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동주문학상 수상시집 <밤이 부족하다>(이은 시인)
나의 애인은 창고지기
우리는 창고에서 만났다
창고는 우리를 숨기기에 좋았다
매일 창고는 옷들이 넘쳐났다 재고품이 된 옷들이 재고 처리되기 직전
창고로 몰려온다 나의 애인은 수천 벌의 옷들에 쌓여 숨이 막혔다 우리가 창고를 떠난 다음에도 창고는 여전히 수많은 옷들로 넘쳐났다
우리는 창고를 사랑했다 창고에서 사랑을 했다 나는 창고가 필요했다 우리의 사랑을 감추기에 좋았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창고가 사라질 때까지 사랑하기로 했다 오래전 얼굴을 지우기로 했다 얼굴 없는 얼굴이 되기로 했다 우리는 창고 속으로 숨어들었다 모든 게 다르게 보였고 창고가 한없이 커 보였다
애인은 지금 창고에 있다 재고품을 정리하고 재고 처리되지 않은 옷들을 불사르고 있다
재고 처리되지 않은 애인을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간다
나는 지금 어디인지 모르는 창고 속에 있다 불타고 있는 창고 속에서 우리는 불타오른다
애인은 점점 창고가 되어간다 불길에 휩싸이듯이 점점 창고가 되어 간다
창고의 운명을 믿는가 창고는 밤 열두 시로 기울고 텅 빈 창고가 홀로 있다 장소는 없고 장면만 있다 창고는 있는데 애인은 없다
이것은 창고의 문제입니까 애인의 팔다리를 펼쳐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애인을 착착 개어 창고에 넣어두었다
이은 시집 <밤이 부족하다>(달을쏘다)에서
출판사 리뷰
이은의 시에서 화자들은 이러한 노동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호소하는 한편으로 기계가 주도하는 노동 과정이 노동자를 ‘기계 인간’ 또는 ‘인간 기계’로 변모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용시에 등장하는 “기계 앞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인간과 기계가 구별되지 않는 순간이 온다”라는 진술이 대표적이다. 이은의 시에는 이러한 진술이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등장한다. “나는 인간 기계가 되어 갑니다”(「불량한 밤」), “움직이는 걸 멈출 수가 없는 나는/기계 인간, 인간 기계라 해야 할까”(「밤의 기계들」), “나의 마음은 기계를 닮아갔다”(「무한가속기」), “나는 인공 심장박동기를 달고 기계 인간이 되어 가는 중이다”(「인간의 마음이 왜 기계를 닮아갈까」), “심장이 뛰고 있는 건지 기계가 뛰고 있는 건지/나는 기계 인간이 되고”(「인공 심장 박동기」)……. 기계와 함께, 기계에 들러붙어서, 기계가 주도하는 노동 과정의 폭력성과 그로 인해 자신이 ‘기계’가 된 것 같다는 진술은 이은의 시에서 사실상 강박적으로 반복된다. 시인은 기계의 속도에 맞추어 작업함으로써 기계를 닮아가는, 또한 인간적인 면모가 마모되어 가는 모습을 ‘기계 되기’라고 명명한다.
- 고봉준 시집 해설 중에서
추천평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노동과 자본, 기계와 인간 등을 둘러싼 집중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시편들로, 체험의 구체성과 핍진한 묘사가 돋보였다. 그리고 이전의 노동시와는 사뭇 다른 노동의 양태와 발랄하고 자유로운 화법이 새롭게 느껴졌다. 이렇게 노동의 물질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을 아우르며 공동체의 미래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시집의 전체적 짜임새도 탄탄한 편이다. 이 시대의 노동은 더 이상 온전하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그의 시들 역시 온통 깨지고 녹아내리고 굴러떨어지는 존재의 비명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비명과 소음을 건져 올리는 시인의 시선과 목소리에는 세계의 본질을 향해 직진하면서 생겨난 속도감과 간결한 힘이 느껴진다. 21세기 노동의 현주소를 치열하게 증언하는 한 권의 시집을 만났다는 것은 선자들에게도 참 반갑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 나희덕 (시인)
이은 시인
강원도 동해 출생.
2006년 『시와시학』 「오로라 통신」 외 6편으로 등단.
2009년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12년 시집 『불쥐』 발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2018년 시집 『우리 허들링 할까요』 발간.
2023년 제8회 동주문학상 수상.
2023년 시집 『밤이 부족하다』(시산맥사)
E-mail _ espoem55@daum.net
출처 : 시산맥사, 예스24
첫댓글 시집 잘 받았습니다. 시집 출간을 축하합니다.
시집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저도 시집 잘 받았어요!^^
좋은 시집 잘 받았습니다.
봉평에서 뵈어요.
늘 건강하시구요.
시집 고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