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오유 부대는 정병 1만여 명으로, 고연무 부대의 1만여 병사와 연합으로 요동작전에 나섰다. 설오유와 고연무의 부대를 '정병'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이들은 이미 군사적 경험이 있는 자들로 여겨진다. 이들은 4월 4일 말갈군과 교전하게 되는데, 공성전이라기 보다는, '맞서 싸워' 라는 표현을 보았을때 야전을 수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당군이 계속 이르자 물러나서 백성을 지켰고, 이는 수성전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설오유 부대는 야전과 수성전을 모두 수행했고, 이들은 기병·보병 혼성부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지휘관 설오유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삼국통일전쟁기에 접어들어, 신라의 인물 중에 대규모 부대를 지휘한 인물은 왕, 왕족, 진골 및 유력 귀족 외에는 없다. 그런데 유독 설오유만 사찬의 직위로 1만 명에 이끄는 독립 원정군을 이끌고 있었다.
나당전쟁 시기 신라 관인의 활동 중에, 진골 귀족이 아닌 자가 직접 병력을 지휘한 예는 오직 두 가지 사례 뿐이다. 하나는 670년의 설오유와, 676년의 시득 뿐이다. 기벌포 해전을 지휘한 사찬 시득은 대아찬 철천의 휘하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그렇다면 사찬의 신분으로 대규모 원정군을 지휘한 사례는 오직 설오유 밖에 없다.
또한 당시 신라군의 병력동원능력에서 1만여 명은 결코 적은 병사가 아니다. 이 정도 규모의 원정군을 이끈 지휘관이 진골이 아니라는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를테면, 670년 7월 백제공략 시, 장군 대다수는 진골귀족이었다.
설오유 부대는 또한 진골귀족의 책임자도 없었다. 672년의 석문 전투 등의 사례에서도 나타나지만, 나당전쟁 시기 독립 작전을 수행하는 원정군이나 방어군에는 기본적으로 진골귀족이 책임자로 임명되고, 실무담당자로 사찬급이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설오유가 대규모 원정군의 총 책임자가 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로, 이는 설오유 부대의 성격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오유 부대가 정병이라는 표현이 있고, 실제로 이들은 작전지속기간이 3개월 이상으로 비교적 길었으며, 30일 이상의 원거리 행군과 도하작전을 실시했고, 혹한기에 부대이동을 강행했다. 또한 행군간 및 전투 후 이탈자가 발생하지도 않았다. 또한 적극적으로 당군과 교전했다. 사서상에서는 설오유 부대가 어떻게 조직되었는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668년의 기록을 보면,11월 5일 문무왕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 사람 7천여 명을 서울로 데려왔다는 말이 나오고, 671년의 설인귀서에서는 '군사와 말과 재물을 왕 또한 가지게 되었다.'는 표현이 보인다.
이 시기라면 고구려의 유력민은 당나라로 압송된 상태였다. 고구려 포로를 데려왔다는 말과 함께 671년의 언급을 통해, 신라가 끌고 온 사람들이 일반 백성이 아니라 전투가 가능한 고구려의 잔병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시각에 주장한 이정빈등은, 신라는 이들을 억류 관리하기보다는 이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전략을 수립했고, 670년 3월의 설오유 부대와 고연무 부대의 요동진출에는 고구려 포로들의 역할이 상당부분 기여했다는 것이다.
신라는 670년 3월, 설오유 부대를 요동으로 진출시킨 후에, 7월부터 백제고지로 대규모 진격을 시작했다.
가을 7월에 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돌이켜 뒤집을까 의심하여 대아찬(大阿湌) 유돈 (儒敦)을 웅진도독부 (熊津都督府)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도독부는 따르지 않고, 곧사마(司馬) 예군 (禰軍)을 보내 우리를 엿보았다. 왕은 그들이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예군을 머물게 하고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 (品日). 문충 (文忠), 중신 (衆臣), 의관 (義官), 천관 (天官) 등이 63곳의 성을 쳐서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내지(內地)로 옮겼다. 천존 (天存)과 죽지(竹旨)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의 목을 베었으며, 군관 (軍官) 문영 (文穎)은 12성을 빼앗고 오랑캐 군사를 쳐서 7천 명을 목베었는데 빼앗은 말과 병기들이 매우 많았다. ─三國史記 卷第六 新羅本紀 第六
기록을 보면 신라가 먼저 웅진도독부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또한 '답설인귀서' 의 기록을 보면, 670년 6월 고구려가 당에 반역을 꾀하였기 때문에, 신라가 이를 먼저 웅진도독부에 알린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만 본다면 신라가 웅진도독부와 협력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진압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말했다시피, 이미 3월에 요동으로 신라군이 진격을 했고, 또한 백제 80여성을 전격적으로 함락하는것은 사전에 치밀한 준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백제고지 점령은 신라가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답설인귀서에는 신라가 671년 7월 시점까지 당나라와의 전면전을 가능한 회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설오유와 고연무 부대의 움직임은 신라 입장에서는 '공식적인' 작전이 아니었으며,신라가 웅진도독부에 공동출병 교섭을 시도한 것은 당에 대한 공격 의지를 은폐하기 위한 허위 전략이라는 시각이 있다.(이케우치 히로시)
노태돈은 신라의 요동 작전이 평양 지역의 당군을 소탕하고, 압록강 이북으로 진격하여 당으로 하여금 우선 요동방면의 안전 확보에 주력하게 하여, 백제 고지에 대한 신라군의 작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하는 양동작전이라고 주장하였다. 고간, 이근행 등은 670년 4월, 고구려 부흥운동을 진합하기 위해 편성되었지만, 671년 요동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진압하고, 9월이 되어서야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동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당군의 한반도 진격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노태돈이 언급한 바대로, 설오유 부대의 요동작전은 당군의 한반도 진군시기를 늦추는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이상의 여러 주장을 종합해보면, 신라의 정규군은 백제고지와 고구려고지 남부에 투입시켜 영토를 확보한다. 이때 설오유 부대는 요둥으로 진격하여, 견제작전을 수행함으로서 당이 백제고지에 대한 군사지원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하는, 최소한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맡았다는것이다. 설오유 부대가 백성으로 후퇴한 후의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671년 신라가 백제 고지의 중심지에 소부리주를 설치함으로서, 설오유 부대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달성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호오... 잘싸우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