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늙은 호박을 보면 괜스레 눈이 간다.
돌아가신 외할머니 같기도 하고, 친정엄마 같기도 하고,
머잖아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늙은 호박은 구태어 잘 생길 필요가 없다.
울퉁불퉁 못 생길수록 더욱 마음이 간다.
정이 가고, 든든하고, 애잔하기도 하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길 한 모퉁이에 할머니 한 분이 늙은 호박을 팔고 있었다.
유난히 크고 골이 깊은 호박이 듬직했다.
왜소하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와 대조를 이루었다.
내 마음이 한바탕 기지개를 켜더니 몸에서 나와 뚜벅뚜벅 할머니한테로 걸어나갔다.
단숨에 호박을 움켜잡았다.
얼마냐고 물으니 30,000이라고 했다.
돈을 치르자 앗차, 너무 무거워 들 수가 없다.
가까스로 택시를 탔다. 집까지 택시비가 6,000원.
집 앞에 내리자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똑같은 호박이 아파트 상가 앞에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왜 가격을 물었던가.
25,000이라고 했다.
나는 다른 호박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대동소이했다.
호박은 어딜 가나 두루뭉수리, 비슷비슷한 것이었다.
세상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이 거기가 거기듯이.
그렇다면 나는 왜 25,000짜리 호박을 36,000이나 들여 샀던가?
외할머니가 생각나서도 그렇고, 찬바람 부는 늦가을이어서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한 해가 저물 무렵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쓸쓸한 무의식이 거리에 나와 있는 외로운 호박들에 투영되어
잠시 이성을 잃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겁게 들고 온 호박을 거실에 모셔 놓으니 집안이 그득하다.
며칠 묵혀 두었다가 호박죽이나 끓여야겠다.
범벅이 나을라나?
호박죽은 외할머니가 잘 끓이고, 범벅은 친정 엄마가 선수였는데.
첫댓글 저도 호박범벅 좀 끓입니다.
팥과 땅콩,콩 넣고 푸짐하게 끓이지요.
서리내리고 나서 딴 호박이 맛있다네요.
그때쯤 혹 배달갈지 모르겠습니다.
늙어서 좋은건 호박 뿐이라는 친구의 쓸쓸한 푸념!
진짜 호박 범벅은 겨울 날 한끼 양식을 늘리려고 많이 먹었던 음식이지요. 호박 삶아 으갠 물에 밀가루를 약간 버무려서 살살 뿌리며 삶은 불콩이나 당원 같은 것을 조금 넣고 계속 저어 주면 속에서 방울이 뽀록 뽀올 올라오는데 그 때 즈음에 불을 끄고 자지면(뜸 드리기) 맛있는 호박 범벅이 되는데 그걸 커다란 양푼에다 퍼 담아서, 삼배 보자기를 덮은 다음, 서리 내리는 마당 빨랫줄에 걸어서 하룻 밤을 재웠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숟가락으로 한 술 떠 먹으면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없었지요. 요즘 호박죽은 노랗게 염색하는 죽인지 영 맛이 없어서 숟가락이 가질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