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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대와 법주사, 그 고급진 화려함을 품은 속리산.
1. 일자: 2017. 6. 10 (토)
2. 장소: 속리산(1058m)
3. 행로 및 시간
[화북탐방지원센터(09:52) -> 오송폭포(10:03) -> 바위전망대(11:09) -> 문장대(11:37) -> (문수봉) -> 신선대(12:10~26) -> 입석대(12:42, 천왕봉 1.5km) -> 비로봉(13:01, 1031m) -> 석문(13:08) -> 법주사 갈림(13:17, 천왕봉 0.6km)-> 천왕봉(13:33) -> 법주사 갈림(13:47, 법주사 5.1km) -> 배석대(14:06, 898m) -> 석문(14:18) -> 세심정(14:44) -> (호수길) -> 법주사(15:24~35) -> 매표소(15:55) -> 속리산터미날(16:05), 15km]
< 속리산 산행을 준비하며 >
자주 산을 가다 보니 주위에서 이런 질문을 가끔 받는다. “다녀 산 중에 어디가 가장 힘듭니까?”아마도 설악산이나 지리산이라는 답을 기대하며 던진 질문일 텐데, 내 대답은 대게 “충청북도 산이 가장 힘들죠. 특히 속리산 부근 산들은 만만치 않습니다.” 멋모르고 낯선 산악회 따라 갔다가 문장대~관음봉~상학봉 코스에서 호되게 당하고, 이후 백두대간 종주 시 경험한 분지리~희양산, 버리미기재~대야산, 늘재~속리산 새벽 비탐구간 산행의 힘겨운 경험 때문일 게다. 이를 게기로 산의 험준함의 기준은 높이만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속리산 근처에는 가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담을 쌓고 살수 없고, 법주사를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던 차에 만차이던 아름다운산행에 자리가 하나 나 바로 신청을 했다.
오래된 지도를 살핀다. 백두대간 남녘 구간은 설악산을 넘은 큰 산줄기가 소백산을 기점으로 한반도의 중심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문경새재 언저리에서 사행하며 구불거리며 뻗어 내리다가, 크게 용트림한 곳이 바로 속리산이다. 속리산에 와서야 정맥 길이 복잡해진다. 놓임새가 돌 형세가 높고 크며, 겹쳐진 봉우리의 뾰족한 돌 끝이 모여 마치 횃불을 벌려 세운 것 같다 한다. 한마디로 돌 산이라는 말이다. 험하니 풍광 좋은 건 당연지사, 힘겨움의 보상은 늘 컸던 산으로 기억된다.
이번엔 아산 카페에 올라온 지도를 본다. 화북분소에서 문장대 지나 신선대까지는 함께 하고, 이곳에서 법주사로 바로 내려가는 단축코스와 천왕봉을 거쳐 오는 종주 코스가 나뉜다. 천왕봉은 여러 번 가 보았으니 새 길을 가야겠다. 경업대를 지나 세심정을 거쳐 법주사로 내려와야겠다.
코스를 삼등분 해 본다. 화복~신선대 4.7km 식사 포함 3시간, 신선대~세심정 2.2km 1시간, 세심정~탐방센터 3km 1시간, 단축 코스로 가도 빠듯한 3시간 거리다. 신선대~법주사 등로와는 첫 인연이다. 설렌다.
< 희망사항 >
이번 산행을 주저 없이 신청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피안의 세계로 드는 숲길’이라는 별칭이 붙은 법주사 오리숲길을 걷고픈 마음 때문이다. 매표소에서부터 법주사 입구까지 5리에 이른다고 해서 ‘오리 숲’이라 명명되었으며, 백 년 이상 된 노송과 참나무들이 터널을 이루는 명품 숲을 거닐고 싶다.
봄 내내 황사와 미세먼지에 시달린 보상으로 5월 중순부터 근 한 달간 맑고 쾌청한 날씨가 계속된다. 그야말로 산행하기엔 최적의 날이 연이어졌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늘도 짙은 법, 맑은 날이 계속되니 봄 가뭄이 극심하다. 메마른 근교 산에 불이 이어진다. 이제 비가 좀 와 주셨으면 좋겠다. 산이야 또 기회를 만들면 되지만 타 들어가는 농심을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않는가? 간절히 비를 기다린다.
다행스럽게도 산행을 앞둔 수요일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해갈에는 터무니 없지만 한시름 놓았다. 세상사 이치가 순리대로 흘러갔으면 한다. 법주사 뒤 계곡에 발을 담글 수 있는 호사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토요일 아침을 맞는다. ^^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계확과 달랐다.)
< 상주 화북 가는 길에 >
일출 어름인 5시가 넘었는데 밖이 어두컴컴하다. 일어나야지, 그나저나 해가 뜰 시간인데 어둡다. 왜지? 창에 빗물이 어린다. 고마운 비가 내린다. 우산 하나 더 챙겨 길 나서는 게 무슨 큰 일이라고? 기쁜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들뜬 마음에 너무 일찍 출발했나 보다. 버스가 도착하지 않았다. 커피 한 잔 사서 들고 기다리다 버스에 오른다. 몇몇 얼굴이 익은 분들도 있지만 여전히 낯설다. 1명 빈 만차다. 빗 속을 뚫고 버스는 이내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늘 그렇듯 부족한 잠을 청한다.
속리산 IC가 아닌 화서라는 곳에서 국도로 진입한다. 경상도 상주 땅이다. 속리산=보은=충청도 라는 상식이 도전을 받는다. 법주사의 유명세 때문이리라. 이동 하는 사이 비는 그쳤다. 흐린 날씨다. 바람이 간간이 분다. 덥지 않아 좋겠다. 트랭글을 ON 한다. 지금 시간은 09:52. 자! 출발이다.
< 화북탐방센터에서 문장대 >
귀경 버스 출발시간이 5시란다. 예상보다 시간을 많이 준다. 대부분 종주할 눈치다. 생각이 달라진다. 신선대에서 하산하면 시간이 많이 남을 것 같다. 나도 종주? 늘 그렇듯 결정은 현장에서 한다.
주차장 뒤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산행은 시작되었다.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가서 산길과 접속한다. 오송폭포는 들머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시간 여유가 마음의 여유를 불러온다. 폭포 수의 시원한 기운을 느끼며 계곡 안으로 들어간다. 이내 거대한 물줄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폭포와 마주한다. 기대 이상으로 큰 폭포다. 5층 계단을 내리꽂는 폭포수가 만들어내는 서늘한 느낌이 좋았다.
< 오송폭포와 문장대 >
편안한 등로를 따라 문장대로 향한다. 남은 거리는 3km 남짓, 길어야 90분일 게다. 길가를 관찰하며 뒤로 처진다. 계곡에 물이 말랐다. 어디에서건 건천(乾川) 을 보는 건 마음 아프다. 이상하게 초반부터 힘이 든다. 무릎도 시큰거린다. 예사롭지 않다. 길게 못 갈 것 같은 예감이 온다. 배도 고파온다. 이럴 땐 쉬어 가야 한다. 걷는 행위에도 관성이 있다. 괜히 미련 떨다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맞는다. 일단 걸음을 멈춘다. 작은 공터 돌에 주저 앉아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먹었다. 아침에 먹은 김밥만으로는 먼 길 가기 힘들 것 같다. 산에서 배가 고프면 순식간에 낭패의 순간이 옮을 알기에 주위 눈치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시 길을 나선다. 무릎 통증은 무뎌진다. 먹은 음식이 서서히 영양소를 변하나 보다. 몸이 훨씬 가뿐해진다. 걸음에 속도가 붙는다. 잘한 선택이었다. 젊은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가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산을 오른다. 아이가 묻고 어른이 답하고, 참 보기 좋은 모습이다. 부러웠다.
문장대 1.8km, 10:38. 속도를 좀 내야겠다. 가파른 비탈이 계속된다. 길 중간에 쉬는 이들이 많아진다. 쉼터 역할을 하는 바위에 올라선다. 속리산 주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말라버린 계곡만 보다 열린 하늘과 기묘한 바위를 보자 기분이 시원해진다. 이내 집채바위가 있는 나무다리를 건넌다. 익숙한 지형이다. 길이 조금 순해진다. 고도는 800m가 넘었다. 이제 크게 힘들이지 않고 문장대에 오르리라. 마음의 여유가 주위를 둘러보게 한다. 금줄이 처져 있는 바위에 올라선다. 낭떠러지를 조심스레 오르자, 시원한 풍경이 펼쳐진다. 거대한 암괴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문장대일 게다. 주위의 암릉들도 선명하다. 흐린 날에 이 정도 풍경이면 일급 전망이다. 층층이 갈라졌음에도 포개어 한 덩어리 암괴를 이루는 바위의 모습에서 ‘함께해 좋은’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네 삶은 관계의 연속이다. 좋으나 싫으나 내 삶은 내가 속해 있는 사회와 집단의 영향을 받는다. 별거 아닌 모난 돌들이 쌓여 멋진 바위를 이루는 자연이 대견하고 부럽다.
11:30분 문장대 밑 공터에 도착했다. 출입금지 팻말이 익숙하다. 문장대~밤치~눌재 그 악명 높은 속리산 대간 비탐구간이 그 안에 숨어 있다. 비 오던 여름 새벽 그 먼 길을 올라온 기억이 스멀스멀 살아난다. 멋모르던 시절 그 무모함이 오늘도 나를 산으로 이끄는지 모르겠다.
< 문장대에서 >
아산 일행과 만난다. 이른 식사로 시간을 써 버린 탓에 많이 처진 줄 알았는데 막판 스퍼트가 주효했다. 문장대에 오니 전국 사투리가 다 들린다. 인파로 북쩍인다. 줄을 서 계단을 오른다. 봉우리에 올라선다. 뿌연 연무 속에서도 사방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관음봉 지나 묘봉, 상학봉으로 연결되는 충북알프스 능선이 험악하게 흘러가고, 천왕봉으로 다가서는 주능선은 부드럽게 이어진다. 사진 작가들에게 인증사진 한 컷을 부탁하고는 난간에 서서 주위를 다시 둘러본다. 문장대, 명품이다. 고급진 곳이다. 높이로는 2등이지만 실질적인 속리산의 주인이다. 형 대신 집안 살림 도맡아 하는 둘째 같다. 발 밑에 움푹 패인 웅덩이를 본다. 모진 풍파를 겪었나 보다. 외형의 화려함 속에 궂은 심지와 따뜻한 속내가 느껴진다.
굽어보는 전망바위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든다. 이제 내려가야겠다. 인파로 어수선한 계단을 내려선다. 뒤를 돌아 보며 찍은 문장대 전망 사진에 해안선 대장님과 일행의 모습이 잡혔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구성이 꽤 괜찮다. 포커스가 우측 상단에 맞춰진다. 오늘 베스트 사진이다.
< 돌아본 문장대 / 신선대에서 >
< 문장대에서 천왕봉 >
11:43, 천왕봉 3.5km, 마음을 굳힌다. 아무래도 종주를 해야겠다. 시간도 남지만 종주 욕심이 동한다. 올라오며 간식을 먹었으니 식사는 신선대에서 하자. 일단 신선대까지 속도를 내 가보고 몸에 무리가 없으면 내쳐 천왕봉까지 가기로 한다. 불확실성이 해소되자 마음이 가벼워지고 걸음에 힘이 붙는다. 웅성거리는 문장대 사거리를 빠른 속도로 통과한다. 숲으로 몇 발자국 들어서자 이내 고요가 깃든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문수봉에 올라선다. 뒤돌아 보는 눈에 문장대에 올라선 산꾼들 모습이 선명하다. 그들을 뒤로 하고 다시 속도를 낸다. 청법대 지나 작은 비탈을 올라서자 눈에 익은 건물이 나타난다. 신선대 매점이다. 문장대에서 25분 걸렀다. 주인이 갓 부쳐내는 감자전이 식욕을 자극한다. 막걸리도 한 잔 당겼지만 사발면 하나로 만족한다. 시큼한 묵은 김치가 식용을 돋운다. 잘 먹었다. 국립공원 내 위치한 거의 모든 민간 식당들이 철거 중인 와중에 이렇게 꿋꿋이 영업을 하는 비결이 궁금하다. 모나지 않은 주인장의 말투에서 답을 찾는다. 머지 않아 닥칠 신선대 매점의 운명을 가늠해본다. 지나친 장사 욕심으로 인심 사납지만 않다면, 어찌 되건 산꾼을 위한 휴식공간은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당초 하산로를 점 찍어 둔 법주사 갈림은 신선대에서 지척이었다. 시계를 본다. 12:29, 천왕봉 2km. 간다, 천왕봉으로. 시간 많겠다, 배 속 든든하겠다. 평탄한 조릿대 숲이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더해준다. 흐리던 날씨도 점점 맑아온다. 작은 봉우리들이 연속해서 나타나지만 워낙 주변 풍광이 좋아 힘들이지 않고 통과한다. 암릉 사이로 난 길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입석대로 향하는 길, 능선에 빗겨 선 암릉의 향연이 화려하다. 지질운동과 세월의 풍파로 갈라지고 포개져 한 덩어리가 된 암괴들이 지천이다. 다른 곳에 있었으면 모두 한 가닥 했을 잘 생긴 바위들이다. 금줄을 뚫고 전망바위에 올라선다. 천왕봉으로 향하는 등로가 선명하다. 바위들은 각자의 기묘한 형상으로 산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속리산이 달래 명산이 된 게 아니다. 그 핵심에는 횃불 같이 솟은 바위가 있다.
누군가 표지판에 입석대임을 알리는 작은 표식을 해 두었다. 바위를 기어오른다. 나뭇잎 사이로 거대한 입석의 모습이 보인다. 더 잘 보려고 바위를 돌아드니 길이 막혔다. 입석대는 감질나게 나마 그 존재를 확인했다. 해발이 900m 후반에서 1000m 사이를 벗어나지 않고 오간다. 크게 치고 오르거나 내리 꽂히는 구간이 없는 게 속리산 주 능선의 특징이다.
< 속리산 주 능선 길에서 본 바위들 >
긴 계단을 치고 올라 비로봉에 올라선다. 역시 봉우리 위는 출입을 막는다. 잠시 쉬어간다. 후미와는 거리가 제법 떨어졌을 게다. 모처럼 홀로 오붓한 산행을 한다. 등산의 매력 중 하나는 ‘따로 또 같이’모두가 즐겁게 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은 홀로 나를 돌아보는 산행이다. 머리에 온갖 생각들이 들었다 나왔다 한다. 순간의 생각들이 길에 부숴져 간다. 범인(凡人) 에게 속세는 떠나려 한다고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보듬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공간이리라.
멋진 바위가 호위하는 작은 개활지를 지나 석문에 들어선다. 좋은사람들에서도 오늘 속리산에 왔나 보다. 산악회 패찰을 단 어르신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 받는다. 서로 사진을 찍어 주고 헤어졌다. 석문을 배경으로 한 모습이 제법 잘 나왔다. 사진은 역시 빛의 조화다.
< 석문에서 / 함박꽃 >
두 번째 법주사 갈림에 선다. 법주사 5.1km, 천왕봉 0.6km. 몸은 지쳐가지만 마지막 힘을 낸다. 다행히 천왕봉 가는 길은 그리 거칠지 않다. 도중에 장각리로 내려서는 갈림을 만난다. 예전에 인지하지 못했던 길이다. 여유가 주위를 살필 지혜를 준다.
13:33, 속리산의 정수리, 천왕봉에 섰다. 문장대에 비하면 초라하고 한산하다. 작은 정상석 역시 궁색하다. 잘 사는 동생에게 밀려 대접 못 받는 형의 모습이 그려져 마음이 짠하다. 어쩔 수 있나, 놓은새가 작고 궁색한 것을. 그래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대간과 정맥을 갈라 세우는 역할을 하는 속리의 큰 형이 바로 이곳에 있다.
주위를 살핀다. 형제봉 방향으로 가면 백두대간, 서원리 방향으로 내려서면 한북금남정맥으로 이어진다. 가보지 않은 금남정맥 길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멀리 지나온 길을 돌아본 후 이제 법주사로 내려선다.
< 천왕봉에서 법주사 >
하산 길, 지난 주 울산바위 서봉을 내려서며 본 하얀 꽃이 이곳에도 만발해 있다. 산목련, 정식 이름은 함박꽃인 요염하게 생긴 봉우리에 벌들이 날아든다. 푸른 숲에서 보는 흰 꽃이 탐스럽다. 다시 갈림에 선다. 이제부턴 처녀 길이다. 나무계단을 내려선다. 이 길이 나를 법주사로 데려다 줄 것이다.
가파른 비탈 중간중간에 평탄한 조릿대 길이 이어진다. 무념무상으로 걷는다. 여러 생각들이 흩어진다.
길가 바위에서 웅성거림이 들린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 들린다. 두꺼비를 닮은 바위 하나가 떡하니 서 있다. 꼭대기에 벼슬인 냥 소나무 한 그루가 솟아 있다. 눈 길이 오래 머문다. 소나무는 참 묘한 생명체다. 커다란 덩치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금강송이 있는가 하면, 이처럼 바위 난간 그 척박한 공간에서 바람이 전하는 작은 수분만으로도 자족하며 살아가는 존재도 있으니 말이다. 바위를 돌아 내려온다. 길가에 작은 입간판이 있다. 지나온 곳이 배석대였다.
거친 돌 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점점 홀로 걷는데 익숙해져 간다. 거대한 바위 앞에 걸음을 멈춘다. 특이하다. 지도를 살핀다. 석문 표식이 있다.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바위 밑 구멍을 통과한다. 내가 경험한 가장 큰 석문이다. 그 크기에 다시금 놀란다.
공사 중인 절터를 지난다. 고도는 점점 낮아지고 이에 비례하여 길은 순해진다. 계곡 물소리가 들린다. 작은 소가 지천인 관음사 삼거리에 도착했다. 행락객들이 많아진다. 세심정이 멀지 않았나 보다. 탁족의 유혹을 이겨내고 내처 걷는다. 주차된 차량이 보이고 총천연색 파라솔도 목격된다. 이곳이 세심정이다. 마음을 씻어내는 곳이니 고요하리란 기대는 날아가 버린다. 법주사로 향하는 도로가 이어진다. 속세를 떠났다 다시 속세로 돌아온 기분이다.
새로운 환경과 평지에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편한 길에 만족해 한다. 초록이 짙은 도로를 산책하듯 내려간다. 시간은 아직 3시도 되지 않았다. 속리산의 명품 숲을 즐기며 걸어간다. 커다란 호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호수를 따라 데크가 이어진다. 힐링이란 말이 머리를 스친다. 머리가 맑아온다. 곁을 걷는 낯선 이들의 표정에도 여유가 느껴진다. 숲과 물이 만들어 내는 대기가 상쾌하다.
< 세심정에서 법주사 가는 길 풍경과 호수 >
거리와 시간을 잊어버리고 걷는 행위 자체에 몰입한다. 인파 속에서 걷지만 참 좋다. 길에 고요함이 깃든다. 우측으로 법주사 절 집 건물들이 보인다. 망설임 없이 경내로 들어선다. 햇살이 솟아진다. 팔상전으로 들어서는 사천왕문 앞에서 바라보는 법주사의 모습이 근사하다. 국보의 위엄이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선 흔치 않은 고층 전각이다. 높다란 전각의 균형미가 기가 막히게 좋다. 그 우측으론 금으로 치장을 한 부처상이 보인다. 방송에서 보아오던 익숙한 풍경이라 신선하지 않고, 무엇보다 그 화려한 금빛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금으로 된 옷을 입는다고 부처님이 좋아 하실까? 하는 의문이 든다. 차라리 흙과 돌로 쌓아 올린 돌담의 조형미가 훨씬 멋지다. 모름지기 아름다움이란 자연과의 조화에서 오는 게 아니겠는가?
< 법주사에서 1 >
국내에 평지에 이리 넓게 펼쳐진 절이 또 있을까 할 정도로 법주사는 크고 넓었다. 그 광활함에 색다른 멋을 낳는다.
경내를 돌아 나와 다시 숲 길에 들어선다. 오리 숲이 시작된다. 머리 속에 넣어 두었던 수종(樹種) 구분은 복잡하고 화려한 현실 앞에선 쓸모가 없어진다. 그저 멋진 숲이란 말 하나면 족하다. 오리 숲은 기대보단 짧았지만 명품이었다. 매표소 앞 숲이 우거진 잔디 광장 안으로 6월의 햇살이 들어온다. 고목에 버섯이 돋아나고, 솔숲 한 켠에 돗자리를 펴고 담소를 나누는 정겨운 모습이 보이고,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우러져 건강한 숲을 이룬다. 아름다운 조화다.
법주사를 벗어나자 4차선 도로가 뻥 뚫리고 양 옆으로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여느 상가지역처럼 번잡함이 없어 좋다. 시계를 본다. 이제 막 4시가 지난다. 15km 거리를 6시간 남짓 걸었다. 여전히 홀로다. 햇살이 쏟아지는 광장에 선다. 이 담담한 기분이 참 좋다.^^
< 법주사에서 2 >
< 에필로그 >
속리산은 특이했다. 속세를 떠난 산이면 어법상 속리(俗離)가 아니라 이속(離俗)이어야 한다. 2인자 문장대가 1인자 천왕봉보다 명성이 앞선다. 대개의 산의 비로봉이 정상인데 아니다. 15km 산행에서 산길은 10km, 도로가 5km. 그런데 그 도로에서도 전혀 지겨움을 느끼지 못했다. 들머리에서 무릎이 아프고 허기가 찾아오더니만 정작 가장 먼저 하산을 완료했다. 상식에 어긋나는 여러 일들이 속리산에서는 자연스럽다. 특이한 경험이다.
후미들도 모두 차에 오른다. 대장이 건 낸 맥주 한 잔에 알딸딸해진다. 차장으로 6월의 햇살이 쏟아진다.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향한다. 늘 그렇듯 노곤한 행복감이 밀려든다.
< 속리산 산행 궤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