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일 연중13주간 금요일 (마태9,9-13)
“마치 당연한 듯 사회로부터 차별받고 있는 이들의 희생을 생각하며”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빗대어 오늘은
‘강자와 약자’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합니다.
우선 미국의 흑인 작가가 쓴 소설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미국에서 1965년까지 실행되었던,
인종 분리를 강제한 ‘짐크로우 법’ 때문에
생전 투표 한 번 해보지 못한 주인공에게
흑인 할아버지가 이런 유언을 남깁니다.
“우리가 비록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을 당하지만,
그래도 정치에서 떠나면 절대 안 된다!”
할아버지의 이런 유언에 그는 심한 반발심을 느낍니다.
“그 어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무력한 사람들,
자신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평생 수모 속에 살았던
우리 같은 이들에게 정치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피부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하나부터 열까지 누군가의 삶이
끊임없이 방해받는 너무나 억울한 경험이
바로 인종차별입니다.
무릇 어떤 정치체제든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선익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원칙일 뿐,
실제 우리 사회에서는
거기서 비켜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소설 제목으로 쓰인 ‘보이지 않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어떤 일부 사람들이 받는 혜택과 이익을 위해
한편의 어떤 사람들은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그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그들을 ‘낯선 사람들’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방식이 바로 ‘차별과 배제’입니다.
내가 ‘누구’가 아니라서,
혹은 내가 ‘누구’라서 받는 증오와 혐오는
우리 사회에 분노와 극심한 갈등을 일으킵니다.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안전과 안락은 이런 ‘낯선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다는 것인데,
보통의 우리는 그런 희생을
충분히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이 시대에는
‘낯선 이에게는 말도 걸지 말고 무시하라’는 것이 원칙이 된 것입니다.
‘세계인권 선언문’ 1조, 2조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게,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형제자매다.>
인권선언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호혜의 공동체가 차별과 적대의 공동체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이 선익을 위해서라도 시민들은
낯선 이들, 이방인들, 보이지 않는 이들, 약자들과 마주하며
공동의 삶을 회복하는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물론 어떤 변화든 제도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또 그것 없이는 시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