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기행
강 문 석
은은한 유채꽃 향기가 넘실댔다. 꽃은 단순노란색이 아닌 형광노란색이었다. 한반도에 봄이 가장 먼저 찾아드는 남쪽나라 제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살랑거리는 유채꽃은 청정한 대기가 만들어내는 아지랑이 속에서 화산섬 특유의 이국적인 풍광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다를 낀 도시에서 반세기나 살아온 사람 눈에도 이곳 자연은 경이롭고 신비스러웠다. 유채꽃 너머론 푸른 바다가 수평선으로 뻗었고 끼룩끼룩 갈매기들 날갯짓도 부산했다. 하늘을 수놓은 새하얀 뭉게구름은 잔잔한 해면에 얼굴을 비추어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뭍과 바다를 경계 짓는 해안엔 결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졌고 백사장 끝에선 경승지 성산일출봉이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는 제주의 동쪽 끝자락 섭지코지로 코지는 곶을 이르는 제주방언.
제주 친구 용준의 초대로 찾아가는 여행이라 난 평소의 패키지여행과는 다른 기대를 안고 집을 나섰다. 제주공항엔 우릴 초대한 용준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부부는 반가운 인사를 짧게 나눈 후 차에 올랐다. 용준의 차가 공항을 벗어나자 가장 먼저 이국적인 정취가 느껴지는 가로수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동남아에서나 볼 수 있는 야자수와 키는 별로 크지 않지만 잎이 싱싱한 가로수들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수는 육지의 그것들과는 사뭇 달라 제주여행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켜 주었다. 용준은 내가 가로수에 관심을 보이는 걸 알고는 왕벚나무와 후박나무 먼나무가 이곳 가로수의 절반을 넘는다고 했다.
흰색과 붉은색으로 피어 지금 눈앞에서 가로를 장식하고 있는 왕벚꽃도 그 크기로서 ‘임금 왕’이 붙은 이유를 말해주고 있었다. 해안도로를 접어들자 차창 밖으론 눈이 시리도록 쪽빛바다가 자주 나타났고 중간 중간 크고 작은 까만 화산석 현무암도 모습을 드러냈다. 용준도 나도 시간을 절약코자 서로 자세한 얘기는 차에서 나누자고 했지만 의례적인 몇 마디 인사가 끝나자 대화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내들이야 첫 대면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용준과 난 직장에서 한솥밥을 먹었는데도 헤어져 30년 넘는 세월이 흐르다보니 서로는 그만큼 서먹해졌던 것이다.
용준을 처음 만난 건 현직 때 직장의 연수원 교육에서였다. 그때 용준은 서른 중반이었고 난 마흔에 이르러 있었다. 신장은 내가 약간 컸지만 몸은 용준이 훨씬 단단했고 행동 또한 빨랐다. 재직하는 동안 직장에서 난 여러 과정 교육을 받았지만 섬나라 제주 친구를 교육장에서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숙소 2층 침대를 아래위로 나누어 사용하게 되어 우리는 마주앉을 기회가 많았다. 용준은 밝은 성격인데도 농이라곤 할 줄 몰랐고 성격 또한 까칠한 편이어서 주로 입을 닫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건네는 말은 흘려듣지 않았고 자신이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해선 따져가며 묻기까지 했었다.
강의가 끝나면 내가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자주 나가는 걸 보고 용준은 혹시 작가냐고 물었다. 그때 난 그에게 적당히 얼버무려도 좋을 대답을 너무 상세하게 떠들어대고는 바로 후회했었다. 군대생활 때 사진에 입문하게 된 얘기까지 털어놓은 건 내가 복무했던 미1군단사령부가 연수원 가까운 의정부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내 크래프트 숍엔 당시 국내시장엔 없었던 최신형 미제 사진인화장비가 있어서 피엑스에서 인화지만 구입하면 사진을 만들 수 있었다. 인화기는 내 구닥다리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시중보다 더 선명하게 만들어내는 요술쟁이였다.
그 바람에 코쟁이 병사들 중엔 귀국하면서 내가 만든 사진을 꺼내어 보이며 웃고 떠나는 친구도 있었다. 늘 파이프를 입에 물고 살았던 멋쟁이가 숍 매니저여서 난 그로부터 사진 촬영법을 익힐 수 있었다. 그때 연수생들 중에서도 용준처럼 내 카메라에 관심을 보인 몇몇은 교육기념으로 찍은 사진을 들고 떠났었다. 그렇게 나의 병영생활 추억담까지도 공유한 용준이지만 2주간 교육이 끝나자 헤어져야했고 서로를 까마득히 잊은 채 세월은 흘렀던 것이다.
연락이라곤 없던 용준이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는 부산에 나타났다. 그는 당장 내일 아들 결혼식을 해운대에서 올린다고 했었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미안함이라도 있었던지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잠시 흔들렸다. 그런 용준을 대하자 나도 같은 마음이 되었다. 예식장에서 신랑신부가 주례자 앞에 섰을 때 친구 아들인데도 난 신랑보다 부산의 신부에게 더 마음이 갔었다. 서로 완전히 잊을 만큼 세월이 흐른 용준을 새삼스레 부산에서 만나게 해준 신부였기 때문이다.
그날 결혼식은 짧은 시간에 끝났지만 용준을 다시 만난 감동은 진한 여운을 남겼다. 두 사람은 그동안 왜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세월만 죽였나하는 안타까운 눈빛까지 주고받았다. 이제 앞으로는 자주 만나야 한다면서 내가 제주로 찾아가겠노라고 했다. 예식이 끝났으니 용준은 제주로 돌아갈 것이고 아들 내외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서울에 살게 된다니 용준이 부산에 올 일은 없었다. 그때 난 이미 직장을 떠나온 뒤였고 용준은 아직도 현직이었다.
그날 용준에게 부산을 구경할 겸 하루 쉬어가라고 했으나 제주에도 기다리는 손님이 집에와 있다면서 돌아갔다. 그렇게 용준과 헤어졌고 난 예식장에서 카메라에 담은 사진과 동영상을 정성껏 편집해서 그에게 보냈다. 너무나 고마운 선물을 받았다며 용준은 전화로 흥분했고 연수원에서 날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는 말까지 했었다. 평소 말을 아끼는 친구가 잔치 뒤에 오늘은 낮술이라도 걸쳤나 싶었다. 그때 용준은 전화로만 끝나지 않고 감귤세트까지 택배로 보내왔었다.
공항을 출발한 두 부부가 섭지코지에 당도하자 초원에서 유유자적 풀을 뜯는 조랑말들의 목가적인 풍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림이나 영상을 통해서만 접하던 풍광을 직접 대하니 약간은 비현실적으로 비치기도 했다. 넓은 평원은 온통 유채꽃 물결이었다. 제주에서 계절의 정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철이 노란 유채꽃 피어나는 봄이라고 했다. 난 용준이 유채꽃 시즌에 맞춰 초대해준 것이 여간 고맙지 않았고 제주에서도 섭지코지 유채꽃을 으뜸으로 친다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는 신혼여행 성지였고 섭지코지는 신혼부부 사진촬영 전속무대였다고 한다. 그 무렵 결혼한 나도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꿈꾸었다가 항공료를 포함한 여행비를 아끼느라 포기했었다. 그랬던 내가 섭지코지를 직접 눈앞에 마주했으니 실로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도 신혼여행 미련이 아직도 남은 탓인지 세월이 반백 년이나 지났는데도 난 당시 신문이 알려주던 제주의 부끄러운 민얼굴도 기억하고 있었다.
유채꽃 사이로 예쁜 미소표정을 주문하며 카메라맨을 겸했던 택시기사가 신랑도 아직 제대로 손대지 않았을 신부의 몸을 더듬는다는 보도였다. 이제 신혼부부 대신 외국인 관광객이 그 자리를 차지하여 여기가 중국인지 일본인지 헷갈릴 정도라니 흐르는 세월은 또 앞으로 제주를 얼마나 바꿀는지 몰라 난 용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육지에선 항구도시 부산의 매력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섭지코지에 당도하고 보니 화산섬 특유의 이국적인 풍광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용준은 자신이 초대한 사람이 섭지코지에 만족하는 걸 보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난 일행을 벗어나서도 섭지코지 풍광을 여러 컷 카메라에 담았다. 카메라 렌즈는 아무리 밝아도 인간의 눈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말을 자주 들어온 터라 눈앞에 나타나는 비경을 갈무리하는데 소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식도락가가 눈앞의 맛난 음식을 외면 못하듯 난 섭지코지 풍광을 반복해서 찍은 뒤에야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용준은 섭지코지 투어를 끝내자 빤히 바라보이는 성산일출봉으로 우릴 인도했다. 제주10대 절경 중 첫째로 꼽혀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는 곳이다.
일출봉은 아름다운 경관과 뛰어난 학술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3년 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도 등재되었다고 한다. 우린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지만 오를수록 길은 좁아지면서 가팔라졌다. 화산섬 탄생 후 장구한 세월 만고풍상을 겪으며 만들어졌을 기암괴석들도 길옆으로 하나씩 나타났다. 일출봉은 제주에서도 중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라 정상에 오르면 한국말보다 중국말을 더 많이 듣게 된다고 미리 용준이 말했지만 우리는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난 제주의 새벽 해돋이 풍광으로 일출봉보다 섭지코지를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새벽 여명을 뚫고 동녘 수평선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이야 같지만 섭지코지엔 등대와 촛대바위가 있었다. 그러나 섭지코지 새벽출사 계획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용준에게 말하면 또 차를 몰겠다고 나설 것 같아 다음날 새벽 혼자서 용준 집을 살며시 빠져나와 택시에 올랐다. 따뜻한 남쪽나라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새벽 바닷가 공기엔 냉기가 서려 있었다. 카메라를 장착하는 삼각대도 얼음덩이 같았지만 일출작품에 대한 기대감으로 견뎠다.
수평선을 붉게 물들이며 기다리던 태양이 솟아올랐다. 해를 감싼 구름과 코앞의 등대와 촛대바위를 함께 넣어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명승지에서 이처럼 환상적인 구도를 만난 게 얼마만인가 싶어 가슴엔 환희가 일었다. 하지만 햇살이 퍼지는 그 짧은 순간에도 피사체 명암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에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검푸르던 여명의 바다는 안개가 서리자 서서히 연하게 푸른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가까워져야 하늘을 닮아 바다는 다시 푸른빛을 되찾을 터였다.
아들 결혼식이 맺어준 상봉 이후 부산에서 찾아간 나를 용준은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두 부부가 만나 둘러보는 제주의 구석구석은 패키지관광 때처럼 빠르게 섬을 돌며 특정 음식점과도 연계하여 여행객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 없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관광사가 이권을 노려 잡게 되는 코스에 들지 않은 제주에서도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곳만 찾아갔고 그 첫 번째가 섭지코지였다.
난 제주에서 용준을 만나기 전에도 무료함을 달래면서 제주의 비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두어 차례 단체여행으로 그곳을 찾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럿이 빠르게 돌다보니 카메라에 담고 싶은 풍광을 만나더라도 그것은 그림의 떡이었다. 부산과 비교하면 식대를 비롯한 생활물가도 비쌌고 인심 또한 후하지 못해 여행지로서 제주에 대해선 줄곧 실망해오던 터였다.
현직 때 직장에선 지역별 전력판매량을 비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공장시설이라곤 없는 제주가 늘 꼴찌를 차지했었다. 제주는 화산으로 생긴 척박한 땅이라 논농사도 지을 수 없는데다 오랜 동안 생산시설도 한일소주가 유일했었다. 당시 인구 50만 제주가 150만 충북보다 자도주인 소주가 더 많이 팔린다는 게 뉴스가 되기도 했었다. 자도주란 각 도별 소주를 말했고 전국주는 단연 진로였다.
제주 자도주 ‘한라산’이 이처럼 많이 팔리는 이유를 용준은 도민들의 애향심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때까지 술을 즐겨 마셨던 난 관광객 때문이란 걸 알고 있었다. 당시 하루 2만 명 관광객이 제주에서 일박을 하다 보니 평균 4만 명 주당들이 제주에 머무는 꼴이 되었던 것. 그 술꾼들로부터 술맛도 진로 참이슬보다 순하고 숙취도 적다는 평을 들었던 한라산 소주는 꾸준한 판매실적을 유지했었다.
그 무렵 제주 패키지여행 저녁식사 자리에서 옆자리 중년사내로부터 한라산 소주에 관한 흥미로운 얘길 들을 수 있었다. 몸집이 우람하고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그는 제주에서 만든 소주 중 ‘한라산물 순한소주’는 병뚜껑 안쪽에 손톱만한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면서 그걸 가져오라했다. 소주병을 받아들자 뚜껑을 따서 태극기를 보여주더니 10여 명 동석자를 향해 특유의 재담을 펼치기 시작했다. 먼저 술은 자기처럼 반드시 태극기가 위로 향하게 따라야 한다고 시범을 보였다.
만약 태극기를 아래나 옆으로 해서 따르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갈 수 있고, 이런 현장을 목격하고도 신고하지 않으면 불고지죄로 붙들려간다는 것. 그뿐 아니라 이 소주를 마시면서 다른 술이 더 맛있다고 말하면 찬양고무죄에 해당하고, 남들은 이 소주를 마시는데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앉았다가 그냥 슬며시 나가버리면 잠입탈출죄가 성립된다는 거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 소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혼자만 맥주나 백세주 같은 술을 마시면 소주참칭죄가 성립된다며 읊어대어 좌중을 웃겼었다.
제주도에 들어선 두 번째 생산시설은 내가 직장을 퇴직하던 1998년 준공된 삼다수 생수공장이었다. 지구 환경오염은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왔는데도 생수가 등장할 줄은 미처 몰랐던 나로선 저게 과연 몇 년이나 버틸까 했었다. 생수공장 광고는 제주도에 내린 빗물이 현무암층을 거치면서 화산암반에 걸러진 물을 지하 암반층에서 다시 끌어올려 생수를 만든다고 했었다. 출시 10년 만에 먹는 샘물 부분에서 50%가 넘는 점유율을 차지할 정도였으니 난 그때 세상을 보는 눈이 그만큼 모자랐던 셈이다.
이제는 국내를 넘어 중국과 일본 인도네시아 미국 홍콩 사이판까지 수출하고 있다니 난 지금도 삼다수 생수를 접할 때면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빗물이 암반층을 거치면서 걸러진다는 대목에서 난 중년 무렵 직장 산악회에서 올랐던 한라산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그때 산행대장으로부터 한라산에선 특별히 소낙비를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를 들었던 것. 갑자기 퍼붓는 한라산 게릴라성 폭우는 스콜까지 동반하는 경우가 많아 그런 악천후를 만나면 조난을 당하기 쉽다는 거였다.
하산하다가 뒤쪽에서 갑자기 물기둥 굴러오는 소리가 들린다면 무조건 능선지대로 빠르게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짧은 시간 퍼부은 폭우는 돌산을 스며들지 못하기 때문에 물기둥으로 굴러오는데 뒤를 돌아봤다간 오금이 저려 달아나지 못하고 꼼짝없이 화를 당한다는 것. 그래서 삼다수가 광고하는 암반 지하수와 게릴라성 폭우는 서로 상충되었던 것이다.
용준은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 중에서도 특별히 지역지리에 정통했다. 그가 전력회사 입사 전 택시를 몰았다니 손금 보듯 섬 전체를 훤히 꿰뚫고 있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공고 전기과를 나와 일당벌이나 진배없는 택시 핸들을 잡았다면 용준에게도 보릿고개는 피해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다 용준 아내까지 해녀 출신이라니 두 사람의 성장기가 떠올라 짠한 마음까지 들기도 했다.
용준 아내가 처녀 때의 해녀실력을 보여주는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서귀포 대정읍 용준의 고향 옛집에서 일박한 후 우린 썰물로 바닥이 드러난 앞바다로 나섰다. 물속에 잠겼을 땐 보이지 않았던 크고 작은 암초가 여기저기 드러나긴 했지만 갯벌이라곤 거의 없어 바닥은 깨끗한 편이었다. 그곳엔 고둥과 소라 전복 해삼 멍게 성게가 지천이었다. 2시간도 채 안 돼 역전의 해녀가 옛 실력을 발휘하여 세 자루 가까운 해산물을 채취했다.
채취한 해산물을 담는 대야와 망태기를 들고 따르던 아내가 한마디 했다. “어이 동철 엄마, 내가 조수할 테니 우리 이 길로 나서면 안 될까?” 그러자 그는 “언니, 생사람 잡을 일 있수꽈?”라며 눈을 흘겼다. 썰물 따라 미처 못 빠져나가 바위틈에 갇힌 고기를 작살로 잡고 있던 용준은 그 대화를 들었는지 씩 웃으며 다가왔었다. 난 그날 제주 해녀들이 이처럼 썰물 때의 노다지를 바로 눈앞에 두고 왜 힘든 바다로 멀리 나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용준의 대정 고향집은 전통 어촌마을 초입에 위치했고 규모도 꽤나 컸다. 부락 담장들은 모두 화산폭발로 생긴 현무암으로 쌓여있었다. 제멋대로 생긴 돌을 대충 쌓았을 뿐인데 세찬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돌과 돌 사이에 생기는 구멍 때문에 돌담은 힘이 세다지만 거친 표면의 돌담에선 제주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의지도 느껴졌다. 마을 입구엔 험상궂은 인상으로 사람을 노려보는 돌하르방도 버티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과 큼지막한 주먹코, 앙다문 입술의 돌하르방. 그 옛날 마을에 몹쓸 병이라도 돌라치면 돌하르방은 든든한 버팀목이자 나쁜 일을 막고 액운을 물리치는 정신적 지주였다고 한다. 돌하르방 코를 만지면 임신한다는 속설과 코를 쪼아 갈아 마시면 아들이 들어선다는 말까지 전해져 엉큼한 손길로 돌하르방을 더듬는 관광객이 지금도 없지 않다며 용준은 내 반응을 살폈다. 제주 곳곳이 역사의 발자취라지만 용준의 고향인 대정읍에 특히 근대의 뼈아픈 흔적들이 많았다. 용준 옛집에서 일박한 다음날 우린 가까운 송악산 코밑의 알뜨르를 찾았다.
알뜨르는 ‘아래 들판’이었다. 용준이 이곳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전투기 격납고였다. 알뜨르엔 이곳저곳 언덕이 삐죽삐죽 솟아나 있었고 멀리서는 곡식더미를 쌓아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제가 콘크리트로 쌓아올린 요새였다. 정작 내가 보고 싶었던 육군 제1훈련소는 사라진지 오래라고 해서 아쉬웠다. 동란 때 초등생이었던 나와는 달리 겨우 첫돌을 넘겼을 용준인지라 여자고등학교로 바뀐 역사의 비운이 깃든 현장을 찾아가기 싫었던 모양이다.
부산에서 내가 만들어 용준 집 거실에 걸린 섭지코지 일출장면 사진액자는 제주를 방문할 때마다 만날 수 있었다. 몇 년에 걸쳐 제주를 돌면서 그에게 신세를 지고 보니 이번엔 한라산을 작품으로 만들어 선물하고픈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백두산은 천지가 있어 악천후만 피한다면 바로 작품으로 옮길 수 있지만 한라산 백록담은 산정호수가 없어 경치는 많이 밋밋했다. 용준과 폭설 속 한라산을 올라봤지만 그냥 순백의 설국세상이라 감동적인 작품을 만들 순 없었다.
그러던 다음 해 초여름, 뜻밖에도 꼬마 한라산으로 불리는 어승생악을 만났다. 카메라를 든 사람 앞에 펼쳐진 어승생악 풍광은 놀라웠다. 산의 형상은 이등변삼각형으로 위에서 아래로 몇 개의 골도 패어있었다. 마치 거대한 조각가가 칼질이라도 한 듯 좌우는 대칭을 이루었고 골도 정교한 무늬처럼 느껴졌다. 산의 형상은 통째로 카메라 렌즈에 들어왔고 왼쪽 아랫부분 귀퉁이가 약간 그늘진 것 말고는 피사체로선 흠잡을 데가 없었다. 어승생악은 좌우 배경까지 녹음에 휩싸여 신비감을 들게 했다.
어승생악 액자를 받아든 용준도 놀라워하는 눈치였다. 그는 자신이 현장을 안내해 놓고도 어느 지점에서 찍은 거냐고 물었다. 용준의 집이 있는 신제주 노형오거리에서 1100도로를 타고 어리목 쪽으로 오른 것만 기억했지 카메라 셔터를 누른 지점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제주 북부지역을 대표하는 산으로 제주 시내에서도 머지않다는 사실만 떠올랐다. 한라산 6부 능선에 위치한 어승생악 정상에 오르면 한라산이 매우 가까우며 그 앞으로 층층이 늘어선 산들이 조망되며 정상엔 원형 화구호도 있다지만 난 그날 어승생악보다 약간 높은 지점에서 내려다보며 산을 카메라에 담았던 것이다.
용준의 고향집에서 모슬포는 가까웠다. 바람이 유난하고 토양이 척박해서 ‘못살포’로 불리던 곳이라니 이곳 사람들의 고난인들 오죽했을까. 보릿고개를 이겨냈다는 평가를 받는 대통령도 이곳에 와서 먹고 갔다는 선착장 입구 항구횟집의 자리돔회. 그릇 안에 둥둥 떠다니는 자리돔 토막이 입안에 들어와서도 미끄덩거리는 바람에 난 고역을 치렀다. 제주 사람들 음식으론 손꼽히는지 몰라도 그날 비위가 약한 나에겐 악몽처럼 느껴지던 자리돔물회였다.
용준은 모슬포항 인근 선착장을 향했다. 그곳에 정박해 두었던 자신의 모터보트를 몰아 차귀도를 가기 위해서였다. 벌써 사위는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는데 왜 또 섬을 찾아간다는 것일까, 의문이 일었지만 그의 결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차귀도에 당도하자 모터보트를 세운 용준은 앞장서 섬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은 섬이지만 유네스코가 제주 섬 전체를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소문이 났다고 한다.
사람들 출입을 금했던 무인도를 최근 해제한 때문에 오늘 우리가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니 행운이란 생각도 들었다. 역시 차귀도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깎아지른 해안절벽과 기암괴석이 절경이었다. 일몰시각에 맞춰 도착한 차귀도에서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와 억새의 물결도 만났으니 더욱 그랬다. 그 사이를 휘젓는 스산한 바람소리까지 체험했으니 더욱 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정상에서 서쪽을 약간 내려섰을 때 바다에 우뚝 솟은 바위 뒤로 천지를 온통 붉게 물들이며 가라앉는 낙조가 황홀했다. 지는 해는 황금빛과 붉은빛으로 바뀌다가 곧바로 남청에 가까워졌고 바다는 해를 삼킨 열기에 타버린 듯 일순에 새까맣게 변하고 말았다. 이제 캄캄한 밤을 지나야 다시 여명이 비치면서 바다는 제 빛깔을 찾아 세상을 비추게 될 터였다.
귀로에도 난 보트 핸들을 잡고 어스름이 내린 바다를 미끄러지듯 쾌속으로 질주하는 용준이 부러웠다. 보트가 살짝살짝 물위를 날 때마다 짜릿한 쾌감이 온몸에 밀려들었다. 정해진 항로와 교통신호라곤 전혀 없는 망망대해는 나에게도 핸들을 잡아보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용준이 워낙 속력을 내고 있어서 차마 말을 붙일 수 없었다. 그때 용준은 우리 부부까지 태우고 바다 위를 날다시피 했지만 무면허였다. 그날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용준이 수상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날 찾아온 때문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선진국처럼 레저용 수상운전면허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해상에서 성행하고 있는 무면허운전을 뿌리 뽑을 거라 했었다. 그 말을 듣고도 이미 운전에 익숙한 용준에게 있어서 수상운전면허시험이야 형식적으로 치루는 통과의례일 뿐이라며 우리 부부는 시험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다고 했던가. 용준은 첫 번째 코스를 제대로 한번 들어서지도 못한 채 낙방하고 말았다.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청년들까지도 척척 통과하는 짧은 코스를 십여 년 해상운전경력을 가졌다는 사람이 떨어지다니, 난 눈앞에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았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아직도 꽤나 매서운 이른 봄이었다. 수영강 시험장에서 쓴 고배를 마신 용준과 민락동 바닷가 횟집에 마주앉아 쓴 소주잔을 기울면서도 해줄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난 그의 안색을 살펴야했다.
한 해가 저물어가던 그해 초겨울, 한강 시험장에서 드디어 합격했다는 소식을 용준이 알려왔을 때 나는 반가움에 장난기까지 발동하여 소릴 질러댔다. “야아 이 친구야, 축하한다. 그런데 이제 보니까 서울면허가 따고 싶었던 게로구나, 나 원 참….” 용준을 믿고서 내지른 농담이었지만 그는 흥분하여 그 말조차 오히려 좋게 받아들였는지 모두 형님 덕분이라는 엉뚱한 말로 전화를 끊었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섬 제주. 우리 부부가 용준의 초대를 받아 몇 년째 제주 구석구석을 도는 투어는 계절을 바꿔가며 이어졌고 그러다가 주말을 만나면 용준 부부도 함께 하면서 차량운전과 관광해설까지 맡아주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화산섬이 만들어낸 바다와 한라산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러브랜드를 만났다. 부산 사람이 조성했다는 러브랜드는 용준 집 노형동에선 아주 가까웠다. 연중무휴라지만 성인이라야 관람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어른들을 위한 발칙한 상상을 볼거리 조각품으로 전시한 공간이었다.
그때까지 음지에 감추어졌던 성을 양지로 꺼내 공원을 조성한 사업자가 시대를 많이 앞섰다는 생각도 들었다. 노골적이고 조금은 자극적인 에로틱 아트의 절정이 아닐 수 없었다. 조각품을 저질이라며 깎아내리거나 색안경을 끼고 볼 이유는 없겠지만 낯 뜨거운 장면인 것만은 분명했다. 성은 극히 자연스럽고 또한 삶의 즐거움 중 하나니까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아 난 민망한 그 조각품을 여러 점 카메라에 담았다. 이곳을 둘러보는 관람객 반응도 다소 엇갈리는 것 같았다.
남편들을 집에 떼놓고 유람으로 찾아왔는지 중년의 여인들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홀로 밤을 지새울 것으로 보이는 혼기 꽉 찬 처자그룹은 양기를 한껏 보충하는 눈빛을 보이기도 했다. 쌍둥이처럼 티셔츠를 커플룩으로 걸친 신혼부부는 불타는 밤을 미리 상상이라도 하는지 서로 야릇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남우세스러워 그러는지 아니면 뭔가 켕기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뭐 이런 곳이 다 있어…?”라며 성질을 부리고도 끝까지 한 바퀴를 꼼꼼하게 둘러보는 노인은 이해하기 힘든 화상이었다.
계절별로 제주에서 용준을 만나면서 섬 곳곳을 유람하던 그 무렵, 현직 때의 전력회사 업무 중 안전장구시험을 퇴직한 입장에서 용역으로 맡게 되었다. 이제 동료 2명과 업무출장으로 제주도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까지 생긴 것이다. 제주도 안전장구는 처음에 서울팀으로 업무가 분장됐다가 시행할 때가 되자 지역에서 거리가 가까운 우리 영남지역팀으로 넘어왔다.
발변전소와 배전사업소가 보유한 장구를 품목별로 6개월 또는 1년마다 시험해야하는데 제주는 수량이 많지 않아 한 번 시작하면 사흘 안에 끝났다. 우린 차를 몰고 전력회사 사업장을 찾아다녀야 했지만 용준을 만나 미리 제주 전역 지리를 익힌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출장용무를 마치고도 제주를 바로 벗어나지 않고 동행한 멤버들에게 내가 용준을 통해 체험한 제주의 구석구석을 보여줬다.
2년째 되던 여름엔 고산성당도 찾아갔었다. 부산에서 은퇴한 미카엘라 수녀가 그곳에 가있다며 아내가 부탁한 때문이었다. 불우한 심장병 어린이들을 위한 요양원을 만들어 헌신한 공로로 정부에서 주는 봉사대상을 받기도 했던 분이라 은퇴 전엔 한국의 마더 데레사로도 불리기도 했었다. 고산성당이 소재한 한경면 지역은 제주에서도 손꼽히는 강풍지역으로 그때까진 대관령에도 없었던 풍력발전단지가 들어서 이국적인 풍광을 보여주었다.
성당을 들어서자 잔디로 조성된 마당에다 평활한 현무암으로 통로를 깔았는데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청정지역 초록 잔디밭은 까만 현무암으로 인해 더욱 도드라졌던 것.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건축가 가우디의 흔적을 만난 어느 여행자는 그 가우디조차도 제대로 건축에 시도하지 못했던 현무암에 관한 얘길 자신이 나고 성장한 서귀포 현무암까지 곁들여 들려주었던 게 떠올랐다.
여름날 늦은 오후시각에 시험장비가 탑재된 차량을 몰고 서귀포지점을 출발하여 한라산 1100도로에 올라섰을 때였다. 멀쩡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비를 쏟기 시작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퍼붓는 빗줄기는 금세 도로를 하천으로 만들어 차량 바퀴가 바닥에서 둥둥 뜨는 듯했고 폭풍까지 가세했었다. 보통 바람이 일면 비는 멎는 법인데 한라산은 달랐다. 순간 꼼짝없이 한라산 귀신이 되나보다 했었다. 사각 철제박스를 장착한 차량이라 전면에서 불어오는 강풍을 피할 수 없어 그만큼 악천후에 취약했던 모양이다.
제주에서 처음 용준을 만난 날로부터 5년이 지난 늦가을 저녁. 구시가지 해변 탑동횟집에서 그를 만났을 때 용준은 58세 정년퇴직이 내년 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치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은퇴 후의 청사진을 희망적으로 펼쳐보였다. 그때 막 밀려들기 시작한 중국인을 상대로 한 사업이었다. 그의 인생2막은 설계단계가 아니라 이미 부부가 한라대학에 등록하여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아내는 미용기술과 중국요리도 익히고 있었다. 대표를 맡을 용준도 사업에 필요한 전산과 사진실기 등을 등록해 놓았다고 했다. 그날 용준을 만난 게 마지막이었다.
인생2막을 관통하는 세월에 용준을 만나 제주를 돌면서 신세진 나로선 어떡하든 그를 만나야만 했다. 그러나 용준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제주에서 그와 학연이 있다는 친구나 직장 선후배에게도 부탁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예정대로 사업은 시작했는지 그리고 대박은 터뜨렸는지 궁금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혹 용준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수전노 되놈들에게 사기라도 당한 것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게 하는 용준이었다. 하지만 너무 집착하지 말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남에서 불어오는 바람 맞다 보면 그의 소식도 묻어오지 않을까 싶다
강 문 석
부산대 사회교육원 소설창작과정, 부산교대 사회교육원 수필창작과정, 국제신문 문예창작교실, 동국대 사회교육원 여행작가과정 수료. <가톨릭신문> 위촉기자, <실버넷뉴스> 사진부 기자, 양산문화원 인터넷 문화관광해설사 역임. 《에세이문예》 창간호 작품상. 제5회 부산수필문인협회 우수작품상. 부산문인협회《문학도시》소설작품상. 수필집『산으로 남고 싶은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