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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다함께/ "안식일복음 신앙을 고백하는 말씀기도를 드리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 (갈 2:20)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7-8)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새벽이슬강좌/ 민수기 23장
그리스도인의 경계거리 (민 23:1-30)
오늘 본문은 정작 장본인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진행되고 있었던 다소 난해한 에피소드를 전장에 이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장장 석장(민 22~23장)에 걸쳐서 이 난해하면서도 별 영양가가 없어 보이는 사건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의 사술가(민 24:1)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던 모압왕 발락의 발상도 현대인에게는 이해가 잘 안가는 대목이지만,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저주를 했다고 쳤을 때 과연 그들은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라는 궁금함도 남는 대목입니다. 추측컨대 고대 국가들이 전쟁을 하기 전에 신녀(神女)라든가 무당을 불러 먼저 의사를 타진하고 적을 향해 저주를 퍼붓도록 사전에 주문하였다는 사실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아마도 발락은 이스라엘과의 일대 접전을 예상하고 신통력 있다는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먼저 저주하게 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민 22:6). 전장에서도 보았듯이 우여곡절 끝에 발람은 마침내 발락 앞에 모셔졌지만, 발락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발람은 이스라엘의 축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과 마음을 주장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왕 발락은 포기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거듭 요청할 만큼 집요했지만, 도리어 그 결과는 발람이 실토한대로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을꼬”(8절)라는 놀라운 진리를 세 번씩이나 확인해주는 꼴만 되었습니다. 발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발락(원수)과 우리에게 주시는 분명한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어떤 원수도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할 수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경계거리와 상관없이 사는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겪는 고통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23장과 전장, 그리고 다음 장까지 이렇게 석장에 걸쳐서 이스라엘 백성을 놓고 발락과 발람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축복과 저주의 게임을 자세히 기록해 두었겠습니까? 이는 원수가 아무리 저주하려고 해도 저주할 수 없는 대상이 바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사욕과 사술에 능한 발람을 친히 제어하셔서 이렇게 선포하도록 하셨다면 이는 그만큼 이 진리를 영원히 전수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백성은 경계거리와 상관없이 어떠한 경우에도 두려움 없이 살아가는 자라는 사실을 성경은 어떻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먼저 예수님이 가장 좋은 예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세상이 볼 때, 심지어 유대인들이 볼 때도 저주받은 것이었습니다(신 21:23).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경계거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저주를 두려워하여 거부하거나 원수를 공격하지 않으셨습니다. 스데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갔지만 결코 최후를 맞는 그를 저주의 그림자가 뒤덮지 못하였고, 도리어 원수를 용서하면서 그 저주를 받아들입니다. 다윗도 그런 자였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였지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왔을 때에도 그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삼상 24, 26장). 한마디로 다윗에게도 경계거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들이 한결같이 자신들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라도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기에 원수의 저주와 공격이 결코 저주가 아니라는 확신 속에서 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반문하면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자신있게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청취자 여러분!
살다보면 타인의 비상식적인 접근을 수없이 경험하게 됩니다. 내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그때마다 경계거리를 형성하고 피하거나 공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도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은 도리어 축복이 된다는 것이 성경의 상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도 원수도 다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그 어떤 원수도 나에게 근본적으로 해를 끼칠 수가 없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원수를 미워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경계거리가 제로인 하나님의 선민으로 살기에 늘 감사하며 항상 기뻐할 뿐입니다. 이 시간 화잇의 탄식이 우리를 일깨우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각력이 얼마나 둔한가! 각 시대를 통하여 그들은 당신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얼마나 더디 깨닫는가! 만일 그들이 그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역사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분별할 수 있었더라면 그들의 마음에는 당신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당신의 위엄과 능력을 생각하고 경외심으로 충만했을 것이 아닌가?”(부조, 444)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 오늘 이 아침 주님 안에 거하고자 십자가 앞에 굴복합니다. 의심과 경계와 미움의 영을 내 속에서 제거하여 주시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옵소서. 그래서 비겁하게 피하거나 이기적으로 공격하는 자가 아니라 축복하고 용서하는 자로 살아 오늘도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간절히 간구합니다. 아멘.
2013. 5.20
Crossabbath Gospel Ministry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안식하세요,
내안에 임하신 성령께서 당신을 위한 소원을 이루십니다..
오늘 하루 "안식일복음 묵상과 생활 훈련"에 참여해 보세요!!!
1. 새벽이슬기도회를 마치신 후에 오늘 주신 안식일복음 원리를 온종일 묵상하고 삶에 적용해 봅니다.
본문강좌를 묵상하시면서 "자아가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시며, 자아가 살아있을 때
어떤 결과들이 초래되었는가"를 묻고 안식일복음 생활 원리를 따라 생활합니다.
2. "안식일복음 일기장"을 한권 마련하셔서 오늘 하루를 안식일복음으로 살았는지 돌아보며
회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3. 마지막으로 저녁에 오늘의 새벽이슬강좌를 다시한번 청취한 후에 은혜로운 댓글을 남깁니다.
4.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 후 내일 새벽에 다시 만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