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성에 버티고 있던 당군은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었으나, 유인궤의 제안 이후 당나라 본토에서 손인사의 7천여 구원병이 도착하자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 7천의 병사는 산동 해안지역에서 선발되었다. 여기에 문무왕의
김흠순·
김인문 등 장군 28명과 대병을 동원하여 합세, 웅진성으로 향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웅진성에서 합동회의를 열어 최종 작전을 마무리 지었다. 육군은 문무왕이 이끄는 신라군과 손인사·유인원의 당군이 주류성으로 진격하고, 유인궤와 두상(杜爽), 그리고 부여융이 지휘하는 해군과 식량 보급선단은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 육군과 합류하여 주류성으로 진군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백강(白江)이 어느 강인가, 의 문제는 금강 하류설, 그리고 동진강(東津江) 설이 대립하고 있고, 이는 주류성의 위치 비정 문제와도 연결된다.
일단 나당연합군의 이 당시 주력은 분명히 육군이었다. 당장 참가하는 인원들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문무왕과 손인사, 유인원이 이끌었고, 이에 반해 해군은 유인궤와 두상, 부여융 등이 이끌었다. 물론 유인궤는 나중에 가면 열전이 남을 정도로 유명해지지만, 이 당시는 유인원이 웅진도독부의 책임자였고 유인궤나 두상은 참모, 별장 급 인물들이었다. 병력도 문무왕이 28명의 장수들을 동원한 만큼 숫자는 수만이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부대 중 웅진성에 주둔하던 유인원의 1만 명은 이미 오랜 전투로 피폐해졌을 것이고, 새로 투입된 병력도 손인사의 7천 정도라는 점을 보면 이 당시 육군의 핵심은 절대적으로 신라군이었다.
나당연합군은 진격로에 대해 논의했고, 여기서 결정된 것은 부흥군의 세력 아래 있는 성으로서 지금의 서천군 임천면의
성흥산성(聖興山城)으로 비정되는
가림성(加林城)은 사비성에 근접해 있지만 성이 가파르고 험준한 만큼 공략하려면 병력 손실이 많고 기일이 걸릴 것이므로 건너 뛰어버리고, 주류성을 직공하자는 계책이었다.
이 움직임은 부흥군 진영에도 알려졌다. 동시에
이호하라노기미오미(廬原君臣)가 이끄는 왜군 지원병 1만여명이 온다는 소식이 있자, 8월 13일 부여풍은 이를 맞이하러 백강구로 나섰다. 이 부대가 앞서 말한 신라를 친다는 2만 7천여 병력의 일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당시 파견된 부대는 사비기노강(沙鼻岐奴江) 등 두개의 성을 빼앗았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상대적으로 신라 군이 백제에 집중되어 정작 본토가 약할테니 이를 공격하여 백제 지역에서 신라군의 공세를 풀어보려 했다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그 부대 일부가 부여풍이 긴급하게 구원을 요청하자 진로를 급하게 바꿔 백강구로 달려갔는지, 혹은 또 다른 파견군이 도착했는지 기록 부재로 알기가 어렵다.
8월 17일 무렵, 나당 연합군은 주류성을 포위했고, 170여척의 당나라 수군은 백강구에 이르러 육군에 공급할 군량을 하역한 후, 진을 치고 바다로부터 주류성을 구원하러 진입하려는 왜병을 대비하였다. 27일 왜 수군이 백강구에 도달하여 주류성에 온 일부 왜군 및 부흥군과 합세하였고, 백제의 기병이 강어귀 언덕에 포진하여 왜선을 엄호하였다.곧이어 왜 선단이 당 수군에게 선공하였으나 불리해서 물러났다.
당나라 수군은 그런 왜 선단을 추격하지 않았다. 이 당시 양측의 전력을 보면, 당나라 병선은 170여척. 왜선은 400여척이었다. 접전은 다음날부터 벌어졌다.
먼저 신라의
기병이 백제의 기병을 공격했고, 왜의 해군이 당나라 해군에 돌격하였다.
일본 장수들과 백제왕은 기상을 살피지 않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이 앞다투어 싸우면 저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롭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당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많고 배가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다쿠쓰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때 백제왕 풍장이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달아났다.─일본서기, 천지 2년 8월 |
간단하게 결과만 말하자면
왜군의 대패.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의 패배였다.
원인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견해들이 있다. 우선, 당나라 군대가 백강구에 도착한건 8월 17일로 충분히 여유가 있었고 주변 환경이나 전술 준비에 유리한데 비하여, 왜 수군은 뒤늦게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앞의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기상도 살피지 않고 바로 전투에 들어간 전술적 실책이다. 구당서의 기록으로 이 전투에 대한 묘사를 보면
연기와 화염 혹은
바닷물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 같은 언급들이 보이는데 왜군의 선단들이
화공에 당해버렸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화공에서 제일 중요한건 기상을 살피는 일이다.
또 관련 기록을 보면 당나라 군대는 진을 형성하여 일정한 전술에 따라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여준것이 나타난다. 이에 비해 왜군은 그런 모습이 부족했는데, 왕조 국가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데는 세계에서 최고로 이골이 난 중국이나, 여하간에 국가가 징발 편성하여 훈련시킨 신라군에 비해 왜군은 여러 지방 세력가들의 군대를 연합한 상태라 일원론적 지휘체계에 따른 군령들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롭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라는 기록에서 보이듯, 왜군은 개별적인 전투에선 개인적으로 용맹하게 돌진하는 식으로 싸우려 했으나 이에 비해 중국은 집단 전술에 관해서는 일본이
신석기 시대였던
조몬시대(繩文時代) 무렵에는 이미 역량이 쌓일대로 쌓인 나라다. 왜군의 개별적인 용약 돌진은 당군의 두꺼운 진형을 뚫지 못하였고, 당의 전선이 정연하게 대오를 갖추어 좌우로 전개하여 왜선을 포위하자, 왜선들이 우왕좌왕 하며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채 화공을 당하여 대패하였다.
아예 이런 점을 토대로 백강 전투뿐만이 아니라 백제 부흥 운동에 파견된 왜군 전체의 성격을 보려는 경우도 있다. 662년 5월의 1차 파견군이나 663년 2월의 2차 파견군은 전·중·후 장군이 이끈것으로(1차에선 중군은 생략) 되어 있고, 백강구 전투에서도 중군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런데 이게
상호간의 상하 통속관계를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징병 지역에 따른 편제나 혹은 출병 시간에 따라 구분된 것으로 여기면서, 각 장수는 죄다 상호 병렬적 관계이며 3군 또는 2군 전체를 통솔하는
수직적 지휘계통 결여 상태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면에서 볼 경우, 백강구 전투의 승패는 단순히 싸우고 잘 싸우고를 못 떠나서 양측 국가 체제의 상이함에서 비롯하는 군대의 편성원리와 성격 차이,
율령(律令) 제도에 기저를 둔 국가와 군대 운영 여부에 따른 차이에서 근본 원인을 찾는것이 되어버린다.
이에 대해서 출전한 장수와 사병의 출신지역이 매우 광범위함을 지적하기도 한다. 즉 당시 참전한 사병과 장수의 출신지가 일치하지 않음으로, 이를 중시하여 병사가 장수에 사적으로 속한 병력이 아니라 국가가 각지에서 징발한 병력이고, 장수는 조정 관원 중에서 파견하였음을 말한다고 해석하여, 이들 군대가 각지 호족의 무장력을 임시적으로 규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중·후 표현 역시 보편적인 군대 편제이고, 출정군에 '대장군'의 존재를 전하는 기록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입각할 경우, 당시 왜군 부대의 성격을 지방 유력자 휘하 부대들의 임시적 연합이라고 보는 그간의 설은 백강구 전투에 관한 구체적 기사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그 무렵까지 왜국의 군대 동원 형태와 성격 이해를 토대로 설명한 것으로서,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논리적 비약이라는 것이다.
일단 당시 왜국이 율령제를 정착 시키기 전이기는 하다. 그것만으로 전투 패배에 대한 설명이 다 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그렇지 못하게 된 부분 정도는 있을 것이다.
또한 복신의 처형에 따른 부흥군 내부의 분열과 갈등 문제다. 왜군과 부흥군 사이의 갈등과 불협화도 상정 할 수 있다. 어느정도 전투력 저하의 요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함선의 차이에 대한 고려다. 당나라의 여러 주력함들은 견고한 대형 군선이고, 몽충은 높고 커서 접근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싸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배끼리 부?혀 상대방 배를 부수는 방법에서도 우위를 가지고 있고, 해골선은 적선을 쳐서 격파하는 부분을 장치하여 접근전에서 유리하게 고안된 군선이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군의 함선들은 소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강구 전투에 대해 생각해볼것은 이 전투의 비중을 어느 정도로 볼 것이냐는 문제이다. 이 전투를
동아시아 국제 정세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회전이라고 까지 보는 경우도 있지만, 이 전투의 주력이 당군과 왜군이었음을 매우 강하게 의식하여, 마침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처럼 고대 중국세력과 일본 세력이 한반도에서 양자간에 자웅을 겨룬 전투인것처럼 인식하려는 의도가 어느정도 있다.
물론 이 전투를 고비로 왜 세력이 고대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니, 이는 한일관계사에서는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전투 후에 일본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인 율령제를 형성하였던 만큼, 일본사 전개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나라에게는 이 전투는 별로 비중이랄게 없는 전투였다. 이는 신라에게도 주된 전장은 아니었고, 전투 규모도 양측 모두 실제 동원한 병력이 만 수천여명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백강구 전투에 관한 과도한 강조는 신라군의 존재를 홀시하게 하고, 신라는 피동적 존재로 파악하는 부작용이 있다.
백강구 전투가 벌어지기 전인 8월 13일, 신라군이 주축인 육군은 주류성 지역에 도착했고, 8월 17일부터 성을 에워싸고 공략전을 펼쳤다. 일본군이 백강구에 도착한것은 이때부터 10일 후였다. 또 부여풍은 신라군이 도착한 13일 휘하의 일부 왜군과 성에서 빠져나가 왜군을 맞이하러 떠났다. 성이 포위되기 전에 나가서 왜의 지원군과 연결, 성 안팎에서 협공하려 하거나, 최소한의 퇴로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 백강구 전투에서 부여풍은 대패했고, 주류성은 며칠 더 버텨보았지만 부여풍이 고구려로 달아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침내 9월 7일 농성하던 백제 부흥군과 왜군이 항복하였다. 주류성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인근 백제의 여러 성도 잇따라 투항해버렸고, 좌평(佐平) 여자신(余自信), 달솔(達率) 곡나진수(谷那晉水) 및 억례복류(憶禮福留)와 목소귀자(木素貴子) 등이 많은 백제인과 함께 퇴각하는 왜군을 따라 일본 열도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이례적인 기록이 있는데, 이 백강구 전투 당시
탐라(耽羅) 국사가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 이 말은 탐라인이 어떤 형식으로든 전투에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탐라가
동성왕(東城王) 시기에 백제에 귀복하였고, 백제 멸망 후인 661년 5월에는 왜국에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을 보냈다고 한다. 그 해 8워에는 당나라에 조공사를 보냈고, 문무왕 2년에는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백제 멸망 이후 급변하는 주변 정세를 탐라국 나름으로 탐색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백강구 전투 현장에 탐라인이 있었음은 탐라인이 백제와 왜 측에 가담하였던것으로 보이는데, 탐라국사가 잡혔다는 이야기로 보아 군사적인 참여는 아닌것으로 보이고, 백제 부흥군에 보낸 사절로 보인다.
부흥 운동의 핵심이었던 복신이 비참하게 죽었고, 왜군의 지원군마저 모조리 박살나고 주류성이 함락된 시점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은 사실상 실패가 결정되었다고 불 수 있다. 하지만 임존성에서는
지수신(遲受信)이 끝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당군이 한때 백제 부흥군의 장수였던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를 전면에 내세워 압박하자, 마침내 연말에 임존성이 함락되었고 지수신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로 만 3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백제 부흥 운동은, 완전히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