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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수필론
IT시대의 작가의식과 디지털 수필
박 양 근
들어가며 : 디지털시대의 문화적 특성
21세기는 디지털혁명과 글로벌리제이션의 시대로 불려진다.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전화 등 정보통신의 혁명은 지금까지의 공간개념과 시간의식을 전복시키면서 노동, 학습, 주거, 유희라는 인간의 4가지 활동 영역에 유례없는 변혁을 가져다 주었다. 그 중에서 과학을 하부구조로 삼고 있는 인문학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디지털혁명은 현대 문학의 발달사에 역사적 경계선을 설정해 주었다.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로 인하여 필사문학이 인쇄문학으로 대체되면서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하였다. 마찬가지로 20세기 후반기에는 영상매체인 멀티미디어가 문자 매체를 압도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화현상이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디지털문화와 혼성문화가 출현하면서 레슬리 피들러가 말한 ‘소설의 죽음’이라는 인문학의 위기론이 대두된 것이다. 인쇄매체와 디지털 언어가 일으킨 문화 이반현상을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소통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는 문학 양식은 살아 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디지털 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문학현실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한다. 문학과 인터넷의 상관성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는 인터넷이 문학의 본질을 손상시킨다는 부정적인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인터넷이야말로 “문학은 죽었다”라는 문학 고갈론을 반전시킬 수 있는 처방이라는 점이다. 문학의 위기에 대한 원인도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컴퓨터라는 전자 글쓰기가 전통적인 활자매체를 마비시켜 버렸다는 코드상의 위기의식이며, 둘째는 사이버라는 공간이 생성되면서 ‘작가’와 ‘독자’간의 전통적 관계가 해체되는 데 따른 작가의식의 위기를 손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문학 당사자들은 디지털 시대가 가져다 준 인터넷의 무한한 정보의 바다를 외면한 나머지 기호의 해체라는 지엽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정작 문학의 핵에 해당하는 작가의식을 경시하고 있다. 이것은 책의 위기를 문학의 위기로 오인하여 작가적 위기를 스스로 외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문학을 중심으로 인문학이 위축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인식의 부재에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간격, 감성과 휴머니즘의 애니메이션화, 세대와 계층과 지역과 젠더 이데올로기의 붕괴와 같은 낯선 문화 추이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혼란이 그것이다. 이렇게 볼 때 ‘종이문화의 종말’과 인문학 의식의 생존 여부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현대문화의 구호로서 흔히 “More click better life.”와 “N-way is a royal road.”를 예로 드는 사람들이 많다. 모든 네트워크가 상호 연결된 사이버 공간에서는 소통력이 증가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역동적인 에너지가 무한대로 생성된다. 컴퓨터 마우스를 클릭 할수록 삶의 질이 향상된다는 문화 엔트로피는 디지털 문화의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 문학의 일부 영역을 차지할 수필이 21세기에 적합한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작가의식이 무엇인가를 검토할 필요가 생긴다.
문학의 고정관념이 해체되는 이 시대에 적합한 수필의 좌표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을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디지털 시대에 처한 작가와 문학에 대한 재점검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디지털 환경이 작가의식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검토하고 디지털의 다양성과 관련하여 수필의 양성론을 재점검하면서 디지털 수필쓰기의 전략과 표현양식을 중심으로 논의하기로 한다.
펼치며 1 : 작가의식의 전환
지금의 지구촌은 탈중심과 다원화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멀티미디어가 의사소통의 도구로 등장하면서 낯설게 하기와 혼성이라는 디지털적 현상은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직면하여 새로운 문화인식이 요청됨에도 다수의 수필작가는 전통적 소재주의와 주제관에 얽매여 변화에 대한 열린 의식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상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문학행위는 지금까지의 문학행위와 다르기 마련이다. 고전주의와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의 문학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의였다. 이 문예사조들은 선악, 음양, 생명과 죽음, 타락과 구원 등 초인간적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표현해 왔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생태문학, 신역사주의 문학, 탈식민지 문학들은 기존의 가치관을 패러디하면서 21세기의 병리현상을 점검해 온 문학사조에 속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학 체제는 디지털시대에 통용될 대안으로서 몇 가지 단점을 보여 주고 있다. 예를 들면 독자와 비평가들의 기호를 지나치게 의식한다든지, 작가-작품-독자로 이어지는 수직성을 기본 항으로 고수하려는 문제가 여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비록 대중적 문학관을 지니더라도 디지털시대의 패러다임으로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수필을 효용론에서 살펴보면 시, 소설, 드라마보다 정보의 창출과 전달을 중요시하고 있다. 디지털시대의 N-시민은 정보화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선험적 인식을 지녀야 할 작가들이 디지털을 과학문명의 표기 수단으로만 간주할 뿐, 그것이 지닌 문학적 잠재성을 외면하고 있으며 특히 수필문학은 생리적으로 전통성을 선호하는 나머지 ‘낯설게 하기’에 대한 낯설기의 성향이 두드러짐을 부인할 수 없다.
현재의 한국수필은 서정적 풍경과 인생의 관조에 지나치게 치우친 감이 적지 않다. 이것이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수필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정보의 바다로 불려지는 사이버공간에 수필의 위상을 이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변화에 위축되기보다는 선험적인 이론과 창작으로 문학의 지평을 넓혀 가야 하는 만큼 디지털적 개안은 문학적 다양성에 기여할 것으로 여겨진다. 21세기를 수필의 세기라고 부르는 이유도 수필과 디지털 환경이 평등성과 친화성과 정보의 호환성에서 상호 가장 근접하는 문학과 과학의 대표적인 영역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나아가 수필은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상상화라는 작업을 거친다는 점에서 다채로운 체험이 저장된 디지털 환경이야말로 새로운 수필적 주제를 모색하게 해 주는 창작공간인 것이다.
펼치며 2 : 수필의 양성론
수필은 양성의 문학이다. 수필은 태생적으로 운문과 산문의 중간지대에 자리한다. 수필을 압축하면 시와 가깝고, 서사적 줄거리를 압축하면 소설과 가깝다는 사실은 수필의 형식적 기능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수필의 양성을 발전적으로 해석하면 문학성과 철학성을 공유할 뿐 아니라 인문성과 과학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양성은 디지털 시대에서 수필의 발전전략을 생각할 때 가장 유의미한 본질로 간주되고 있다.
수필의 양성론에 대한 본질적 의의는 혼성에 대한 열림이다. 문학이 문자를 도구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과학과 결합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시적 효과와 산문정신으로 엮어지는 문학으로서 수필은 정서적 즐거움과 인식의 즐거움을 동시에 제공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수필은 자연과학이 지닌 자질을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밖에 없듯이 예술과 기술,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은 이미 1960년대부터 그 간격이 좁혀지고 있다. 엘리엇(T.S. Eliot)이 창작을 통한 실험 정신이야말로 문학이 나아갈 방법이라고 말한 주장도 디지털시대가 요구하는 수필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디지털시대의 합리성과 과학성, 디지털 문화가 갖는 대중성, 그리고 현대인의 욕망이 수필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문학을 질적으로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수필 자체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수필의 양성론을 논할 때 현대화를 논할 때 유의할 점은 장르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수필이 지니고 있는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정체성을 간략하게 열거하면 개성을 추구한다는 점, 체험을 기반으로 삼는다는 점, 1인칭 서술자가 등장한다는 점, 허구성을 기본적으로 배척한다는 점, 시성과 산문성을 공유한다는 점, 결속성과 질서화가 요청된다는 점 외에도 예술성과 철학성의 균형감각을 손꼽을 수 있다. 그런데 정체성 자체를 손상시키려는 시도는 예술의 합목적성과 본질에 어긋나므로 주제의식의 다변화를 통해 디지털시대에 부응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여겨진다. 지금까지 논의한 디지털시대의 문화환경을 바탕으로 주제의 퓨전화와 그 실천 전략을 살펴보기로 한다.
펼치며 3 : 주제의식의 디지털화
텍스트로서 수필은 활자화된 책이 아니라 의미 있는 경험의 축적물이다. 적어도 펜과 붓으로 쓰이는 문학에서는 어떤 정보도 기계적이거나 자동적으로 표현될 수 없었다. 과거의 작가들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상상의 벽을 두드려 잠재된 체험을 길어 올렸다. 옛 작가들에게 문학은 구원이었고 구원을 통해 역설적으로 종교의 굴레와 역사의 구속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 때 작가의 상상력은 초월 그 자체를 꿈꾸는 정신작용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상상은 과학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디지털시대에서는 더욱 긴요하게 간주되어지고 있다.
지난 20세기는 소설의 시대였다. 소설의 허구는 근대화가 이루어진 산업사회와 비인간화된 사회에 그나마 상상의 영양소를 제공해 주었다. 수학과 물리학이 발전한 20세기에 허구가 번성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일지라도 문학에서는 다행스러운 반역이었다. 21세기는 말 그대로 인간과 기계가 더불어 진화해 가는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의 세기로 불려진다. 컴퓨터와 생물학이 중심이 된 오늘의 과학은 컴퓨터라는 가상현실을 만들고 게놈지도를 완성시켰지만 이러한 성공은 생명에 대한 상상을 위축시키기보다는 반대로 그 상상력을 무한대로 확대시키고 있다. 달리 말하면 디지털시대의 현대인들은 사이버라는 또 하나의 허구적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사이버 공간을 이야기할 때 주목할 점은 컴퓨터의 가상현실(디지털)은 소설적 허구와 다르다는 것이다. 허구는 리얼리티를 지닐지라도 반현실적이지만 잠재적 가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재는 현실세계와 모순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컴퓨터가 이루어낸 사이버 세계는 실제로 인간이 행동하고 만나고 소통한다는 점에서 체험의 장이면서 창작의 공간이고 소통의 무대로서 역할도 한다. 수필이라는 글쓰기도 따지고 보면 독자와 1:1로 대면하여 삶의 진실성을 이야기하고 이상적 시공을 현실화하려는 글쓰기 행위라고 하겠다. 완벽한 인간성과 완전한 이상향에 접근하려는 수필의 주제의식은 디지털 공간이 추구하는 환상성과 매우 닮아 있다. 그 환상성은 상상의 힘으로 이상세계를 제시하고, 진실의 힘으로 현실의 삶을 개선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주제의식은 디지털적 사고와 기법을 바탕으로 한다. 수필이 아무리 사실문학이더라도 시간의 흐름만을 좇는다면 신변성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감성적으로 다양한 문화를 포용해 나가는 디지털세대의 아바타를 만족시켜 주기 위한 주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체험에 사회적 가치를 부여하고 다시 사회적 현상에서 개인의 삶을 이끌어내는 피드백 기법이 바람직하다. 개인과 사회의 교류는 개인적으로는 디지털 정보를 체험화하고 공동의식에서는 사이버 공간을 공유하는 정신적 접속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주제의 퓨전화는 활자가 이루어내지 못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작가의 사회적 식견을 향상시키게 된다.
수필이 시와 소설의 중간 장르라는 속성은 디지털시대에서 살아 남기 위한 가장 유익한 장점으로 손꼽힌다. 버추얼(virtual)이라는 단어가 ‘잠재적’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이유도 디지털 의식에서는 인간의 여러 활동영역이 통합되면서 학문과 예술의 벽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이르러 문학과 영상, 문학과 음악, 문학과 미술이 서로 만나고 테크놀러지와 인문학이 결합하는 추세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시적 요소와 소설적 요소, 희곡의 요소가 다채롭게 결합하는 열린 수필 외에도 바다수필, 의학수필, 건축수필, 원예수필 등의 테마수필이 다양해지고 음악수필과 영상수필 등이 주목을 받게 되는 이유도 디지털의 순기능을 수용한 덕분일 것이다.
퓨전(fusion)을 풀이하면 ‘미래의 비전’(future vision)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종배합은 21세기 문학의 풍향을 정하는 키워드로서 하이퍼수필도 본연의 성격에서 형식의 퓨전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이나 음악에 비하여 문학, 나아가 수필에서 이종배합에 대한 실험성이 더딘 이유는 수필계가 연령적, 계층적 신분에서 보수층이 다수를 차지하는 현실 때문이다. 윤재천 교수가 『수필학』 제8집 「21세기가 요구하는 퓨전수필」이라는 논문에서 퓨전수필을 “21세기의 문화적 특성에 따른 문화적 대응 방안”으로 평가한 것도 문학 생태계에서 살아 남는 것은 강자(强者)가 아니라 적자(適者)라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이렇듯이 디지털의 성격을 소화하여 문학적 개성을 찾아가야 하는 시대적 요청에 둔감한 문학은 결국 자생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펼치며 4 : 디지털 수필의 전략
수필 주제를 퓨전화하면서 의미화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전략방안이 요구된다. 전략이란 복잡한 상황을 가시화, 현현화, 체계화하여 목표치에 다다르는 공정이다. 전략의 개념 속에는 구체적인 작전(기법)이 담겨진다. 그렇다면 퓨전수필에 요구되는 전략은 컴퓨터, 사이버공간, 디지털 기술과 같은 기계적 기법을 단순히 빌려 오는 차용이 아니라 사이버공간과 디지털적 환경에 어울리는 의식을 작품에 담아내는 것이다. 디지털 주제의식을 구현하려면 구체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그 요건은 ‘과학적 동기성’과 ‘과학적 소재성’과 ‘과학적 표현성’이라는 3가지의 하부개념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창작은 동기부여에서 시작한다. 왜 그 주제를 이야기하여야 하는가라는 동기야말로 주제의식의 첫 조건에 해당한다. 디지털시대의 직관적 체험을 묘사하려는 작가의 동기는 과학과의 만남, 즉 실패학습과 성공사례와 같은 체험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사이버공간에서의 소통체험, 컴퓨터가 지니는 본성에 대한 재인식, 키치문화에 대한 반성적 탈주, 유전공학이 빚어내는 갈등 등이다. 그 동기가 구체적이고 절실할수록 주제는 더욱 폭 넓은 공감을 얻기 마련이다.
두 번째의 과학적 소재성이라는 전략화 요건은 디지털 주제의식에 적합한 가장 적절한 대상을 선택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전통적 수필기법으로 내려오고 있는 일물일어(一物一語)처럼 하나의 동기는 하나의 주제만을 지닌다는 일기일리(一氣一理), 하나의 사물은 하나만의 제재가 된다는 일물일재(一物一材), 하나의 제재는 하나만의 주제가 된다는 일재일제(一材一題)는 디지털 수필의 주제화 전략에서 매우 유익한 방안으로 간주된다. 수필의 지평을 넓혀 줄 수 있는 과학적 소재의 예를 들면 가상공간에서의 통신, 컴퓨터 본성의 의인화, 디지털 아트와 문학과의 접목, 키치 문화의 허실, 유전공학, 복제생물학에 대한 경계심 등이다.
세 번째, 과학적 표현성에 해당하는 주제는 과학적 논리와 다채로운 기호로 나타난다는 점을 말한다. 과학적 기호라 함은 객관성과 사실성과 인상미를 지닌 기표로서 통계표의 사용, 숫자와 기호의 삽입, 신문기사의 인용, 삽화 끼워 넣기 등으로서 이러한 기호는 독자에게 문자가 전달하지 못하는 이미지를 표현해 줄 수가 있다. 이러한 기법은 정보의 객관성 외에도 시적 효과를 높여 메타수필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준다.
주제의식이란 주제를 자기화하는 일종의 전략이다. 수필은 시와 소설과 달리 의미 부여의 창작이므로 독창적으로 제재를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전제가 될 수밖에 없다. 자연물에 대한 개성적 시각의 예를 들면 “그믐달의 굽은 허리가 더욱 고단해 보인다.”라면 모정을 나타내며, 휴대폰을 반려자로 의미화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혼성결합이 되풀이되는 디지털시대에서는 자연은 인공물과 결합하고, 무기물도 새로운 가치를 획득해 간다. 예를 들면 컴퓨터를 천자문에 비유한다든지, 클릭을 접속으로, 온·오프라인을 삶과 죽음으로, 휴지통을 버림의 미학으로, 비밀암호를 출입문의 기표로 해석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의 의미화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일구어내면서 디지털시대의 특성을 반영하는 효과를 지닐 것이다.
그렇더라도 디지털 수필의 주제의식은 상상력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지시적이고 직설적인 설명은 소통과 공감의 반경을 축소시키기 마련이다. 독자와 디지털 의식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발명품이 지닌 역기능이나 순기능을 관찰하고 기록하기도 하지만 그 정서적 미학과 진리의 본질을 찾아내야 한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상징, 비유, 암시, 은유를 확대한 기호의 활용이다. 디지털 소재를 주제화하기 위해서는 상상과 비유가 무엇보다 필요하며 디지털이야말로 상상 그 자체일 수가 있다.
나아가 과학적 주제에 서정적인 결이 나타나도록 유의한다. 작가 자신의 안목과 창의성으로 소재와 주제를 접목시키고 과학성과 인문성을 결합시키되 수필적 서정성을 유지하는 여유가 바람직하다 하겠다. 과학적 소재가 지니는 금속성과 문학이 지니는 감수성이 어울려야 정보가 효과적으로 전달되면서 문학으로서 감동을 유지한다. 그렇다고 수필적 감동에 치우친 나머지 과학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면 신파조의 넋두리가 되어버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과학의 윤리성을 확보할 것이다. 수필은 인생을 관조하여 삶에 투영된 사회적, 철학적 의미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해석이다. 사이버공간은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를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쌍방향의 관계로 변화시키지만 속중화라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우려가 대단히 많다. 그렇다면 디지털시대의 수필은 물질화되고 속중화한 문화적 병폐를 개선하여 삶의 진정성을 제시할 때 제자리를 지니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수필은 구심력에 해당하는 윤리성과 원심력에 해당하는 문화지식이 상호 균형을 이룰 때만이 작가의식이 반영된 수필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펼치며 5 : 디지털 수필의 표현양식
디지털시대의 수필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는 형식의 변화이다. 디지털 문학이 활자문학과 차이를 지니는 부분은 표현양식에 있는 만큼 형식의 실험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수필집과 한 편의 수필을 발표하는 형식은 물론이거니와 수필을 창작하는 기법도 고려 대상에 포함된다. 예를 들면 두 이야기를 병치시키는 방법으로 의미와 상징의 효과를 강화한다든가, 몽타주를 활용하여 입체적 의미를 확보한다든가 콜라주를 통하여 생생한 현장감을 제공하는 것도 수필문학의 형식을 넓히는 노력에 포함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수필의 내적 기교는 생략하고 외적 형식에 관해 설명하기로 한다.
(1) e-book 수필집
지난 20세기 동안에 가장 빠른 진보를 보인 인문학 분야는 언어학이다. 컴퓨터의 등장은 언어학에도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 컴퓨터 글쓰기는 기존의 텍스트 개념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현대는 전자의 시대로서 전자를 이용한 교육, 출판, 광고, 레저산업이 늘어가는 추세이며 전자시집, 전자산문집을 생산하는 출판사도 적지 않다. 전자텍스트는 단순히 컴퓨터로 작업된 텍스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고안하고 정서적으로 구성하고 예술적으로 나타낸 상징적 구조1)를 지니는가의 여부에 있다. 전자출판은 하나의 작은 CD롬에 수백 페이지 이상의 활자정보를 수록하는 양적 효율성 외에도 쉽게 소지하거나 시공의 벽을 뛰어넘어 보급되는 장점을 지닌다. 나아가 음악, 사진, 미술 등의 분야와 제휴하여 멀티미디어로서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멀티미디어는 눈으로 읽고 귀로 듣는 시청의 효과를 통해 독자의 전파력과 수용력을 극대화하는 문학 전달단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요즈음 출판시장에서는 이미 시 낭송테이프, 가사와 화보를 삽입한 book-CD 형식의 시집이 선보이고 있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한 순간에 하나의 행동에 집중하기보다는 먹고, 읽고, 듣고, 걷는, 소위 동시다발적 행동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듣고 읽고 느끼는 수필의 발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수필은 메시지가 분명하고, 짧은 시간 내에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성을 훼손하지 않고서도 독자에 대한 친화성과 근접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자수필집이나 CD수필집은 어디까지나 표현수단 내지는 유통수단일 따름이다. 독자들이 오감으로 반응한다고 할지라도 종이수필집은 나름의 존재 이유를 지닌다. 그것의 최대 장점은 전자책이나 CD와 달리 듣기 위한 장치나 장비가 필요 없다는 점이며, 시각의 집중력에 호소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두 매체의 장단점을 아우르는 방법을 디지털시대의 수필가는 모색할 필요가 있다.
다만 영상이나 음악은 즉각적이며 찰나적이기 때문에 영상의 이미지화(imaginableness)와 문학의 심상화(Imagination)의 균형과 상호보완을 통해 감각과 상상, 직관과 인식, 감상과 사색의 평형이 바람직하다.
(2) 하이퍼텍스트
영상시대의 문학은 영상을 매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담화(discourse)로서 문학에 영상이라는 시청각적 기능이 첨가할수록 공감의 폭은 커진다. 다시 말해서 청각적(audial), 시각적(visual), 구어적(oral), 문자적(written) 요소가 상호 합성할수록 정보의 소통력은 탄력을 얻어 간다. 무한대의 전파공간에서 영상과 음향이라는 하이퍼적 요소를 수용할 경우 다수의 독자를 확보할 수 있으며 언어가 지닌 한계를 용이하게 극복할 수 있다. 여기에 문자로 이루어진 수필이 영상미학을 활용하여 CD나 DVD로 제작한 하이퍼수필이 나타나는 계기가 된다. 동시에 문자, 소리, 그래픽, 동영상 등과 결합한 멀티수필은 활자수필이 지닌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독자의 상상력과 경험을 강화시켜 새로운 미적 체계를 정립해 준다. 세대와 계층을 불문하고 무한대의 독자가 생성되면서 동시에 작가와 사이버독자 간의 쌍방향적 소통도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쌍방향성은 수필의 본질에서 매우 의미 있는 요소이다. 수필은 1인칭 작가가 독자와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의 문학이다. 시처럼 독백적인 담론이 아니며, 소설화자가 끼여들지도 않으며 드라마처럼 연기자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수필을 작가와 독자가 산책을 하면서 나누는 인생론이라고 말하는 것도 독자와의 대화를 중시하는 증거이다.
수필의 대화주의는 자아와 타자를 구별하지 않고 논제에 대한 찬반과 배타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하일 바흐친(M.M. Bakhtin)의 대화주의2)를 연상시켜 준다. 흔히 수필을 내적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수필의 본질을 일부만 이해한 것이다. 문학은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작가의 사상이나 정서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소통을 지향한다. 독백은 대화의 일부일 뿐이며 수필의 내적 독백은 드라마의 독백과 달리 누군가 듣고 이해하기를 바라는 기대감을 깔고 있다. 개방성을 전제로 하는 이러한 대화성은 쌍방향의 소통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수필이 변방문학이나 주변문학으로 정체되어 버린 원인 중의 하나도 수필을 내적 독백 문학에 한정시킴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강화시킬 수 있는 문학적 전달 수단의 계발을 소홀히 한 데 연유한다. 더구나 1970년대 이전의 일부 작가들이 주 소통 수단으로서 시와 소설을 중시하고 수필을 자신의 심경을 독백하는 종속수단으로 삼았던 병폐는 독자와의 대화를 저해한 주 원인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바흐친의 대화적 원리를 수필에 적용시켜 보면 다성적 문학으로서 수필의 열린 속성을 재확인하듯이 대화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수필론을 실천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동시에 멀티수필이든 하이퍼수필이든 새로운 형식은 새로운 내용을 담아야 한다. 스위스 태생의 문예비평가인 에밀 쉬타이거(Emil Staiger)가『시학의 근본 개념』에서 예술의 표현 양식이 아무리 바뀌어도 장르의 정신은 그대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형식은 주제를 전달하는 최적 구조이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형식과 내용이 유기적인 통일성을 지니는 퓨전수필과 멀티수필의 공존이 하이퍼텍스트에서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닫으면서
지난 20세기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변혁이 이루어진 시기에 해당한다. 디지털세기라고 할 정도로 21세기의 특징은 의사소통 매체의 혁명이라고 하겠다. 전화, 영화, TV, 컴퓨터, 무선전신이라는 다매체와 통합매체를 통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면서 인간의 문화는 원시화와 중성화와 집시화로 나아가고 있다. 디지털시대의 소통은 신경순환계와 같아서 만일 한 쪽 혈관이 막힌다면 전체 신경계에 치명적인 장애가 발생하므로 작가와 독자 간의 소통매체인 문학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소재의 인식과 주제의 착근과 표현의 형식에서 효과적인 전략 수립이 요구된다.
문학의 정체성(identity)은 장르의 운명을 결정짓는 축이다. 그 축은 형식과 내용에서의 실험정신을 근거로 한다. 수필의 고유한 원형을 보존하는 전통성이 구심력이라면 문학적 지배 영역을 확충해 나가는 실험정신은 원심력에 해당된다. 그러기 때문에 수필의 전통적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정체성의 문제를 전향적으로 다루고, 이를 바탕으로 디지털시대에 요구되는 실험적 발전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수필은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 문학이면서 체험을 미적 구조로 표현하여야 하는 미래지향적 문학이기도하다. 수필의 원어가 ‘에세’라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에세는 ‘시도해 본다’, ‘실험해 본다’라는 의미로서 실험정신이 수필의 정체성 중의 하나임을 밝혀 주는 어원이다. 수필장르의 발전을 담보하는 실험정신은 전통이라는 구심력과 더불어 수필의 양가적 가치를 형성하기 때문에 수필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수필비평가와 수필이론가의 보다 적극적인 협력이 요청된다. 그 가운데서 어떤 문학이든 작가의 개성이 바탕이 된 장르적 실험이 이루어질 때 그 문학의 미래가 담보된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그 중에서 작가의식은 디지털시대의 수필이 논의하여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여겨진다. 수필작가는 평면적인 서사성을 탈피하고, 소비적인 허구론에서 벗어나며, 타장르와 타학문을 아우르는 주제의 퓨전화를 통해 디지털 문화의식에 부응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시대에 수필가와 수필작품이 존재하는 디지털 코드라고 하겠다.
그 가운데서 수필인이 지켜야 할 덕목은 진실이다. 문학을 통해 사랑을 받고 싶은가, 그러면 시를 써라. 인기를 얻고 싶은가, 그럼 소설을 써라. 믿음을 받고 싶은가, 그럼 수필을 시작하라. 하지만 수필에도 분명히 순수수필과 대중수필, 무거운 수필과 가벼운 수필, 본격수필과 여기수필, 고급수필과 주변수필, 문학수필과 비문학수필의 구별이 있다. 그리고 누구든지 수필을 쓰되 아무나 쓸 수 없는 수필의 수준을 지향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