영의 주요한 사명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자비로움에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진리의 영은 마음속에서 창조 아들을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일생에 “영의 열매”를 맺을 때, 사람은 다만 땅에서 산 자신의 일생에서 주가 나타낸 특성을 내보이는 것이다.
인생에서 많은 것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이것이 진리가 우세하고 의가 승리하는 우주라는 생각과 조화시키기가 어렵다. 흔히 불의가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에 믿음이 악ㆍ죄ㆍ불의를 이기는가? 이긴다. “하나님이 와서 구원할 것인가 보자” 하면서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비웃었다.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날은 어둡게 보였지만, 부활의 아침은 영광스럽게 밝았다. 예수의 종교는 허덕이는 인류에게 선포해야 할 새로운, 믿음의 복음이다. 이 새로운 종교는 믿음ㆍ희망ㆍ사랑에 바탕을 둔다.
예수는 모든 끔찍한 현실 가운데서 인생을 살고―죽을 때에도―인생을 통달하였다. 인생에서 해방되려고 종교를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의 종교는 사람이 육체를 입고 지금 사는 인생을 높이고 고귀하게 만들기 위하여 또 다른 영적 존재의 기쁨과 평화를 마련해 준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아편이라면, 그것은 예수의 종교가 아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감각을 마비시키는 약을 마시기를 물리쳤다. 모든 육체에 쏟아진 그의 영은 사람을 위로 이끌고 앞으로 재촉하는, 힘찬 영향이다. 진리를 배우는 신자는 땅에서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다.
오순절 날에 예수의 종교는 민족의 제한과 종족의 사슬을 모두 깨뜨렸다. 이것은 언제까지나 진리이다, 이날에 진리의 영은 하늘나라 복음을 더욱 효과 있게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내렸지만, 그들은 쏟아진 영을 받는 체험이,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면서 형성하는 새 복음의 일부라고 잘못 생각했다.
194:3.6 진리의 영이 모든 성실한 신자에게 수여되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라. 위층 방에 모인 남녀 120명을 포함하여 이 새 선생은 인류에게 수여되었고, 진리를 사랑하는 데 따라서, 그리고 영적 실체를 깨닫고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받았다. 마침내, 참 종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혼 속에서 그 진정한 표현을 발견한다.
예수의 종교는 가장 높은 부류의 영적 성격을 만들어내고 가장 높은 종류의 인간 문명을 육성한다.
진리의 영은 모든 진리로 안내하며, 영은 끝없이 진보하고 신성하게 펼쳐지는 종교, 확대되고 늘 성장하는 종교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이 새 선생은 진리를 찾는 신자에게 사람의 아들의 성격과 성품 안에 아주 거룩하게 접혀 있던 것을 언제까지나 펼쳐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여러 종족의 사람들이 사도들의 전도를 받아들인 것은 예수의 종교가 보편성이 있음을 가리킨다. 어떤 계시된 종교도 어떤 민족 문화에 젖게 되거나, 아니면 기존의 종족ㆍ사회 또는 경제 관습과 연결되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온 세상에 퍼질 수 없다.
진리의 영은 어떤 특별한 형태나 신성한 장소에 달려 있지 않다. 그 영이 위층 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닥쳤을 때, 그들은 말없이 기도하며, 앉아 있기만 했다. 그 영은 도시 뿐 아니라 시골에도 내렸다. 사도들이 그 영을 받기 위하여, 몇 년 동안 혼자서 명상하려고 외로운 곳으로 따로 갈 필요가 없었다.
194:3.11 예수는 그의 종교가 소극적이 아니라고 가르쳤고, 제자들은 봉사하고 사랑을 베푸는 데 언제나 적극성이 있어야 했다. 이 신자들은 이제 더 야웨를 “만군의 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이제 영원한 신을 “하나님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여겼다. 하나님이 또한 누구에게도 영적 아버지라는 진리를 충분히 깨닫는 데 어느 정도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거기까지 진보했다.
개인적으로 상처받아도 용서하고 지독한 불의 한가운데서도 부드러움을 유지하며, 사랑과 인내로 악에 도전하는 힘을 오순절은 인간에게 보여주었다. 유란시아는 대전쟁의 상처를 여러 번 겪었고, 투쟁한 모든 편이 패배했지만, 승자는 오직 하나 있었다. 유일한 승자는 나사렛 예수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그의 복음이었다.
오순절이 닥칠 때까지 종교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순절 이후에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고 있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찾고 있고, 찾아내고 나서 사람 안에 거하라고 자신의 영을 주었다.
오순절은 종족의 특징, 문화의 차이, 사회 계급, 또는 성(性) 편견에 근거를 둔, 모든 종교적 차별을 없애버렸다. 새 종교를 믿는 이 신자들이 “주의 영이 있는 곳에 해방이 있다”하고 늘 외쳤던 것이 당연하다.
예수의 어머니와 아우가 120명의 신자들 사이에 있었고, 이 보통 제자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또한 쏟아 부은 영을 받았다. 오순절은 특별한 사제 계급과 신성한 가족에 대한 온갖 관념의 종말을 고했다.
194:3.16 오순절 이전에 사도들은 예수를 위하여 많은 것을 버렸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에 답하여 진리의 영을 보냈다. 자아를 버리고 영을 얻는 이 체험은 감정적 체험이 아니었다. 총명하게 자아를 포기하고, 아낌없이 거룩하게 바치는 행동이었다.
오순절은 신자들 사이에 영적 단결의 부름이었다. “신자 무리 가운데 오로지 한 마음과 혼이 있었다”는 것이 글자 그대로 참말이었다. 예수의 종교는 세상이 일찍이 본 가운데, 가장 강력한 통일하는 영향력이다.
오순절은 개인ㆍ집단ㆍ나라ㆍ종족들의 자기 주장을 줄이려고 예정된 것이다. 긴장이 너무 고조되어 이따금 파괴하는 전쟁으로 터져나오는 것은 이 자기 주장의 정신이다. 인류는 오직 영적 접근으로 통일될 수 있고, 진리의 영은 세계에 보편적 영향력이다.
진리의 영이 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복지에 마음을 쏟도록 신자들을 인도한다. 이기심이라는 물질적 정신은 이 사심 없는 정신에 먹혀 사라졌다. 쏟아진 이 영을 받는 기쁨을 인간 생활에서 의식하며 맛보았을 때, 이는 건강에 좋은 강장제요, 지성에 자극이요, 혼에 한없는 에너지이다.
기도가 오순절 날에 영을 불러오지 않았지만, 기도는 영을 받는 능력을 결정하는 데 많이 관련되었다. 기도는 신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지만, 성실한 기도와 참된 예배를 통해서 신이 내려주시는 것이 흘러갈 수도 있다.
4. 기독교 교회의 시작
194:4.1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사도와 제자들은 완전히 사기가 꺾였다. 주가 체포되고 묶이고 채찍 맞고 십자가에 달렸다는 생각은 사도들에게도 너무 힘겨웠다. 그들은 그의 가르침과 경고를 잊어버렸다.
부활과 함께 절망에서 벗어나면서 주의 신성을 믿는 믿음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이 새 선생이 오고, 그들은 당장에 새 힘을 얻어 복음을 전파하러 나갔다. 살아 계신 주를 대담하고 용감하게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주는 이 전도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 계신다. 하나님은 이들의 뇌리 속에 있는 교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혼 속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날마다 그들은 굳세게 마음을 합하여 성전에서 계속 모였고 집에서 빵을 나누었. 먹을 것을 기쁨으로, 한 마음으로 받았고, 저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의 지지를 얻었다. 그들 모두가 영으로 충만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으며, 믿은 군중은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졌고, 저희 가운데 한 사람도 무엇을 가졌든지 제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함께 썼더.”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사람이 서로 형제라는 하늘나라 복음을 나가서 전도하라고 예수가 세웠던 이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새 복음을 가졌고, 새로운 체험으로 불이 붙었으며, 새로운 영적 에너지로 가득 찼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은 살아나신 주를 선포하는 것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 그는 막강한 행적과 이적으로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선지자의 입으로 하나님이 미리 알려준 것들을 이루셨다. 하나님이 이 예수를 살렸고, 하나님은 그를 주, 그리스도로 만들었다. 하나님의 오른 손으로 높임을 받고, 아버지로부터 영의 약속을 받았으므로, 그는 너희가 보고 듣는 영을 퍼부었다. 너희의 죄가 지워지고, 아버지가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그리스도를 보내도록 회개하라. ”
예수가 가르친 말씀은, 갑자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질되었다. 그들은 이제 예수가 살다가 죽고 부활한 사실을 선포했고, 그가 시작한 일을 마치려고 이 세상으로 빨리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전파했다. 그들은 그의 두 번째 오심이 아주 가까이 다가올 사건이라고 생각하였다.
194:4.6 그리스도는 바야흐로 급속히 형성되는 교회의 신조가 되려고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 예수의 아버지”라는 새 교리에 너무 열중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아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의 아버지.”라는 예전의 말씀에 신경 쓸 수 없었다. 형제 사랑과 전례 없는 선의가 놀랍게 표현된 것은 참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를 믿는 신자들의 친교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가족에 속하는 형제들의 친교가 아니었다.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것조차도 인류가 일찍이 알게 된 가장 위대한 종교였다.
새로운 친교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믿은 군중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친교, 빵을 같이 먹고 기도하기를 꾸준히 계속하였다.” 그들은 서로 형제와 자매라고 불렀다. 자기 세대 안에 아버지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마치려고 예수가 돌아올 것이라고 자신 있게 기대했다. 땅에 있는 소유물을 자진하여 이렇게 나누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을 진지하고 자신 있게 믿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렇게 실험한 마지막 결과는 비참했고 불행을 낳고 있었다. 수천의 성실한 신자들이 모든 재산을 팔아 버렸다. 시간이 지나자, 기독교인들의 “똑같이 나누는” 재산은 줄어들어 끝에 이르렀다. 얼마 안 되어, 안티옥의 신자들은 예루살렘의 동료 신자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돈을 걷고 있었다.
이 시절에 그들은 주의 만찬을 제정된 방식에 따라서 축하했다. 사이 좋게 친교하는 회식을 위하여 모였고 식사가 끝날 때 성찬을 들었다.
처음에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거의 20년이 지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기 시작했다. 세례가 신자의 친교에 가입하는 데 유일한 조건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아무런 조직이 없었고, 단지 예수를 믿는 형제 단체였다.
이 예수 종파는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고, 사두개인들은 예수 종파의 지도자들을 감옥에 넣기 시작했고, 가말리엘 조언이 이어졌다. “이 사람들을 멀리하고 버려두라. 이 일이 하나님에게서 생겨났다면, 뒤집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너희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 될까 두렵다.” 이 조언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평화롭고 조용한 시간이 뒤따랐고, 예수에 관한 새 복음은 그 사이 빨리 퍼졌다.
194:4.11 알렉산드리아에서 큰 무리의 그리스인들이 올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만사가 순조로웠다. 로단의 생도 두 명, 개종한 스테반과 바나바가 있었다. 이들은 유대인 형태의 예배와 기타 예식 절차를 잘 따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예수 단체와 바리새인 및 사두개인들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가 종결되었다. 스테반의 한 대중 설교에서, 그들은 비위가 상하자 재판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스테반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 중에서 그리스 거류민의 지도자였고, 이렇게 새 신앙의 첫 순교자로, 초기 기독교회를 정식으로 조직하는 구체적 원인이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의 지도 아래 조직되고, 예수의 아우 야고보가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유대인들의 새롭고 무자비한 박해가 터졌다. 예수에 관한 이 새 종교를 안티옥에서 나중에 기독교라고 불렀는데, 이 종교를 활발하게 가르치는 선생들은 예수를 선포하면서 제국의 끝까지 갔다. 옛날 알렉산더가 행진한 길을 따라, 가자와 티레를 거쳐, 안티옥, 다음에 소 아시아를 지나서 마케도니아까지, 계속 로마까지, 그리고 제국의 가장 먼 구석까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