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모든 순교자 축일에 관한 작년 강론 일부를 옮겨, 순교의 삶을 다시 되새긴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 축일 (9월 26일, 성삼후 17주일) 비대면 성찬례 강론
"... 그래서 이렇게 말해야겠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서 묻혀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순교의 진실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얻어내는 성취가 아니라, 계속해서 잃어가는 순례입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조금씩 더 불편하고, 더 손해보고, 더 억울하고, 고통받을 때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우리의 신앙은 더욱더 깊고 단단해져 갑니다. 우리 인생은 주님의 십자가에 더 가까이, 성인의 순교를 더 닮아갑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을 기도와 예배로 조금씩 비워가며, 자신 안에서 주님을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신앙은 한 개인에 불과한 나 자신을 잃어서, 교회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입니다. 나 개인의 체험과 신앙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교회의 신앙으로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 열매로 세상의 생명을 먹여 살리는 일이 교회의 선교입니다. 그 열매를 따서 다른 이들을 초대하여 먹이는 일에 땀을 흘리는 일이 우리의 새로운 순교입니다. 이 땀의 순교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지고 갈 십자가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성인과 순교자와 더불어, 고귀하고 복된 땀의 순교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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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모든 순교자 축일 (9월 26일, 성삼후 17주일)
순교 - 피와 땀의 증언 (요한 12:20-32)
주임사제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상략...)
우리 역사에 가까운 아픈 순교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이 성당 제대 위에 있는 모자이크화를 다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첫 순교자였던 스테파노 성인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합니다.
왜 하필 스테파노 성인의 모습을 이 성당의 벽에 새겨야 했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뜻을 담아 모자이크에 담아 지난 90년 동안, 아니 성당이 설립된 130년 동안 이곳에서 예배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새기려 했는지 생각합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증언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여 베풀었던 보살핌과 동고동락의 역사를 차분하게 요약하며, 스테파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분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에 있었던 무리와 더불어 그 구원의 역사를 이뤄가는 경험과 약속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았다는 이들은 자기 종교와 정치의 특권을 이용하여 보통 사람을 얕잡아 보고 율법으로 사람을 옥죄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마련해 주셨는데도, 자신들의 업적인 양 떠벌렸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면서 결국에는 황금으로 만든 소를 섬겼습니다. 돈과 권력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의를 비판한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사도 7:1-53 요약).
하느님께서는 스테파노의 입을 통해, 이런 사람들은 신앙인이 아니라 “이교도의 마음과 귀를 가진 이 완고한 사람들”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사도 7:51).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한다고 하여 모두 신앙인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도전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스테파노의 불편한 진실 선포에 귀를 막았습니다.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들은 것을 진실로 여기고, 불편한 진실을 못 들은 체했습니다. 귀를 여는 대신에 그들은 사람들은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진실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진실을 선포하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폭력이 등장했습니다. 결국,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한편, 사람을 죽이고 죽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어떤 이들은 그저 수수방관했습니다. 옆에서 구경했습니다. 성서는 이 세밀한 장면을 놓치지 않고 낱낱이 기록합니다. 진실에 귀를 막고, 불편한 마음이 들자 돌을 들어 생명을 앗아가고, 참담한 불의와 폭력의 현실을 수수방관하는 상황, 이것이 스테파노의 순교가 일어났던 무대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희생을 따라 목숨을 바친 일을 순교라고 했습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처럼 복음을 선포했고, 사람들의 미움과 조롱 속에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성인의 순교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순교의 본래 뜻은 복음의 증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까지 초기 삼백 년 동안 수많은 신앙인이 복음을 증언하다가 붉은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펼쳐지고, 그 복음을 선포하는 현장에서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의 피가 흘러야 했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교 선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순교자 축일의 날짜는 원래 한국 성공회의 순교자 축일로 제정한 것이 아닙니다.
<1939년 공도문>에 ‘조선인 치명일’로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 기원은 1925년 조선 천주교가 같은 날짜에 지정한 ‘조선 순교 복자 대축일’을 함께 기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성공회는 다른 교단을 존중하여 ‘조선의 순교자들’을 기념했고, 전쟁 후에 나온 <1965년 공도문>에도 같은 날을 ‘한인 치명일’로 새겼습니다. 복음의 증언을 향한 순교는 교단의 벽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먼저 피를 흘렸던 여러 신앙의 선배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과 교회가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부탁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오늘은 한국 성공회의 순교자만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교단을 넘어서 한국의 모든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러니, 한국 성공회의 순교자 축일을 따로 지정하고, 이원창, 윤달용, 조용호, 리도암, 홍갈로 신부와 마리아 클라라 수녀님과 함께 잊혀진 순교자도 찾아내어 기억하였으면 합니다.
특히, 순교일에 관한 날짜와 기념일도 모두 제각각이고, 이를 모두 가족에게 맡겨두는 일은 교회로서는 소홀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바로잡아 순교자와 더불어 순교자 가족의 땀과 헌신을 기억하였으면 합니다.
몇백 년이 흘러서, 그리스도교 선교 초기에 흥건했던 피의 순교는 멈추었으나, 신앙인들은 교회를 바로 세우려는 기도와 노동으로 땀을 흠뻑 흘렸습니다. 후대에 이르러, ‘피의 증언’을 통한 순교를 ‘적색 순교’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며 흘렸던 ‘땀의 증언’을 ‘백색 순교’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피와 땀의 순교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이 순간, 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여러분은 땀의 순교, 백색 순교를 계속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이 교회를 지켜냈고, 여전히 여러분의 예배와 봉헌, 기도와 헌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며 복음을 증언하는 분들입니다.
코로나 감염증으로 우리는 또 다른 박해의 시대와 순교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만 같습니다. 외롭기 쉽습니다. 종종 흔들리기도 합니다. 불편하고 야속하여 불평과 비난이 우리 마음을 엄습하기도 합니다.
이때, 사도 바울로 성인은 이렇게 우리를 격려합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 37-38).
이 순간, 스바니야 예언자는 새로운 희망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 때가 되면, 너를 억누르던 자를 다 없애버리고 절름발이는 고쳐주며 길 잃은 자들을 찾아내어 고국으로 데려오리라. 그 때가 되면, 온 세상에서 내 백성은 칭송을 자자하게 받으며 이름을 떨치리라. 그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데려오리라. 너희를 이리로 모아들이리라”(스바 3:19-20).
이제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과 진실을 다시 확인합니다.
신앙은 편안한 보장을 즐기는 레크레이션이 아니라, 낯설고 불편한 진실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수련입니다. 즐거움을 주는 일은 세상에 많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행복을 마련하지는 않습니다. 참된 행복은 미처 알지 못했던 세계를 탐험하며, 그 진실을 발견하여 즐기는 기쁨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자기 생각과 경험에 집착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 사로잡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괴로운 일 때문에, 여러 간절한 일로 기도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이뤄달라는 기도는 응답받기 어렵습니다. 그 간절함 속에서도 마지막에는 하느님의 도구로 자신을 써달라고 요청할 때, 내가 하느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사로잡아 붙드는 것이라고 인정할 때,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야겠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서 묻혀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순교의 진실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얻어내는 성취가 아니라, 계속해서 잃어가는 순례입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조금씩 더 불편하고, 더 손해보고, 더 억울하고, 고통받을 때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우리의 신앙은 더욱더 깊고 단단해져 갑니다. 우리 인생은 주님의 십자가에 더 가까이, 성인의 순교를 더 닮아갑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을 기도와 예배로 조금씩 비워가며, 자신 안에서 주님을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신앙은 한 개인에 불과한 나 자신을 잃어서, 교회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입니다. 나 개인의 체험과 신앙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교회의 신앙으로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 열매로 세상의 생명을 먹여 살리는 일이 교회의 선교입니다. 그 열매를 따서 다른 이들을 초대하여 먹이는 일에 땀을 흘리는 일이 우리의 새로운 순교입니다. 이 땀의 순교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지고 갈 십자가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성인과 순교자와 더불어, 고귀하고 복된 땀의 순교자들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였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