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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백제 토론방 몇가지만 꼽자면...
麗輝 추천 0 조회 265 10.01.22 15:45 댓글 1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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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1.22 16:33

    첫댓글 답글 감사 합니다.
    사진에서 웅천을 포함 하지 않았네요
    무창포 I.C를 포함 해야 합니다.

  • 10.01.24 23:00

    웅천의 지형이 月의 형상을 하고 있지요 .마한의 중심지 월지국이 충청도에 있다고 보는 견해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천안 직산 -이병도. 홍성 -천관우. 예산 -김정배. 공주. 익산 등을 월지국으로 비정하는 학자가 있었지만 발굴을 통하여 증명을 하여야 하는데 증명을 하지 못하고 이론만 있는 실정입니다.
    웅천은 정황과 유물로 증명 할 수 있습니다.
    기와집이 수천채 혹은 수만채 있음도 증명 할 수 있고 해안선이 어느정도 변화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수 있지요
    맹약을 한 제단은 웅진성이 증명되면 저절로 증명 되는 것입니다.

  • 작성자 10.01.25 09:48

    선후관계부터 따져야 할 것 같습니다. 월지국을 찾기 위해서 발굴을 하려면 준비작업이 많이 필요합니다. 가장 큰 것이 금전적인 문제겠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부분을 간과하고 발굴을 왜 안 하냐~고 하지만...모르는 소립니다. 암튼 금전적인 것이 해결된다 하더라도 월지국이 지금의 어디에 있다고 정확하게 고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볼때 그렇게 고증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고 정확하게 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턱대고 발굴을 할 수는 없지요. 왜 이론만 있겠습니까? 그리고 기와집을 수천채~수만채 찾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당시 월지국에서 기와집을 이렇게 많이 짓고 살았다는 근거가 없지 않습니

  • 작성자 10.01.25 09:50

    까? 월지국님이 자꾸 기와집 운운하시는데 무슨 근거로 기와집을 자꾸 거론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맹약을 한 제단은 웅진성이 증명된다고 해도 저절로 증명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제단에 금석문으로 '맹약을 한 제단'이라고 써 있지 않는 한(설사 써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100% 제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그렇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겁니다. 그리고 월지국님의 지금 주장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보다도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해안선의 변화에 대해서도 학계에서 이렇다 할 주장이 없지요.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너무 성급한 판단은 오해의 소지가 크다고 봅니다. ^^

  • 작성자 10.01.22 18:22

    아! 지적 감사합니다. ^^; 제가 그냥 도시 위주로 체크하다보니 깊게 생각 안 하고 지도를 제시한 것 같아 죄송하네요. 암튼 고대의 지명 부분은 그 당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자세히 알 수 없기 때문에...좀 더 치밀한 고증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주말 보내십쇼~

  • 10.01.25 13:58

    참고로 우리나라 소금 역사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염전에 의한 천일염 생산은 불과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일제 시대의 개발 강행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입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전통적인 소금 생산은 ' 자염 ' 이라 해서 갯벌층에서 만든 구덩이 속의 통에 밀물 썰물 과정을 거치며 염도가 농축된 소금물이 담기면, 그것을 가마솥에 옮겨 끓여 얻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염전을 활용한 방식이 아니었죠... (그래서 지금 소금보다 미네랄 함량도 더 많고 약간 누랬다고 합니다.)

  • 10.01.25 14:01

    백제의 소금 역사에 대해선 그 어느 것도 기록에 없지만, 지형적인 면을 고려해 서남해안의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벌쪽을 이용해 한반도에서 저렇게 조선시대와 유사한 방법으로 당시 어느 국가들보다도 많은 양질의 소금을 생산해 냈으리라는 짐작은 가능케 합니다. 헌데;;; 저런 뻘밭에 수도 도성이 있다굽쇼? 그런 갯벌지대 근처에 아예 중심지를 세울 수 있을 정도면 오늘날도 새만금이다 뭐다 해서 갯벌 없애는 짓을 왜 할까요? 그 당대 염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없던 겁니다~) 확인이 안되고 있는 판국에 소금이 모자랐다는 대목 하나로 해안가에 도성이라니; 이건 비약도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작성자 10.01.25 14:14

    ㅋ 그런데 안타깝게도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에 섣불리 얘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부여장님의 생각처럼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짐작은 합니다만...중국은 이미 주대 혹은 그 이전부터 그런 유적이 확인되고 있으며(실제로 문헌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상식과 현실이 합치되고 있는데 우리는 안 그러고 있어 조금 안타깝죠. 그런데 규모나 효율성 면에서 반드시 바닷가의 염전을 썼을 것이라는 생각은 요즘 우리들의 시각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부여장님 말씀대로 조선시대식 소금생산법이 오히려 과거부터 내려온 전통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기도 하고요. 암튼 이 부분은 노코멘트입니다. ^^;

  • 10.01.25 15:09

    사실 뭐 중국도 동시대 고대 서양이라든지 이집트 쪽 소금 역사에 비한다면 그 자료 양이 미미한 수준입니다. 헌데 중국은 8~9세기 당나라에서 이미 천일염 염전을 쓰고 있었다는 기록과 유적도 있죠... (근데 사실;; 중국의 고대 주요 소금산지는 오히려 사천쪽이었다는군요) 더군다나 엔닌의 일기에서 보면 이 소금을 재당신라인 (예전 백제인이나 고구려인의 재중 후손들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이 다룬 기록도 보이죠.. 운하 뱃길을 따라 소금을 실은 배들의 행렬을 묘사한 부분도 있구요.... 사실 이런 기록 대조를 해 본다면 ' 그 당시 한반도엔 염전이 없었을 것이다 ' 라고만 100% 확언하기엔 찝찝하기도 합니다.

  • 10.01.25 15:07

    아, 그리고 제가 자염 같은 전통적 소금을 얻는 방법을 소급해서도 백제의 높은 소금 생산성을 점치는 건 이유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자염 역시 농축된 염수를 모으는 방식에 있어서 미네랄과 염분이 축적되기에 유리한 갯벌 지대에서 주로 가장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 부분을 참고해 당시 한반도 갯벌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던 백제의 경우에 적용해 봤습니다.

  • 작성자 10.01.25 17:12

    뭐 어느 것 하나 확언이 가능한 부분이 없는데...월지국님은 좀 확언을 하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요. 부여장님 말씀대로 여러가지 가능성은 많습니다. 또 백제에 적용 가능한 모델들도 있구요.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높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없을 뿐이겠죠. 그래서 조심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내용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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