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루소: 도덕세계의 공화적 구조
칸트의 실천철학에 있어서 루소는 중요하다. 그들이 만나는 지점은 도덕적인 질서의 이념이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정치적인 형태를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칸트는 인간이 소우주라는 오랜 서구 전통의 통찰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인간의 이미지를 “당위(ought)”의 문제로 바꾸어 놓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는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the starred sky above me and the moral order within me)이다”(칸트. 2009. 『실천이성비판』.백종현 옮김, 271). 칸트에 의하면, 의지의 근본적인 자기결정으로서 도덕률은 천국이나 지상이 아니라 바로 “인간 안에서(in man)” 발견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가능한 도덕성의 자원으로 종교와 자연주의 이 양자를 동시에 묵살한다. 루소는 그로 하여금 질서의 이념이 어떻게 정치 영역에서 규범적(prescriptive)인지를 잘 밝혀주고 있다.
칸트의 이론 철학에서 신, 자유, 불멸성 이 세 요소가 중요하다. 이 중에서 그의 실천철학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이다. 다른 두 이념은 종교에 대한 도덕적 계몽적인 태도가 된다. 그의 제일 비판에서 자유는 우주론적 의미로 나타나고, 윤리에 관한 저작에서는 도덕률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률이 궁극적으로 정식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범주적 정언명령을 통해서 근접화할 수 있을 뿐이다. 한편 정치철학의 영역에서 그의 자유 이념을 이상(ideal)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루소의 사회계약 이념이다.
루소와 칸트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루소에게서 어떤 의미로 도덕성의 이슈가 역사와 관계있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루소는 1755년에 『인간불평등기원론』(주경복 옮김. 책세상, 2003)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문명이 보다 높은 완벽을 위한 길이라는 계몽적인 확신에 반기를 들고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퇴폐이자 박탈이라고 주장하였다. 가령 홉스가 인간의 늑대적인 본성 - 거만함, 탐욕, 교활함 등 -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영국의 정치적 상황에서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인 과정 (또는 퇴행)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루소의 역사 재구성 프로젝트는 완전한 독립 속에 살고 물질적으로 자족적인 자연인(l'homme naturel)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자연인의 시기에는 철학자들이 고래로 인간의 특징을 규정짓고 있는 이성과 언어는 발현되지 않는다. 다만 인간에게는 자기애(amour de soi; self-love)와 동정(commiseration; compassion)이 부여될 뿐이다. 즉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자연적 독립은 곧 균형을 잃게 되고 미개인은 야만인이 된다. 그러한 삶의 곤궁으로 인해 인간들은 단합하게 되고 언어와 이성의 능력이 깨어난다. 이러한 목가적 집단의 시대를 지나 농업과 수공업이 도입됨으로써 ‘소유,’ ‘종속,’ ‘지배’ 및 노예와 같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급기야 개인적인 이해 문제로 법과 정부가 필요하게 된다. 결국 진보는 우리의 영혼을 타락시키게 된다. 자연적인 자기애는 이기심과 자기중심주의로 타락하게 되고 각자 인간의 목표는 자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희생하는 대가로 잃었던 독립을 되찾게 된다.
루소에게 있어서 역사를 재구성하는 추동력은 자유이다. 이런 연유에서 역사는 도덕성의 역사, 즉 도덕성의 발생의 역사이다. 오직 이기심이 있는 곳에 도덕이 필요하고 도덕적 양심이라는 능력도 나타난다. 여기서 양심은 각 개인이 공동체를 의식하는 성향이나 태도(Gesinnung)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래적이고 본능적인 동정의 때늦은 소산이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안녕을 위햐여 우리의 충동을 잠재우는 도덕 행위는 만인의 신중한 결사(association), 즉 공동체에 참여하려는 의지(will)를 필요로 한다. 이 결사는 루소가 말하는 단순한 집결(aggregation)이 아니라 공동체로의 의지(a will), 즉 일반의지(a general will)이다. 이러한 과제는 무질서한 욕망들을 포기하고 이들을 균일한 의지에 예속시키는 것이다. 칸트가 루소에게 끌렸던 것은 그 예속이 다름 아닌 나의 의지라는 권위이며 그래서 나의 의지는 일반의지와 상응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는 루소가 공화정을 구성 과정에서 도덕적인 자율성을 발견하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루소는 말하기를, “각자는 모든 사람에게 통일되면서도 자기 스스로에게만 복종하고 이전처럼 자유로운 결사의 형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사회계약이 해결할 근본적인 문제이다”(『사회계약론 Social Contract III』, 360). 그 해결책은 모든 사회구성원이 그들 스스로를 일반의지에 묶어두는 의무(obligation)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일반의지는 영국의 벤담이 이야기하고 있는 평균적 의지(the average will)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벤담은 위대한 회계사일 뿐이었다. 여기서 일반의지는 도덕적 형이상학적 원리로서의 합리적인 의지이다.
그러나 칸트와 루소가 갈라서는 점도 다시금 역사이다. 만약에 인간이 “합리적이면서 유한한,” 다시 말해서, 본래적으로 이중적이라면 칸트가 생각하는 역사는 자연으로부터의 타락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원래 그렇게 본능적인 존재는 아니다 라고 칸트는 주장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칸트에게 있어 도덕성의 핵심적인 사안은 행복이 아니다. 칸트에게 있어서나 루소에게 있어서 인간 스스로 어떤 행위를 위한 법을 제공한다면 합리적인 자율성과 입법은 행복을 위해 봉사할 수 없다. 칸트의 의지를 통한 자기결정의 전유의 의미에서 의지와 이해(interest)는 확실히 구분된다.
루소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자율이 도덕적일 수 있는 것은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서 공적인 관심을 추구하기 위해서 추상적인 일반의지 이념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칸트에게 있어 정치적인 자율이 도덕적인 이유는 자율이 이해관계들- 고작 준칙(maxims)의 사안으로서만 작동하는 -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수준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보다 단순하게 표현해서, 루소의 ‘일반의지’는 하나의 원칙이 (그것이 원초적이건 자애롭건, 퇴폐적이건 경쟁적이건) 자기애에서 비롯하는 반면, 칸트의 합리적인 의지는 두 개의 원칙에 매인다. 합리적인 의지는 그 자신의 법칙을 우리의 경향(inclinations)에 강제하는 이성이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당위가 욕망(제2비판)에 또는 본체(noumena)가 현상(phenomena)에 관계되는 것처럼, 사회계약의 이상은 시민사회와 관계있다.
다시 말해서 칸트는 루소가 있었기에 보편적인 의지를 통한 자기결정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의지의 보편성 유형에 있어서 그는 벌써 루소를 떠나있다. 이점에 있어 루소는 애매하지만 칸트는 명쾌하다. 루소에게 있어서 일반의지는 헌법과 법률의 원리인 반면에, 칸트에게 있어서 이는 정치적인 영역으로 확대되는 도덕성의 원리가 된다. 그러나 행복과 자연의 본성의 역할의 측면에서 칸트는 루소와 판이하게 다르다. 루소에게 있어서 개인이 다른 구성원들과 더불어 법을 제정하는 보편적 정신적 사회의 성원이라면, 그는 이를 “자연스럽게(naturally)” 제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칸트에게 있어서 “자연(nature)”은 개별화한다.
첫댓글 의지는 합리적일 수도 있고 비합리적일 수도 있지요. 관건은 우리의 욕망의 수준(the higher faculty of desire)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높은 수준의 욕망에 기초하는 경우 그 의지는 합리적이고 보편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인간의 다투는 성향(striving)에 기초하는 의지는 아무래도 비합리적인 경향을 띠게 될 것 입니다. 루소나 칸트에게 있어서 일반의지는 합리적인 의지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모든 사람들의 의지 내지는 평균의지는 단순히 실제적인 다툼의 합/평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대로 로베스삐에르가 루소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핵심에 서있던 토크빌이 그랬다죠?
혁명초기에는 몽테스퀴에가 그렇게 인용되고 논의되더만 혁명 후반기에는 사람들이 루소만 이야기 하더라구요. 사실 루소의 일반의지론은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적인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지요. 영국의 정치이론가 버크의 위대성은 바로 그 로베스삐에르의 공포정치를 미리 예견했었다는 점이 아닐까 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그런데 '칸트의 합리적인 의지는 두개의 원칙에 매인다' 고 하셨는데 뒤에 그 설명이 없어서 그 두개의 원칙이 잘 뭔지 모르겠군요. 알고 싶습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두 원칙은 인간이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유한한 존재임과 무관하지 않을 것 입니다. 인간 영혼의 경향성과 인간 정신의 합리성 사이에 늘상 대립이 존재한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20세기 현상학이 19세기 현상학을 거치지 않고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데는 칸트의 바이노미 사상이 일조 했다고 봅니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자기애에 비롯되고 칸트의 합리적인의지는 합리성과 유한성에 매인다는 말이지요? 이해는 안되지만 일단 그정도로 알고 연구해 보겠습니다. 바이노미 사상도 잘 모르지만 여쭤보기는 뭐하고 제가 기회되면 찾아보겠습니다.
제 스승의 어록 "Autonomy would be binomial, a double law."에서 따온 신조어랍니다.^^ 구글을 쳐보니 이 개념을 벌써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하고 있더군요. 사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이러한 시각으로 읽어나가면 대단히 흥미로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