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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21 / 하늘 백성답게 (빌4:4-7)
저는 종종 이런 질문을 받곤 합니다. “우리는 과연 성경 말씀대로 살 수 있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 말씀이 현실 속에서 실천이 가능하던가요?
오늘 본문만 봐도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합니다. 또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항상 기뻐하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삶!’
사람이 이 말씀대로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일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신명기 28장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 대한 축복의 약속들이 쭉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부러 축복을 못 받게 하려거나 축복을 주지 않으려고 하시지는 않는 한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은 우리가 충분히 순종할만한 것들이라는 말일 텐데, 그럼 우리가 말씀을 들은 대로 살고, 주신 말씀대로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전엔 ‘무조건 순종하라.’고 했습니다만, 아닙니다. 그래선 온전한 순종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있으려면 우린 ‘순종을 위한 힌트’를 알아야만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이미 주신 말씀들 속에서 힌트를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어느 한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면 그 앞뒤 관계를 살펴서 먼저 순종을 위한 힌트부터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순종을 위한 힌트를 알게 되면 그때부터 우린 비로소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수 있고 또한 말씀을 들은 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제시된 두 가지 말씀 즉 항상 기뻐하는 것과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것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본문에 나타나 있는 순종을 위한 힌트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순종을 위한 힌트는 무엇일까요?
본문이 시작되는 첫 단어인 “주 안에서”라는 말에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내내 항상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살면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유는?
첫째로 주 안에서라는 말은 ‘하나님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을 보면 예수님에 관해 설명할 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는 그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면 우린 하늘 백성이요,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늘에서나 가능한 일들을 이 땅에서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걸 일컬어 세상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하면 기적이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당연한 축복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려면 우린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내게도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임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턴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말은 인간 편에서 볼 때는 하나님 이외의 것들 즉 모든 피조물과 이 세상에는 무능함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동의하시나요? 시련과 괴롬 앞에서 나의 무능함이 곧 나의 고민이요. 괴롬 아닙니까? 사람과 문제 앞에서 나의 무능함이 곧 나의 염려와 근심 아닌가요? 이렇게 세상이 주는 이런저런 사탄의 시험 앞에서 나의 무능함이 곧 나의 한숨이고 낙심이 아니던가 말입니다.
이럴 때 주 안에서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면 무능한 나에게도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권세가 발동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려면 이 사실이 믿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나의 무능함을 당신의 전능함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전능하신 창조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또한 마찬가집니다. 창조 전의 세상 형편에 대해서 성경은 ‘혼돈하고 공허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훈련 때 배우셨듯이 혼돈과 공허라는 말은 원어로는 토후와 보후입니다. 토후란 영어로 케이오를 뜻하는 말로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할 지경을 말하는 것이며, 보후란 텅 빈 것 즉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부터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형편과 상황 속에서부터 나를 위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하나하나씩 발동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막막한 인생에서 살길을 열어 주실뿐만 아니라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도 하나씩 하나씩 있게 하시고 공급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축복이 있는 자리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주안에서’입니다.
결국 우리가 주 안에 있기만 하면 없는 것이 있게 되니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이고, 안 되던 것이 되게 되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안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공식처럼 외워두세요. “인생 빼기 하나님은 제로(Nothing)다.”
누구든 삶에서 하나님이 빠지면 그 인생은 무능력해집니다.
창세기에서도 사탄은 하나님이 안 계실 때 사람에게 접근했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랬기에 사탄은 그때의 작전을 오늘날에도 여전히 행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를 노리자!”
그 결과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면 누구든 이 땅에서 사탄에 대해서는 무능한 자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와 여러분에게 복음 즉 좋은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이전에 나에게 하나님이 없었을 땐 어땠는지 몰라도 이제 하나님을 믿는 우린 예수라는 이름만 벙긋해도 사탄이 쫓겨 가고 마귀가 물러가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까지 노력했지만 안 된 게 있다고요? 원했어도 없는 게 있다고요? 여직까지도 문제와 환란과 시험 앞에서 무능하기만 했다고요? 그렇다면 이젠 그 모든 것들을 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시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6절 말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그리하면 어찌 된다고 했습니까?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믿음의 첫 출발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평강이 자리 잡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화가 나고, 근심 걱정이 되더라도, 당장이 힘들고, 앞날이 불안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역사하심이 내게도 있을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둘째로 주 안에서라는 말은 ‘말씀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면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그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의 ‘말씀’은 단지 성경이라는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말하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평소 여러분은 말씀을 믿으시지요? 그런데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계시는지요?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말로만 믿는다고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이 그 말씀대로 해 주실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린 그저 문자로만의 말씀을 읽고 아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말씀이신 예수님이 그 말씀대로 해 주실 줄을 믿는 데까지 나아가는 믿음이어야만 내가 읽은 그 말씀이 내게도 현실이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은 말씀을 들을 때면 어떤 심정으로 그 말씀을 받으셨습니까?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믿는 자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이제부터는 어떤 말씀이든 그 말씀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고, 네게 그 말씀대로 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받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자면 예전에 병원 목회를 할 당시에 저는 병실을 심방할 때면 늘 말라기 4장 2절 말씀 곧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를 읽고 묵상한 후에 심방을 출발하곤 했습니다.
말씀이 누구를 위한 말씀이라 했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고 믿는 자를 위해 주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기에 중병으로 누워있는 형편일지라도 누군가 이 말씀을 붙잡고 “나도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뛸 줄로 믿습니다.”라고 믿을 때면 하나님이 그를 질병 중에서도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리했던 것입니다.
말씀의 문자적인 내용 즉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고 못 뛰고는 다음 문젭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하나님이 내게도 말씀대로 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에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믿고 기도하고 선포하며 말씀대로 되기를 기다리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이고, 우리에게서 그런 믿음을 보실 때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말씀대로 되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굳게 믿지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에는 좀 조심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외람된 표현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도 약점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약점이 있다?’ ‘예!’ 하나님의 약점은 바로 하나님이 스스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것은 저와 여러분과 맺으신 언약이요, 계약서입니다. 따라서 식언치 아니하신다고 하신 하나님은 스스로는 절대로 그 계약을 파계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걸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요 신실함이라고 하지만, 이것을 저의 신앙 고백적인 입장으로 표현하자니 하나님의 약점이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시기에 기꺼이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셔서 말씀을 믿는 자들에게는 매사를 말씀대로 되게 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언제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은 말씀대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 역사해 주실 수밖에 없으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기만 하면 우린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대신 기대와 소망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내게도 이루어질 것을 기뻐하며 응답하실 날만을 기대하며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주 안에서라는 말은 ‘십자가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초기 바울의 믿음은 철저히 율법으로 만들어진 믿음이었습니다. 그런 율법적 열심을 가졌었기에 예수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교회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당시 바울이 만난 예수님은 그들이 죽인 십자가의 주님이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주님을 만남으로써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리에서 예수님을 전파하는 자리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에게서의 주안에서라는 말은 십자가 안에서라는 뜻이 됩니다.
실제로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누가 되었든 십자가 안에 들어온 자는 마귀로부터 풀려나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주안에서의 은혜입니다. 그 결과 마귀 사탄으로부터 받았던 시험과 환란과 문제와 어려움들은 물러가고 예수님이 주시는 승리와 기쁨과 강건함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처럼 주 안에 있는 자들 즉 십자가 안에 있는 자들은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을 맛보는 자들이며,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이 바로 그 주인공 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마지막으로 제기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십자가 안에서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 방법이 있겠지마는 본문을 통해 알게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선은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기도 제목들을 여러분의 십자가로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흔히 사람들은 힘들거나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길 때면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하는 건 잘 하는 거지만 기도하면서도 기도의 목적을 응답에만 두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젠 바꿔야 합니다. 기도의 목적이 응답에만 있게 되면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믿고 기도해도 응답 유무로 인해 쉬이 낙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하실 때면 늘 ‘주안에서’ 하려 하세요. 다시 말해 우린 ‘십자가 안에서’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인즉 기도 응답에만 시선을 두지 말고 우선은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형편을 십자가로 여겨, 내게도 그런 십자가들 때문에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잘 되고 좋은 일로 간구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힘들고 어렵기에 기도 제목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들을 십자가로 여기고 기도할 때 우리가 기도하는 그 자체가 이미 십자가를 감당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역으로 생각하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지 않고 사는 것과 같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우린 내 기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 십자가를 지는 순종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여러분의 기도 제목을 붙들고 기도하세요. 십자가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만 있다면 그 십자가는 오히려 승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앞서 하나님께조차도 약점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하물며 우린 말해 뭐하겠습니까?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약점이 다 나쁘기만 할까요? 아닙니다. 주안에서는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약점 때문에 잘된 일은 예수님을 더욱더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물이 포도주로 바뀐 가나 혼인 잔치 이야기가 나오는데, 결론을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믿어야 합니다. 단,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이 아니라, 기적을 창조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렇게 믿으세요. 당장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해 주시면 못할 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것이 믿음이며, 이런 믿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 모두가 하늘 백성답게 항상 기뻐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늘 백성 된 자들이니 이제 후로는 이 땅에서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으며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