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학사대 최치원 나무
가야산 해인사에 들렀으나, 다시 볼 수 없는 나무가 있으니 이 또한 세월의 무상함이다. 어린 시절 해인사에 다녀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은 거라면 아마도 팔만대장경과 최치원의 지팡이 나무일 것이다. 어쩌면 둘 다 신비로움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첫 신비로움인 팔만대장경의 판목은 주로 산벚나무와 후박나무이다. 이를 바닷물에 담갔다 말리고 소금물에 찌고 그늘에 말리기를 반복했다. 또 벌레나 썩는 걸 방지하기 위해 옻칠을 했다. 3년여가 지나 똑같은 크기로 잘라 대패질로 결을 다듬었다. 원고를 써서 목판에 뒤집어 붙이고 한 자 한 자 조심스럽게 새겼다. 경판의 양쪽에 두꺼운 테두리를 대고 네 귀퉁이에 다시 구리판을 대었다. 다음은 보관이다. 먼저 계절에 따른 가야산 바람에 따라 북쪽과 남쪽의 창의 크기, 창문의 위아래 칸의 크기 배열도 다르게 했다. 또 땅을 깊게 파서 숯, 소금, 모래 등을 넣어 습도 조절을 했다. 이런 정성이 760년 넘게 대장경판을 보존케 하고 있다.
또 하나 신비로움은 학사대 최치원의 지팡이 나무이다. 학사대는 최치원이 한림학사를 지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최치원이 말년에 친형인 현준 스님이 있는 해인사에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최치원은 제자들을 불러 자신이 머물던 암자 앞에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라’는 말을 남기고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사라졌다. 그 뒤 거꾸로 꽂힌 지팡이에서 새움이 터서 자랐기에 모두 이 전나무를 최치원의 ‘지팡이 나무’라고 불렀다.
실제로 다른 전나무와 달리 가지가 아래로 쳐진 듯했던 이 전나무는 2019년 태풍 링링에 의해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또 이 전나무는 숙종, 정조 때 최흥원이 쓴 ‘백불암집’의 기록에 의하면, 그 지팡이 나무 자리에 1757년경에 심은 손자뻘 후계목이다. 따라서 이번에도 다시 후계목을 심어 대를 이어가면 될 일이니, 너무 슬퍼할 일은 아니다.
‘삼국사기’에 최치원이 고려 왕건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최치원은 ‘계림(경주 소나무숲)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송악산)은 푸른 솔’이라 썼다. 당시 해인사의 화엄종장 희랑과 관혜는 서로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희랑은 왕건을 지지하고 관혜는 견훤을 지지했다. 이에 최치원은 희랑을 지지했고 시 6수를 지어주었다. 최치원은 희랑을 통해 왕건을 알았고, 새로운 나라 고려에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최치원의 역사관은 유교사관이었다. 그는 ‘제왕연대력’에서 신라왕의 명칭은 모두 야비하다며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을 왕으로 바꿨다. 또 ‘상태사시중장’에서는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가 되고 발해는 고구려 후예라고 했다. 이로 보아 당시가 통일신라가 아닌 남북국 시대로 이해하고, 붕괴 되는 신라 대신 새로운 나라가 설 것으로 알았다.
최치원은 불교에 관련한 글도 여럿 썼다. 그중 ‘석이정전’에서는 가락국 창건을 알 수 있으며 ‘석순응전’에서는 가락국 마지막을 알 수 있다. 여기 석이정전의 이정과 석순응전의 순응은 애장왕의 후궁 박 씨의 등창을 낫게 해주고 해인사를 창건한 스님이다. 최치원이 언제 신선이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마지막 글인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 말까지는 인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그의 신비를 표상하는 지팡이 나무는 후계목이 자라서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지팡이 나무의 지난 사진을 들여다보며 제사를 모시듯 2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