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방랑시인 김삿갓 2부 ●
※ 2부 145회 ※
☆ 관촉사(灌燭寺) 미륵석불(彌勒石佛)에
얽힌 유사(遺事). ☆
이윽고
황포(黃布) 돛이 바람을 품고 강심(江心)으로 두둥실 떠나가기 시작(始作)하자,
뱃사공(-沙工)들은 갑판(甲板) 위에
술상(-床)을 차려 놓고 김삿갓을 불렀다.
"출발(出發) 전(前)에
고사(告祀)를 지낸 술이 좀 남아 있으니
형씨(兄氏)도 우리와 함께 흠향(歆響)합시다."
어떤 술이라도 사양(辭讓)할 김삿갓이 아니다.
김삿갓은 배꾼들과 함께 술잔(-盞)을 나누며
풍경(風景)을 유심(有心)히 살펴보았다.
배는 순풍(順風)에 돛을 달고
강물을 좌우(左右)로 가르며
앞을 향해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저 멀리 강(江)가에는
갈매기와 백로(白鷺)들이
삼삼오오(三三五五) 너울너울
춤을 추듯 날아다니고 있었고
게다가 해는 저물기 시작해
서녘 하늘에는 노을이 짙어 왔다.
그 풍경(風景)이 너무도 아름다워
김삿갓은 신용개(申用漑)의 시(詩)가
자기(自己)도 모르게 읊어졌다.
수전추고 목엽비 (水田秋高木葉飛)
◎ 강마을 가을이 짙어 나뭇잎이 날리고 ◎
사한구예 정모의 (沙寒鷗예淨毛衣)
◎ 강가에 나는 갈매기 날개 더욱 희구나 ◎
서풍낙월 취유정 (西風落月吹遊艇)
◎ 저무는 바람결에 놀잇배 띄웠으니 ◎
취후강산 만재귀 (醉後江山滿載歸)
◎취하도록 마신 뒤에 강산 가득 싣고 가네.◎
배는 부여(扶餘)의 '구두레' 나루를 떠난 지
이틀 만에 강경포(江景浦)에 닿았다.
"선장(船長) 어른을 비롯하여 사공님들께
여러 날 동안 신세(身世)를 많이 졌습니다."
배가 강경포(江景浦)에 닿자
김삿갓은 행장(行裝)을 갖추고 배에서 내렸다.
김삿갓은 관촉사(灌燭寺)를 가보려고
반야산(般若山)으로 걸음을 옮겼다.
관촉사에는 키가 어마어마하게 큰
미륵석불이 있었다.
고려광종 때 반야산(般若山) 기슭에서
높이가 54척(尺)이나 되는
거대(巨大)한 자연석(自然石)이
"내가 온다! 내가 온다!"하는 소리를 내며
땅 위로 절로 솟아올랐는데,
혜명 선사가 그 돌을 정으로 쪼아 미륵불을 만들어 놓은 게 바로 그 돌부처님[은진미륵이라는 것이었다.
그 불상(佛像)은 괴이(怪異)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나라에 무슨 변란(變亂)이 일어날 때면 마치 살아 있는 부처님처럼
전신(全身)에 땀을 흘린다는 것이었다.
그 불상(佛像)은 고려(高麗)가 망(亡)할 때도 전신(全身)에 땀을 흘렸고,
임진왜란(壬辰倭亂)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날 때도
전신(全身)에 땀을 흘렸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은진미륵(恩津彌勒)이
한번 땀을 흘렸다 하면
조정(朝廷)의 군신(君臣)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백성(百姓)들의 민심(民心)도
크게 흉흉(洶洶)해진다는 것이었다.
나라에 변란(變亂)이 있을 때마다
은진미륵(恩津彌勒)이 땀을 흘린다는
전설(傳說)은 어제나 오늘에
시작(始作)된 이야기가 아니다.
고려말의 시인 이색이 지은 시에도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
마읍지동 백여리 (馬邑之東百餘里)
◎ 부여에서 동쪽으로 백 리쯤 되는 곳 ◎
시진현중 관촉사 (市津縣中灌燭寺)
◎ 시진 고을에 관촉사라는 절이 있다. ◎
유대석상 미륵존 (有大石像彌勒尊)
◎ 돌로 된 커다란 미륵 부처가 있으니 ◎
아출아출 용종지 (我出我出湧從地)
◎ "나온다 나온다"하며 땅에서 솟아올랐다. ◎
위연설색 임대야 (魏然雪色臨大野)
◎ 하얀 불상이 들을 향해 우뚝 서 있어 ◎
농부예도 극단시 (農夫刈稻克檀施)
◎ 농부들이 벼를 베어 불공을 드린다. ◎
시시류한 경군신 (時時流汗驚君臣)
◎ 때때로 땀을 흘려
임금과 신하들을 놀라게 한다는 일. ◎
부독구전 장국사 (不獨口傳藏國史)
◎ 말로도 전해 오고 정사에도 실려 있다. ◎
이렇듯 나라에 변란(變亂)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미리 알려주는 것이
사실(事實)이라면,
은진미륵(恩津彌勒)이야말로 국가(國家)의
귀중(貴重)한 보배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방랑시인 김삿갓 2부-(146) ●
☆ 일사도무사 평생한유신 ☆
(一死都無事 平生恨有身)
*죽으면 이런 멸시는 안 당할 텐데,
몸이 있는 것이 평생 원한이로다.*
관촉사(灌燭寺)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내려오면, 풍계촌(風界村)이라는 마을에 후백제(後百濟)를 창건(創建)한 견훤(甄萱)의 무덤이 있다.
견훤(甄萱)은 신라(新羅)의 비장(裨將)이었는데, 진성여왕(眞聖女王)때,
따르던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반란(叛亂)을
일으켜 전주(全州)에 도읍(都邑)을 정(定)하고 “후백제(後百濟)”를 일으킨 풍운아(風雲兒)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왕자 금강과 신검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나라를 세우고 41년(年) 만에 망(亡)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견훤(甄萱)의 초라한 무덤만이
적막(寂寞)한 산속에 쓸쓸히 남았으니,
인생(人生)의 영고성쇠(榮枯盛衰)란 본시(本是) 이렇게 허망(虛妄)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충청도(忠淸道)에서 전라도(全羅道)로 넘어와 익산군(益山郡) 용화산(龍華山)에 있는 미륵사(彌勒寺)와 상원사(上院寺) 등(等)을 구경하고 옥구(沃溝) 땅에 들어섰을 때는
가을도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 가을에 전라도(全羅道) 일대(一帶)에는 심한 흉년(凶年)이 들어, 김삿갓은
어디를 가도 밥을 얻어먹기가 매우 어려웠다.
때는 한창 추수(秋收)하는 철인데도,
집 집마다 식량(食糧)이 부족(不足)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끼니를 이어가는
집조차 있는 형편(形便)이었다.
형편(形便)이 이 지경(地境)이다 보니 김삿갓은 열 집 스무 집 구걸(求乞)을 다녀 보아도, 하루에 한 끼를 얻어먹기도
어려울 정도(程度)였다.
게다가 돈은 한 푼도 없고
날은 갈수록 추워지는데,
몸에 걸치고 있는 옷조차도
여름옷 그대로였다.
(이거 큰일 났구나.
배를 타고 금강(錦江)을 내려올 때만 해도
배가 터지도록 잘 얻어먹었는데 이제는 하루
한 끼도 얻어먹기 어려운 형편(形便)이니,
눈앞에 닥쳐오는 엄동설한(嚴冬雪寒)을
어떻게 넘길 것인가?)
좀처럼 비관(悲觀)할 줄 모르는 김삿갓도
이때만은 눈앞이 아득하였다.
금강산(金剛山)도
식후경(食後景)이라 하지 않던가!
그러나 김삿갓은 날마다
기아(飢餓)에 허덕이다 보니,
이제는 좋은 경치(景致)를 찾아다닐
마음의 여유(餘裕)조차 없게 되었다.
이렇듯 아침저녁을 제대로 얻어먹기가
어렵게 되니 날이 갈수록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해 오는데 몸이 야위어올수록
추위도 혹독(酷毒)하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김삿갓은 구걸(求乞) 생활(生活)을
30여 년(年)이 넘게 해왔지만,
이때처럼 혹심(酷甚)한
고초(苦楚)를 겪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어느 날, 김삿갓은 추위를 참고 견디다 못해
어느 집으로 찾아가 사정(事情)을 해보았다.
"나는 지나가는 나그네올시다.
감기(感氣)에 걸려 열(熱)이 심하니 하룻밤
잠이나 편(便)히 자고 가게 해 주십시오.
밥은 조금 전(前)에 먹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밥을 먹었다는 것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추위를 피(避)해 잠을 자고 가기 위해
주인(主人)을 안심(安心)시키려는 말이었다.
주인(主人)은 김삿갓의 행색(行色)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올해는 흉년(凶年)이 심해,
우리 식구(食口)들은 지금 밥을 굶고 있다오."
"그런 사정(事情)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밥걱정은 마시고
잠만 자고 가게 해 주시면 됩니다."
"에이, 여보시오.
내 집에서 자고 일어난 사람에게
어떻게 밥을 굶으라고 하겠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주인(主人)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나서,
김삿갓의 행색(行色)이 하도 딱해 보였던지,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굶다시피 하기에
어느 집을 찾아가도 똑같은 사정(事情) 일게요.
여기서 고개 하나를 넘어가면
김(金) 진사(進士)라는 부자(富者) 댁(宅)이 있소.
그 집에 가면 돈도 많고 쌀도 많을 테니
그 집을 찾아 가 보시오."하고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돈도 많고 쌀도 많은 집”이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진사(進士) 벼슬을 지낸 사람이라면
말도 통할 것 같았기에 은근(慇懃)한
기대(期待)하고 지친 다리를 이끌고
고개를 넘기 시작(始作)하였다.
별로 험한 고개도 아니건만
고개 하나를 넘는데도 몹시 힘에 겨웠다.
이윽고 고개 위에서 바라보니
과연(果然) 산(山) 밑에는 고래등 같은,
커다란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저 집이 바로
김(金) 진사(進士) 댁(宅)인가 보구나.
저만한 부자(富者)라면 밥도 배불리 먹여 주고 잠도 따듯하게 재워주겠지.)
김삿갓은
가슴 울렁거리는 흥분(興奮)을 느끼며
김(金) 진사(進士) 댁(宅)을 찾기가 무섭게
제법 힘차게 대문(大門)을 두드렸다.
그러나 대문(大門)을 두세 번 연거푸 두드려도 안마당에서는 개 짖는 소리만 요란(搖亂)할 뿐 사람은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김삿갓은 밥을 빨리 얻어먹고 싶은 마음에서
대문(大門)을 연방(連方) 두드려 대었다.
그러자 60 가까운 탕건(宕巾)을 쓴 늙은이가
대문(大門)을 살며시 열고 내다보며
매우 냉담(冷淡)한 어조(語調)로 물었다.
"누구를 찾소?"
물어보나 마나 그 노인(老人)은
김(金) 진사(進士)가 분명(分明)해 보였다.
"저는 지나가는 과객(過客)이옵니다.
하룻밤 신세(身世)를 좀 지게 해 주십시오."
상대방(相對方)이 진사(進士)인 만큼,
이쪽도 선비의 체통(體統)을 지키려고
제법 의젓하게 부탁(付託)했다.
김(金) 진사(進士)는 사뭇 아니꼬운 듯,
미덥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더니 문득
주머니에서 엽전(葉錢) 두 닢을 꺼내
손에다 주면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내 집에서는 사람을
재워 줄 형편(形便)이 못 되오.
이것 가지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드시오."
그리고 대뜸 대문(大門)을 잠가 버렸다.
김삿갓은 손바닥에 놓인 엽전(葉錢) 두 닢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까닭 모를 분노(忿怒)와 함께
눈물이 왈칵 솟구쳐 올라왔다.
(글줄이나 배웠다는,
소위(所謂) 진사(進士)라는 작자(作者)가
선비를 이렇게도 멸시(蔑視)할 수가 있을까?)
배우지 못한 사람이 그랬다면 무식(無識)한
탓으로나 돌리겠지만 진사(進士)까지 지냈다는 작자(作者)가 그처럼 무지막지(無知莫知)하게 나오니 용서(容恕)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점잖은 체면(體面)에
대문(大門)을 걷어차며 행패(行悖)를
부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던가!
(사람이 이런 괄시(恝視)를 받으면서도
살아야만 하는가?)
김삿갓은 김(金) 진사(進士)라는 자(者)가
너무도 원망(怨望)스러워,
문득 바랑 속에서 붓을 꺼내
대문(大門) 한복판에 주먹 같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시(詩) 한 수(首)를 후려갈겼다.
옥구 김진사 (沃溝金進士)
◎ 옥구에 사는 김 진사가 ◎
여아 이분전 (與我二分錢)
◎ 나에게 엽전 두 푼 주노니 ◎
일사 도무사 (一死都無事)
◎ 죽으면 이런 멸시는 안 당할 텐데 ◎
평생 한유신 (平生恨有身)
◎ 몸이 있는 것이 평생 원한이로다. ◎
이같이 분풀이로 시(詩) 한 수를 후려갈기고
그 자리를 떠나오기는 했으나,
배는 고프고 해는 저물어 오는데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다.
산 밑으로 어정어정 걸어오다 보니,
조그만 움막이 하나 보였다.
알고 보니 그것은 집이 아니라,
상여(喪輿)를 보관해 두는 “상두막”이었다.
(에라, 잘됐다. 어차피
상여(喪輿) 신세(身世)를 져야 할 판이니
상두막에서 자다 죽어 버리면 제격이다.)
김삿갓은 행상(行喪) 때 쓰는
포장(布帳)을 몸에 휘휘 둘러 감고
상여판(喪輿板) 위에 번듯이 누워 버렸다.
그리고 워낙 기아(飢餓)로
기진맥진(氣盡脈盡)한 판이라
눕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나 잤는지 몰라도, 문득 누군가가,
"여보시오, 선비양반(--兩班)!"하고
몸을 흔들어 깨우는 게 아닌가!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있어 눈을 떠보니,
머리맡에는 아까 만났던
김(金) 진사(進士)가 서 있었다.
너무도 뜻밖의 광경(光景)이어서
김삿갓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니, 이런 곳에 어떻게 오셨소?"
그러자 김(金) 진사(進士)는
용서(容恕)를 비는 어조(語調)로,
"조금 전(前)에 선비가 내 집 대문(大門)에
써놓은 시(詩)를 읽어보고 찾아왔소이다.
요사이 거지 떼가 하도 많아 나는
귀공(貴公)도 거지인 줄 알고 쫓아냈던 것이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으니 용서(容恕)하시오."
김삿갓은 품고 있던 분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
"한번 쫓아 버렸으면 그만이지 뭣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말요!“
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김(金) 진사(進士)는
가볍게 웃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귀공(貴公)이 나를 나무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오. 그러나 한 번 실수(失手)는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소.
내가 귀공(貴公)에게 특별(特別)히
부탁(付託)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하니,
노여움을 풀고 어서 내 집으로 가십시다."
김삿갓은 생떼를 쓰는 것도
도리(道理)가 아닐 것 같아,
두말없이 김(金) 진사(進士)를 따라나섰다.
그리하여 김(金) 진사(進士) 댁(宅)에서
오랜만에 저녁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들어보니,
김(金) 진사(進士)의 “특별부탁
이란 것이 다른 게 아니고 이러했다.
김(金) 진사(進士)에게는
아홉 살짜리 손자(孫子)가 하나 있어,
지금(只今)까지는 자기(自己) 자신(自身)이
직접(直接) 글을 가르쳐 왔었는데,
할아비가 손자(孫子)에게 글을 가르쳐 준다는 게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으니,
김삿갓에게 가정(家庭) 교사(敎師)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대문간(大門間)에
아무렇게나 써 갈긴 한 수(首)의 시(詩)가
생각지 못한 효과(效果)를 낸 셈이었다.
김삿갓은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글을
팔아먹을 생각은 추호(秋毫)도 없었다.
그러나 당장(當場) 눈앞에 닥쳐오는
엄동설한(嚴冬雪寒)만은 무사(無事)히
넘겨 놓고 봐야 하겠기에,
"좋소이다.
몇 달 동안 손자(孫子) 아이에게
글을 가르쳐주도록 하지요.
그러나 봄이 되면 나는
어차피(於此彼) 길을 떠나야 할 사람이니,
그 점(點)은 미리 양해(諒解)해 주시오."하고
김(金) 진사(進士)의 부탁(付託)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그날부터는 밥걱정도 없고, 잠도 편(便)히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천하(天下)를 주유(周遊)해야 할 내가
밥 한 그릇에 팔려 초학(初學) 훈장(訓長)으로 썩어나고 있으니,
나도 이제는 말로(末路)가 가까워졌나 보네!"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기나긴 겨울이 가고 먼 산에
아지랑이 아물거리는 봄이 돌아오자
김삿갓은 몸에 배어 있는 방랑벽(放浪癖)이
야금야금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그리하여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한겨울을 꼬박 김(金) 진사(進士) 댁(宅)의
방(房)에 앉아 손자(孫子)에게 글을 가르치며 보내다가 오랜만에 길을 나서니,
30리(里)도 채 못가 다리가
무거워 오기 시작하였다.
따지고 보면 50 고개를 넘어선 지도
이미 여러 해가 되는지라,
다리가 약(弱)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前)에는 얼마든지 걸을 수 있었지만
갈빗대 사이에 담이 들었는지 밤이면
옆구리가 결리기 시작(始作)하였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 나에게도 죽을 날이 가까이 왔나 보고나!)
걷는 것조차 힘에 겨웠던 김삿갓이
처량(凄涼)한 감회(感懷)에 잠긴 채
고갯길을 넘어가노라니
길 양(兩)쪽 산(山)속에는 갖가지 꽃들이
계절(季節)을 다투며 활짝 피어 있었다.
문득 그윽한 마음에 사로잡힌 김삿갓,
흥얼거리며 시(詩)를 한 수 읊조렸음 직한데
오늘날까지 전(傳)해오지는 않는다.
● 방랑시인 김삿갓 2부147회 ●
☆ 전주(全州)에서 ☆
다리가 불편(不便)했던 김삿갓은
옥구(沃溝)를 떠난 지 나흘이 지나서야,
전주(全州) 고을에 들어섰다.
전주(全州)
고을의 진산(鎭山)은 건지산(乾止山)이다.
건지산(乾止山)은 듣던 바와 같이
수목(樹木)이 울창(鬱蒼)하였다.
게다가 전주(全州)에서는 역사적(歷史的)으로 인물(人物)도 많이 났거니와 가옥(家屋)도 고풍(古風)스러운 곳이 즐비(櫛比)하였다.
전주(全州)는 백제(百濟) 때부터 지금(只今)에 이르기까지 국가(國家)의 요처(要處)인지라,가는 곳마다 명승고적(名勝古跡)이 허다(許多)하였다.
남문 안에는 경기전을 비롯하여 고덕산에 있는 만경대와 모악산에 있는 귀신사와 보광사 등등, 고색창연한 사찰만도
여러 군데 있었다.
전주(全州)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소(名所)는
“덕진호(德津湖)”라는 아름다운
인공(人工) 호수(湖水)다.
전주(全州)는 얼른 보기에는
건지산(乾止山)을 비롯하여
고덕산(高德山), 모악산(母嶽山),
가련산(可連山) 등등(等等) 높고 낮은 몇 개의 산(山)으로 둘러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엄밀(嚴密)하게 조사(調査)해 보면,
건지산(乾止山)과 가련산(可連山)은
서로 연결(連結)이 되어 있지 않아,
전주(全州) 서북방(西北方)은
산(山)이 아닌 평야(平野)로만 되어 있다.
지관(地官)들은 그 점(點)을 지적(指摘)하며, "만약(萬若) 건지산(乾止山)과 가련산(可連山) 사이에 평야(平野)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전주(全州)고을의 기맥(氣脈)이 밖으로 새어나가,
전주(全州) 고을은 언젠가는 쇠멸하게
될 거다."는 풍수설을 오랜 옛날부터
강력(强力)히 고집(固執)해 왔었다.
이러한 지관(地官)들의 주장(主張)으로
뒷날 건지산(乾止山)과 가련산(可連山) 사이에 높은 둑을 쌓아 올리고,
둑 안에 있는 평야(平野)에 물을 가둬 둠으로
오늘날의 “덕진호(德津湖)”가 된 것이다.
이렇게 육지(陸地)에 커다란
인공(人工) 호수(湖水)가 만들어지고 보니,
주변(周邊)의 풍치(風致)를
아름답게 꾸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호숫가에
정자(亭子)를 새로 지어 놓았는데,
그 정자(亭子)가
바로 오늘날 풍월정(風月亭)이다.
덕진호(德津湖)에
풍월정(風月亭)까지 만들어지자,
어떤 이름 모를 풍월객(風月客)이
풍월정(風月亭)에다 다음과 같은
풍월시(風月詩)를 한 수 써 걸어 놓았다.
일망심연 영취공 (一望深淵映翠空)
◎ 깊은 늪 바라보니 푸른 하늘이 비치네 ◎
고래개착 기인공 (古來開鑿幾人功)
◎이 연못을 파는데 품이 얼마나 들었을까?◎
장연수리 롱추월 (杖烟數里籠秋月)
◎ 길게 뻗은 연기 속에 가을 달이 잠기고 ◎
어적일성 횡만풍 (漁笛一聲橫晩風)
◎ 어부의 피리 소리에 늦바람 불어온다. ◎
전주(全州) 고을에 덕진호(德津湖)와
풍월정(風月亭)이라는 새로운 볼거리가 생기자,
전국(全國) 각지(各地)에서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전주(全州) 고을이
더욱 번창(繁昌)하게 되었고
“덕진호(德津湖)에서 용(龍)이 하늘에 올랐다.”
라는 풍설(風說)도 떠돌게 되었다.
중종(中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유순(柳洵)은 덕진호(德津湖)에서 용(龍)이
올랐다는 소문(所聞)을 듣고
일부러 구경을 왔었다.
그리하여 덕진호(德津湖)에 걸려 있는
시(詩)의 운자(韻字)를 따서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걸기도 하였다.
일홍징철 영허공 (一泓澄澈映虛空)
◎ 맑고 깊은 연못 속에 하늘이 비치고 ◎
축덕잉수 제물공 (蓄德仍收濟物功)
◎ 덕을 쌓아 세상을 고르게 해 주도다. ◎
시처진용 여불기 (是處眞龍如不起)
◎ 여기가 바로 용이 오른 곳이 아니라면 ◎
세간하지 멱뇌풍 (世間何地覓雷風)
◎ 사람들은 어디서 번개를 보았으리오. ◎
덕진호(德津湖)에서 정말로
용(龍)이 올랐는지 어쩐지
그것은 누구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전주(全州) 고을이 갈수록
번창(繁昌)하는 것은 “덕진호(德津湖)”라는
인공(人工) 호수(湖水) 덕택(德澤)인 것은
확실(確實)하다고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생각해 보았다.
● 방랑시인 김삿갓 2부-(148) ●
☆ 처량한 신세의 김삿갓. ☆
전주(全州)를 돌아본 김삿갓은
남원(南原)으로 발길을 돌렸다.
성춘향(成春香)과 이몽룡(李夢龍)의
설화(說話)가 서려 있는 광한루(廣寒樓)와
오작교(烏鵲橋) 등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남원(南原)은 지리산(智異山) 기슭에 자리한곳인지라 전주(全州)에서 남원(南原)으로가는 길은 적막(寂寞)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도 가도 인가(人家)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김삿갓은
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신세(身世)인지라
인가(人家)가 없는 것처럼 딱한 일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날이 몸이 불편(不便)해 오는 데다
밥조차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니
길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밥 한 그릇 얻어먹으려고
뱃속에서 울려오는 쪼르륵 소리를 들어가며
진종일(盡終日) 인가(人家)를 찾아
헤맨 일도 있었다.
그래도
사람 사는 집은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풀뿌리를 캐어 먹기도 하고,
솔잎을 씹어먹어 보기도 해보았으나
그런 일이 며칠씩 이어지니
기진맥진(氣盡脈盡) 다리를 가눌 수가 없었다.
[도승(道僧)들은 흔히 생식(生食)한다는데
나는 꼭 밥을 먹어야만 살아갈 것 같으니
죽는 날까지 거지 신세(身世)를 면(免)할 수가 없는 것이 나의 팔자(八字)인가 보구나.]
하는 생각에 서글픈 심정(心情)마저 들었다.
(내가 이러다가 굶어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인가(人家)를 찾는 데 지쳐 맥없이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하늘은 맑게 개고
무심(無心)한 새들은 아름답게 우짖고 있었다.
배가 하도 고파 몸을 가눌 수가 없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恐怖)는
별로(別-)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한번은 죽어야 할 운명(運命)이기에
이왕(已往)이면 잠자듯
조용하게 죽었으면 싶었다.
기운(氣運)이 탈진(脫盡)한 김삿갓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누워
쓸쓸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김삿갓은 정신(精神)이
혼미(昏迷)해짐을 느끼는 순간(瞬間)
자기(自己)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이윽고, 얼마나 잤는지 몰라도
누군가 몸을 흔들어 깨웠다
"아저씨! 날이 저물어 오는데
무슨 잠을 이렇게나 자고 있어요?“
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김삿갓은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제야 알고 보니, 자기를 깨운 사람은
열두세 살쯤 먹어 보이는
나무꾼 소년(少年)이었다.
"네가 나를 깨웠냐?“
"날이 저물어 오는데 아저씨는 무슨 잠을
그렇게도 정신(精神)없이 자고 있어요.“
어둡기 전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일러 주는 말이다.
"깨워 줘서 고맙다. 네 덕택(德澤)에
내가 잠시(暫時) 죽었다가 살아났구나."
김삿갓은
머슴아이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 나서,
"이 애야! 내가 지금 배가 고파 죽겠는데
나를 너희 집에 데리고 가서 밥 좀 먹여
줄 수 없겠냐?"하고 물어보았다.
한평생 문전걸식(門前乞食)을 해오던
습성(習性)이 무심결(無心-)에 드러났다.
김삿갓의 구걸(求乞)하는 말을 듣고,
소년(少年)은 일순간(一瞬間)
어리둥절 해하는 표정(表情)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以內)
예사(例事)롭지 않게 대답(對答)했다.
"배가 고프면 우리 집에 가세요.
우리 집도 밥은 없어요.
그렇지만 감자(甘藷)는 얼마든지 있어요.
감자(甘藷)라도 괜찮겠지요?"
김삿갓은
소년(少年)의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굶어 죽을 판인데 감자(甘藷)면 어떠냐!
하늘이 나를 살려 주시려고
너를 일부러 보내 주셨구나."
"아저씨는 우스개 말씀도 잘도 하시네요.
내가 뭐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인 줄 아세요?"
김삿갓은
소년(少年)의 말을 듣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아느냐? 죽을 사람을 살려 주면 그 사람은
하늘에서 내려보낸 사람과 마찬가지 아니냐?
안 그래? 허! 허! 허!"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고마워요. 아무튼지
우리 집에 감자(甘藷)는 얼마든지 많으니까
시장 하시거든 빨리 가세요."
김삿갓은 염치불구(廉恥不拘)하고
소년(小年)을 따라나섰다.
소년(少年)의 집은 고개 넘어
산골짜기에 있는 오막살이였다.
50가량 되어 보이는 두 내외(內外)가
어린 아들과 함께 숯을 구워 먹고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들 내외(內外)는
인정(人情)이 어찌나 많은지
아들로부터 자세(仔細)한 얘기를 듣고 나더니,
"쯧~ 쯔~ 쯔! 이틀씩이나 굶으셨다면
배가 얼마나 고프셨겠소.
감자(甘藷)가 입에 맞으실지는 모르지만,
감자(甘藷)라면 얼마든지 많으니까
마음 놓고 잡수세요"하고 말하며,
삶은 감자(甘藷)를 한 소쿠리나 갖다 주었다.
김삿갓은 평소에 감자(甘藷)를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갈(飢渴)이 감식(甘食)이라고
이날은 감자(甘藷) 맛이 꿀맛처럼 달았다.
주인(主人)은 김삿갓이 감자(甘藷)를
탐스럽게 먹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마누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마누라.
점잖은 양반(兩班)한테 통감자(-甘藷)만
대접(待接)하기가 민망(憫惘)스러우니,
내일 아침에는 감자(甘藷)로 국수도 만들고
전병(煎餠)도 좀 부쳐 드리도록 하오.
그렇게 해드리면 별식(別食) 삼아
맛나게 자실 것 아니오?"
실로 고맙기 그지없는 마음씨였다.
이날 밤 주인(主人) 내외(內外)와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기(自己)도 모르는 사이에 정(情)이 깊어져 그 집을 떠나고 싶지 않은 생각조차 들었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그 집에서 열흘 동안이나 묵다가,
열하루째 되는 날에야
남원(南原)을 향(向)해 떠났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은
돈보다도 역시(亦是) 인정(仁情)이었다.
감자는 1824년~1825년(순조 24~25년)경에 조선에서 산삼(山蔘)을 찾기 위해 숨어들어온 청나라 사람들이 식량으로 몰래 경작하면서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와 같으며 사전(辭典)에서도 검색(檢索)이 되지 않으나 “감저(甘藷)”가 즉(卽) “감자”의
원말이라서 한자(漢字)를 병기(倂記) 했으며
대표적인 구황작물(救荒作物) 중 하나에 속함.
● 방랑시인 김삿갓 2부-(149) ●
☆ 남원(南原) 광한루(廣寒樓)에서 ☆
김삿갓이 남원(南原) 고을 광한루(廣寒樓)에 닿았을 때는, 삼복(三伏)더위가
한창 기승(氣勝)을 부릴 때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
모두 들 광한루(廣寒樓)로 모여들었다.
또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여기저기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세월(歲月) 가는 줄 모르고
질탕(跌宕)하게 놀고 있었다.
광한루(廣寒樓)는 그 옛날
성춘향(成春香)과 이몽룡(李夢龍)이
사랑을 속삭이던 본(本)고장인지라
어디에서나 들려오는 노래는
사랑 타령이 아니면 십장가(十杖歌)뿐 이었다.
이렇게 광한루(廣寒樓) 주변(周邊)은
한량(閑良)들의 놀이터가 돼 있어서,
김삿갓은 어디를 가거나 술은
공짜로 얻어 마실 수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한 해 여름을
태평세월(太平歲月)로 보내기에는
안성(安城)맞춤이었다.
김삿갓은 술을 공짜로 얻어먹는 대신(代身)에 술좌석(-座席)에 흥(興)을 잘 돋워주어 누구도 싫어하지 않았다.
더구나 시(詩)를 좋아하는 늙은 선비들은
김삿갓과 한 번 어울려 보고 나서부터는
그를 유난히 좋아하게 되었는데
어쩌다 그가 보이지 않으면
"삿갓 친구(親舊)가 오늘은 어디로 갔을까?
그 친구(親舊)가 있어야만
술맛이 제대로 나는데"하고
김삿갓을 일부러 찾아 나설
정도(程度)로 정답게 되어 버렸다.
그 덕택(德澤)에 김삿갓은 광한루(廣寒樓)에서 시(詩)를 여러 편(篇) 읊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한 편(篇)을 소개(紹介)하면,
남국풍광 화차루 (南國風光畵此樓)
◎ 남쪽 나라에서도 풍광 좋은 광한루는 ◎
용성지하 작교두 (龍城之下鵲橋頭)
◎ 용성 고을 오작교 바로 이웃에 있네. ◎
강공급우 무단과 (江空急雨無端過)
◎ 마른 강에 소나기 퍼붓고 지나가니 ◎
야윤여운 불긍수 (野潤餘雲不肯收)
◎ 들에는 물이 흠뻑 뭉게구름 뭉갠다. ◎
천리축혜 고객도 (千里筑鞋孤客到)
◎ 머나먼 천릿길을 외롭게 찾아드니 ◎
사시가고 중선유 (四時笳鼓衆仙遊)
◎ 신선들은 사시장철 장구 치며 노는구나 ◎
은하일맥 연봉도 (銀河一脈連蓬島)
◎ 은하와 선경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
미필영구 입해구 (未必靈區入海求)
◎구태여 바다의 용궁은 찾아 무엇 하리오.◎
김삿갓은 광한루(廣寒樓)에서
한 해 여름을 보내는 동안
술도 많이 마셨고, 시(詩)도 많이 읊었지만
남의 시(詩)도 많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유독(惟獨) 특별(特別)한 시(詩)는, 계화(桂花)라는 60이 다 된 노기(老妓)가 들려준 “사모(思慕)”라는 시(詩)였다.
어느 날 김삿갓은 노인(老人)들의
시회(詩會)에 참석(參席)한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동석(同席)한
계화(桂花)라는 노기(老妓)는
다음과 같은 시(詩)를 들려주었다.
[ 사모(思慕)/계화(桂花) ]
직파빙사 독상루 (織罷氷紗獨上樓)
◎ 고운 비단 짜다 말고 다락에 오르니 ◎
수정염외 계화추 (水晶簾外桂花秋)
◎ 수정발 저편에 계수나무꽃 피어있네 ◎
우랑일거 무소식 (牛郎一去無消息)
◎ 정든 님 떠나신 뒤 소식조차 끊어져 ◎
오작교변 야수수 (烏鵲橋邊夜愁愁)
◎ 오작교 주변에는 밤마다 수심이오. ◎
김삿갓은 60이 다 된 여인(女人)이
그렇게도 애절(哀切)한 시(詩)를 지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 시(詩)는 남의 것을 자네가 지은 것이라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가?
정든 임이 떠난 지가 몇 해나 되었지?"
노기(老妓)는 거짓말이
탄로(綻露)라도 난 듯 얼굴을 붉히더니,
"임이 떠나신 지는 이미 30년(年)이 넘었다오.
그러나 아무리 세월(歲月)이 많이 흘렀기로
그게 무슨 상관(相關)이에요.
나에게는 어제 일만 같은걸요."
김삿갓은 그 대답(對答)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허 어!
30년 전(前)의 작별(作別)이 어제 일만 같다?
허 참! 남원(南原) 여자(女子)들은
춘향(春香)을 닮았는가?"
"그러게요.
저의 절개(節槪)는 춘향(春香)이 같건만
떠난 임은 이(李) 도령(道令) 같지 못해
30년(年)을 눈물로 보내고 있다오."
"여보게! 말 좀 똑똑히 해보게.
도대체 자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임은
어딜 갔기에 30년(年)이 넘도록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단 말인가?"
"가기는 어디를 갔겠어요.
한양(漢陽)에 가셨지요.“
"허 어! 그 옛날 한양(漢陽)에
가신 임[이(李) 도령(道令)]은 10년(年) 뒤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춘향(春香)을 찾아왔는데,
자네의 임은 30년(年)이 넘도록
여태까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단 말인가?"
"누가 알아요, 내 임도 이(李) 도령(道令)처럼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오늘이라도 나를 찾아오지 말라는 법(法)은 없지 않아요?
그 양반(兩班)이 떠나가실 때 내게 한
철석(鐵石)같던 언약(言約)을
나는 아직도 굳게 믿고 있는걸요."
30년(年) 전(前)의 언약(言約)을
60이 다 된 지금(只今)까지
철석(鐵石)같이 믿고 있다면,
그것은 아름답다기보다도 오히려
어리석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그래서 김삿갓은 넌지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여보게! 신언은 불미(信言不美)요,
미언은 불신(美言不信)이란 말이 있다네.
자네는 옛 님의 미언(美言)을
너무 믿고 있는 게 아닌가?“
김삿갓의 말에 대해,
노기(老妓)는 정색(正色)을 하며 대꾸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으면
누구의 말을 믿고 살아야 해요?"
그러자 김삿갓은
농담(弄談) 비슷이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믿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네.
그러나 애인(愛人)의 말을 믿는 데도
한계(限界)는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만약(萬若) 옛날 애인(愛人)이
오늘이라도 찾아온다고 가상(假想)해 보세.
그동안 자네는 주름살투성이의
할머니가 되어 버렸는데,
옛날 애인(愛人)이 그래도 자네를
옛날처럼 사랑해 줄 것 같은가?"
그 소리에
좌중(座中)에는 폭소(爆笑)가 터졌다.
그러나 노기(老妓)는 웃기는커녕
별안간(瞥眼間) 울상이 되어 버렸다.
김삿갓은 농담(弄談)이 지나쳤다 싶어,
너스레 떨려고 말머리를 엉뚱한 데로 돌렸다.
"여보게! 너무 심각(深刻)하게 생각할 것 없네.
무슨 일이든 심각(深刻)하게 생각하기
시작(始作)하면 병(病)이 생기는 법(法)이야.
자네는 애인(愛人)이
한양(漢陽)에 가셨다고 했는데
한양(漢陽)에는 워낙 미인(美人)이 많아
지금쯤은 자네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걸세."
노기(老妓)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분개(憤慨)하는 빛을 보였다.
"그러면 30년(年) 동안이나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기다려 온
저는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이 사람아! 10년(年)이면
강산(江山)도 변(變)한다는데,
자네 마음이 30년(年)이 되도록
조금도 변(變)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異常)한 일이 아닌가?"
"저는 그 양반(兩班)을
진심(眞心)으로 사랑했거든요.
진심(眞心)으로 사랑했으니까
마음이 변(變)할 수가 없지 않아요."
"자네가 아무리 그 사람을 좋아했기로,
그 사람이 자네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소용(所用)없는 일이 아닌가?"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양반(兩班)은
한양(漢陽)으로 떠나가실 때 저한테
철석(鐵石)같은 약속(約束)을 해 주신걸요."
"무슨 약속(約束)을
어떻게 철석(鐵石)같이 했단 말인가?"
"한양(漢陽)에 올라가거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사 놓고 저를 한양(漢陽)으로
불러올려 갈 테니, 자기(自己)를 믿고
기다려 달라고 말씀하신걸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으흠!
자네는 그처럼 허황(虛荒)된 약속(約束)을
아직도 믿어 오고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자네가 30년(年) 동안이나
기다려 온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 준다고 약속(約束)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군 그래!
자네가 그런 마음보를 가지고
그 사람을 대해 왔으니,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날 리가 없지 않은가?"
김삿갓이 마지막에는
이렇게 노골적(露骨的)으로 쏘아대니,
노기(老妓) 계화(桂花)는 아무 대답(對答)도 못 하고 얼굴을 수그린 채 울먹이기만 하였다.
남원(南原) 광한루(廣寒樓)에서
꼬박 한 해 여름을 보낸 김삿갓은
계절(季節)이 가을철로 접어들자,
지리산(智異山)을 넘어 따듯한 남쪽으로
길을 잡아 또다시 방랑(放浪)의 길에 올랐다.
★ 김삿갓이 노기 계화에게 한 말
신언불미(信言不美)
◎ 성실(誠實)한 말은 꾸밈이 없고, ◎
미언불신(美言不信)
◎ 듣기 좋은 말은 믿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