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모이면 많이 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바로 ‘군대 이야기’입니다. 군생활의 무용담이나 추억 또는 힘들었던 이야기 등등 자신의 군생활 이야기를 많이 하곤 합니다. 아마도 오늘 군인주일을 맞아서, 형제님들 중에는 예전 군생활의 기억이 떠오르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 군대 중에서 가장 힘든 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자신이 군생활 한 곳”입니다. 사실 대부분은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군생활을 하다보니 그 자체가 기쁘기 보다는 힘들게 느껴지고, 그래서 원치않던 어려움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로 그것을 인정받고 싶어하고 그 어려움을 서로 비교하곤 한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삶도 어쩌면 이와 같지는 않은가 반성해 봅니다. 사실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 것인데, 많은 부분 ‘내가 더 열심히, 내가 더 힘든 것’을 하면서, 하느님과 더 가까이에 있다는, 또는 남들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오늘 복음은 우리 신앙인들이 갖추어야 할 태도에 대해 ‘믿음과 겸손’이라는 두 개의 테마를 연결시킨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하게 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더욱 풍성하게 묵상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의 내용은 “남을 죄짓게 하지 말고, 그 이웃이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가르침이 제자들에게 너무나 어려워 보였던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 것을 행하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우월적인 존재로 부각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했던 것으로, 쉽게 말하면 ‘그렇게 하고 싶은데 도저히 안되니 도와주십시오’라고 바랐던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인간적인 어떤 모습으로 재고 있는 모습, ‘나는 저건 못해’하며 포기하거나, 망설이는 모습. 그래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마치 그런 기적과도 같은 일을 기대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 결과는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니, ‘믿는다’는 것은 전적인 받아들임으로 우선 따라고 행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신앙인들이 많은 경우에 기복적인 마음의 신앙, 그래서 하느님을 ‘자판기’처럼 대하는 신앙의 모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했으니까 이만큼 이루어주셔야 한다”라고 바란다거나 “나는 열심히 봉사도 하고 미사도 빠지지 않는데, 왜 나보다 열심하지도 않는 저 사람은 나보다 잘 되는 것일까?”라고 하느님께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실제로 군인주일이기도 하니, 우리 교구의 어느 신부님께서 몇년전 군종신부 시절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진급심사 기간이 되면, 군종성당은 수많은 미사지향과 예물이 봉헌이 된다고 합니다. 그 군종성당에서도 어느 자매님이 남편의 장군진급을 바라며 미사예물을 봉헌했는데, 결국은 안타깝게도 진급에 실패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자매님이 노발대발하며 신부님을 찾아와 미사의 은총이 부족해서 그런거 아니냐고 따지고, 봉헌했던 미사예물을 환불해달라고 해서, 결국 신부님이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조금 어이없어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우리 각자의 안에도 이런 마음들이 작게라도 자리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했는데...내가 이만큼 봉사했는데...내가 이만큼...’
그런데 참된 신앙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의 기적을 바란다거나,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어떤 ‘인간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시기를 바라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물고기가 사람으로 변하는 것과 같은 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고, 그런 ‘엄청난 것’을 바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은 그저 마술이나 공상일 뿐이고, 사람이 참 사람의 모습을 찾아 변하는 것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그래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나 용서를 청하거나, 용서를 해야 할 일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지만, 그것이 힘들다고 포기하고,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고. 그렇게 결국엔 사랑하기를 포기하고 싶은 우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렇게 사랑하는 삶을 살 때 분명 하느님의 방식으로 결실을 맺어주실 것임을 믿기 때문에”,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끊임없이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그런 우리 자신으로 ‘변화되는 것’.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인간의 본 모습을 찾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믿음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표현이 또 하나 있습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여기에서 ‘쓸모없는’이라고 번역된 말은 성경의 그리스어로 ‘아크레이오스(ἀχρείος)’인데, 이 말은 사실 ‘특별할 것 없는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내가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한 기도, 서로를 사랑하는 것, 사랑의 삶이 힘들다하더라도 용서와 희생을 통해 그것을 실천하는 것 등등>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신앙인들에게 ‘평범한’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실천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를 베풀었다고 해서, 내가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해서. / 하느님께 또는 이웃에게 그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신앙인으로서의 평범한 일이고 일상의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제 시작하는 10월의 로사리오 성월을 통해 우리는 믿는 이들의 참된 모범이신 성모님의 모습을 배우고, 그분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성모님의 신앙은 그분의 첫 고백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의 고백을 통해 인간 역사 안에 하느님의 구원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이 신앙은 아들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반복되어 고백이 됩니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이 믿음의 고백을 통해 수난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무엇을 청할 요량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설령 오늘 내게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청한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끝내 나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우리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베풀어 주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우리 자신은 그저 묵묵히 주님의 뜻을 따라 내가 행할 바를 끝까지 다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credere)은 마음(cor)을 건네줄(dare)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내 것, 내 마음을 꼭 쥐고 있는다면 진정한 믿음의 모습을 갖추긴 어렵습니다. 마음을 건네줄 때에 생기는 믿음은 곧 사랑을 낳게 되고, 이 사랑의 관계에서 희망이 싹트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번 한 주간, 우리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님을 닮아, 하느님께 내 마음을 건네어 드리는 참된 믿음의 한 주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성모님의 위대한 고백이 곧 우리의 고백과 기도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신부님의 강론말씀을 미사 중에 집중해서 못 들었나 봅니다. ㅎㅎ 글로 읽으니 와닿는 부분들이 한두군데가 아니네요. 계속 맞아..맞아..하며 읽는데 다음 단락 말씀도 좋고 또 다음 내용도~계속 빠져들고 끌려들어 가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저의 평범한 생각과 행동들이 사랑의 실천 이웃과의 나눔일 수 있도록 제 안의 겸손과 믿음을 잘 살피는 한 주간 보내겠습니다~ 좋은 말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