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만천본당에 온지 딱 1년이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과 기대를 가지고 왔는데 막상 지내며 보니 마음과는 달리 참으로 쉽지가 않습니다. 정말이지 하느님의 은총과 많은 분들의 도움과 기도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시간입니다.
지난 월요일, 가장 존경하는 신부님께서 본당사목을 마치시던 은퇴미사에서 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아오시고, 폐암이라는 병고마저 이겨내신 신부님의 모습을 보며 왠지모르게 북받쳐오르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미사 후에 찾아가 인사를 드리며 “신부님, 본당사목이 쉽지 않은데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고 이런저런 말씀드렸더니, 말없이 안아주시며 “김 신부님, 힘들지요? 나도 힘들었어요. 그래도 그 십자가 잘 버텨야 해요”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품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수많은 바람들을 다 들어줄 수 없지만, 그에대한 원성은 늘 들어야 하는 자리, 쉽사리 이해받지 못하는 자리. 그래서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 사목자로서의 십자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십자가가 때로 무겁고, 그래서 넘어져 짓눌리곤 합니다.
다들 각자가 바라는 사제의 모습, 교회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바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땐 따지고 비판합니다. 끊임없이 문제점을 토로합니다. 물론, 긍정적 의미의 비판은 필요합니다. 그 비판자체가 그르다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비판과 반성이 없이 안주한다면 결국 썩고 맙니다. 그러나 이해없는, 기도없는 비판은 교회에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내가 바라는 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온, 우리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의 모습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서 내가 바라는 것들을 다 해주는 ‘봉사자’,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잘못된 말이나 행동은 적절히 통제하는 ‘리더’, 동시에 기도생활에 충실하고 미사를 정성스럽게 봉헌하며 가슴을 울리는 강론을 준비해오는 ‘성직자’, 명쾌하면서도 많은 웃음을 주는 강의를 하는 ‘달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찾아 나서며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 모두를 다독여주는 ‘다정다감한 벗’, 개혁을 이루면서도 불편함은 주지 않는 ‘정의로운 사람’, 어른 신부의 ‘경험과 유연함’을 갖추면서도, 젊은 신부의 ‘신선한 감각’을 지닌 ‘다재다능한 사제’, 이 모든 모습을 두루 갖추어야만 아무 말 들리지 않는 사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00년 가톨릭교회 역사상 그런 성직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본당신부의 수호자인 비안네 신부님도 사람들로부터 무식하다고 손가락질 받았고, 오상의 비오 성인도 신자들에게 호통치며 무섭기로 소문난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내가 바라는 모습’, ‘내가 원하는 바’를 갖추기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함께 가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족한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는 평신도들, 그런 평신도들을 위해 노력하는 사제들. 이렇게 서로 도와가며 예수님 제자로서의 교회는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문제를 다 이야기하고 이해받을 수 없듯이, 사제들이 자신의 생각을 다 이야기하고 이해받을 수 없습니다. 고유한 입장과 고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이해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남에게 바라는 것을 먼저 남에게 해주는’ 존재가 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복음의 이 말씀에, 먼저 우리는 여기에 ‘내 뒤를’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임의대로 앞장서 가는 것이 아니라, 명확히 따라야할 대상으로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라는 표현의 의미는 곧 “예수님처럼”을 뜻하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깊은 생각과 의도를 공유하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친교를 공유하며, 예수님의 행동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명확하게 요약하자면,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제한된 사고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사야서에서 하느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있음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제1독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물음으로 시작됩니다.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기는 그토록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쉽사리 ‘하느님의 뜻’을 판단하거나, ‘하느님의 뜻’으로 가장하여 ‘나의 뜻’을 내세워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제시합니다.
때때로 우리를 하느님의 뜻을 잘 안다는 착각에 빠지지만, 잘못된 일입니다. 사실 지혜서의 고백처럼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우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루카 복음사가는 ‘미움’과 ‘버림’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더욱 명확하게 예수님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참된 제자, 즉 참된 신앙인이 되려면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함께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군중도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도 다가가고 함께 걸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생각을 갖고 그분과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 생각, 내가 만들어 놓을 틀을 간직한 채로 예수님 곁에 머무르려 한다면 그것은 참된 제자라 할 수 없고, 다만 예수님을 통해 ‘자기 위안’을 얻는 수단에만 그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말하는 ‘미움’은 어떤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행동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버리는 것’입니다. 제자라면 선택을 해야 하고 자신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버린다는 것은 내 생각, 내가 만들어 놓은 틀을 더 이상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의 생각에 가까워 질 수 있도록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버린다’로 번역된 희랍어 'ἀποτάσσομαι'는 ‘작별 인사를 하다’, ‘방향을 바꾸어 떠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비유적으로는 ‘포기한다’, ‘분리한다’는 뜻입니다. 즉,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틀을 ‘포기’하고, 자신이 기존에 살던 방식과 ‘작별’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이기적 요소가 들어 있는 모든 사랑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함을 시사합니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본능적 사랑은 이기심과 자기 자신의 만족에 대한 추구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인간 개념의 사랑을 제거하고 완전하고 순수한 하느님의 사랑을 맞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미워하라’는 표현은 ‘더 사랑하라’는 것, 내가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더 높은 사랑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나를 내려놓고, 내 생각, 내 의지, 그렇게 내가 만들어 놓은 사고의 틀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 큰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고,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며, 그래서 분명 우리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앞세워 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예수팔이 장사꾼”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려 한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음에도 여전히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 여전히 수많은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아직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됨의 조건은 나의 바람, 나의 생각, 나의 의지를 ‘버리고’, 십자가에서 팔을 벌리고 매달리신 예수님처럼 넓은 가슴으로 모두를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것. 힘들지만, 바로 그 ‘십자가’의 희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각자의 마음에, 버리지 못한 ‘내 판단, 내 기준, 내 생각’, 그래서 떨치지 못한 분노와 미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마저 모두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이 채워질 수 있음을 기억하며, 잠시 침묵가운데 우리에게 들려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마음, ‘내려놓아’ 봅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