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 한 잔 더 드세요
김자림(金玆林)
여보.
지금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난로는 벌겋게 타고 있어 우리들의 고향인 북국의 정취가 좀은 느껴지는 듯한 밤이군요. 이 밤에 이렇게 서재에 단둘이 마주앉아 보기도 퍽 오랜만인가 봐요. 홍차라도 한 잔 마실까요? 물주전자를 난로에 올려 놓읍시다. 그리고 우리 서로 흐뭇한 얘기라도 나누어 보실까요? 정취 어린 이런 밤에 어울리는 정담 같은 것 말에요. 아이들은 모두 잠든 것 같아요.
여보. 그 동안 저는 너무도 많은 시간을 저희 일에만 바쳐왔나 봐요. 더욱이 지난 한 달 동안은 천여 매나 되는 연속방송극을 일사천리로 써 내놓느라 주부로서의 할 일을 거의 내동댕이치다시피 하여 온 것이 적이 죄송하기만 하군요. 그것이 꽤나 불만스러우셨죠? 그거 진정이셔요? 그러심 더 미안하지 않아요.
글 쓰는 여자를 아내로 둔 것을 좀은 후회하면서도 그것을 내색 안 하시는 당신, 역시 당신께서도 글을 쓰시기 때문에 저를 그토록 이해하게 되신 것일까요? 사실 말이지 저는 낙제점을 면치 못하는 아내인데도 너무도 너그러우시기만 한 당신, 아직 넥타이도 한 번 매어 드리지 못한 무뚝뚝하기만 한 저, 왜 그런지 그런 게 간지러워 할 수가 없겠죠. 그런데도 왜 도무지 탓하지 않으시는 거죠? 네? 뭐라고요? 제발 안 매어 주기 바란다고요. 어째서요? 어머, 타이를 매다가 신경질이 폭발하면 큰일이라고요? 이거 은근히 일침을 놓으시는 군요. 이후 자중하겠습니다. 저런, 물이 끓는군요. 자, 우리 차를 마십시다요. 설탕을 몇 개 넣어드릴까요? 네? 하나 더 넣으라고요. 당신 피곤하신 모양이군요. 두 시간이나 속강(續講)을 하셨기 때문이라구요. 여보, 그러시면 포도주 좀 마셔 보시지 그래요. 금년 포도주는 아주 성공이에요.
여보, 그런 한가한 기분, 가끔은 정신 위생상 좋을 거에요. 어머, 그거 무슨 책을 읽고 계셨어요? 프로이트의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정신병리]를 재독하신다고요. 인간 심리를 연구하는 데 많이 도움이 되더군요.
네? 정신과학에 대한 얘기를 좀 해 주시겠다고요? 가만, 포도주 한 잔 따라 드릴게 마시면서, 그래야 피곤도 물리실 테니. 네네. 당신 얘기 듣고 있대두요. 불란서의 사상가, 알랭의 연대 말이죠.
1868~1952년 맞았죠? 우주의 무한성과 영원한 침묵에 접했을 때 공포를 느낀다고 한 파스칼의 말을 알랭이 뭐라고 했냐고요? 감기 걸린 사상이라고 했다면서요. 인간이 자기 몸이 허약했을 땐 그 사상조차도 건강을 잃는다는 얘기.
그것 참 그런가 봐요. 인간의 정신력이란 강하디강하면서도 한편 연취(軟脆)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참, 사상학(四象學)에 대해서도 좀 얘기해 주세요. 네? 오늘은 우선 소양(少陽)ㆍ태양(太陽)ㆍ소음(少陰)ㆍ태음(太陰)을 일컬어 사상(四象)이라고 함을 알아 두라고요? 그리고 그 근본은 태극(太極)에서 나온 거라고요? 태극? 오묘한 신비가 그 속에 많이 고여 있는 것 같군요. 저는 점점 동양적인 신비에 관심이 쏠려 가겠죠. 네? 사서삼경을 통독하라고요. 여보 한 잔 더 하세요. 당신 얼굴이 한결 보기 좋아요. 자 어서요.
그런데 당신 요새도 왜 독서에만 전념하시는 거에요? 저를 만나면 모두들 당신께서 시(詩)를 활발히 쓰지 않는다고 궁금해들 하는데.
여보, 당신 생각나시죠? 우리 약혼 때 모 시인이 함축성 있게 해 주었던 축사 아닌 그 축사, 너무 행복하면 시(詩)를 못 쓰게 된다는 조오크 비슷한 이를테면 가시 돋힌 그 말 말예요. 사실 당신께서는 너무도 생활에 취해 있나 봐요. 생활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나 봐요.
어머 당신 주무시는 것 아네요? 피곤하시나 봐, 이것 저것이…….
|작법공부|
얼핏 서간문체로 보이는 이 작품의 문장세계는 서간체가 아닌 남편과 마주 앉아서 나누는 대화(독자는 실재하지 않는 남편과의 대면으로 읽을 수도 있다)를 독백체 형식의 문장으로 변형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 자체가 또 하나의 새로운 창작문예수필 작법의 창조적 실험이 된다.
이 작품이 무엇을 형상화하고 있느냐, 굳이 답해야 한다면 부부간의 정담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의 창작은 위에서 말한 대로 부부간의 정담을 독백체 문장 형식화 하고 있다는 그 점 만으로도 족한 창작이 되고 있다.(만약에 실재하지 않는 남편과의 대면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 문장을 괄호 안에 넣는 까닭은 독자에 따라서는 그렇게도 읽을 수 있지만 그 점에 대한 작법상의 '암시'가 없기 때문이다.)
남편과 마주 앉아 나누고 있는 대화를 독백체 문장형식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이 점이 이 작품의 <鳥자 치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