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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5일 선한목자교회 창립 8주년 감사 주일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8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찬송 17장입니다.
광고/ 헌금/ 기도하겠습니다. 성경은 요10:1-18절(신163쪽)입니다.
제목: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 창립 8주년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우리의 형편과 사정으로 세우진 교회인 것 같지만, 지난 주일의 말씀처럼 우리 선한목자교회는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믿고 싶습니다.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제’라는 고백과 같이 ‘거룩한 공회, 즉 성도의 교제’라는 ‘하나의 교회’만이 존재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엡4:4-6절입니다. “몸(교회)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그렇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하나이지만, 우리 주위에는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도 그들 중의 하나입니다.
성도 여러분, 많은 교회 중에 우리 ‘선한목자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요? 창립 8주년을 맞이하면서, 오늘 본문(10:1-18)을 통해서 우리 교회가 존재할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10:1-18)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9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원래 성경에는 장과 절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발라 치유하였으니, 율법을 범한 죄인이라고 주장하고, 보게 된 소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오신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논쟁이 있었고(9:13-33), 결국 보게 된 소경은 출교되었습니다(9:34). 예수님은 그를 만나 자신이 ‘인자(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시하셨고, 그는 예수님을 믿고 경배하였습니다(9:38).
이것들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인 9:3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보게 되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달렸습니다.
“우리도 맹인인가?”(9:40)라며 바리새인들이 반발하자, 9:4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보게 된 소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오신 인자인 것을 알게 되어 죄가 없는 의인이 되었지만, 본다(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여 죄인으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가지고도 성경이 계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교만하여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의 계시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의 정신입니다. 개혁주의는 우리의 부족함이나 잘못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하다면, 단지 보수주의자가 되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오신 그리스도(9:22)이시며 인자(9:35)이심을 ‘양의 우리 또는 목자와 양의 비유’(1-5)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양의 우리 또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양의 우리에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이며, 문으로 들어가는 자만 양의 목자라는 것입니다(1-2).
둘째, 양의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는 것입니다(3). 여기서 강조점은 목자는 자기 양들을 다 그리고 잘 안다는 것입니다.
셋째,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를 따르지만(4), 타인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도망한다는 것입니다(5).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의 비유를 알지 못한 바리새인들(6)에게 ‘양의 우리의 비유’를 다시 풀어 설명하십니다(7-18). 우선, ‘양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그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목자’는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시23:1, 겔34;15)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 보낸 다윗의 아들인 메시아(겔34:23-24)와 백성의 지도자들(겔34:7-10)을 가리킵니다.
첫째로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선언하십니다(7-10).
7절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2).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는 것은 ‘양의 우리(교회)’에 들어가는 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고,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만이 유일한 ‘양의 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행4:12절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러나 8절입니다.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그)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나(예수)보다 먼저 온 자’은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온 선지자들을 말하지 않고,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양의 우리에 들어온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양’, 즉 예수님의 양들은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양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알지만 그들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4-5).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유일한 양의 문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고 따르고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왕)이심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과 도적과 같은 지도자를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10).
먼저, 도적과 같은 지도자의 목적입니다. 10a절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여기서 사용된 세 동사가 점층법적으로 도둑과 같은 지도자의 목적과 태도를 강조합니다. 도둑과 같은 지도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양들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철저하게 멸망시키려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성취하는 방법은 양들 위에 군림하여 거짓으로 속이며, 강제적이며, 폭력적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 이익을 위해서 양들을 이용할 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10b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서도 사용된 두 동사가 점층법적으로 예수님의 목적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양을 구원하여 생명을 얻게 하고, 계속해서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떠한 지도자들입니까? 도적과 같은 지도자들입니까? 예수님과 같이 양들을 위하여 종으로 섬기는 지도자들입니까? 고후4:5절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바울은 주 예수의 복음과 사역자가 성도들의 종이 된 것을 같이 전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울과 같이 주 예수님을 위하여 성도들을 종으로서 섬기고 있다면, 우리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십니다(11-18).
11a절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는 것을 삯꾼과 대조하여 설명하십니다(11-13).
11b절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즉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목자입니다.
그러나 삯꾼은 다릅니다. 우선 12절입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외형적으로 교회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자신의 양이 아닙니다. 삯꾼의 관심은 양들에게 있지 않고 오직 자신의 보수(유익)에만 있습니다. 삯꾼은 주인의식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지도자가 선한 목자인가 삯꾼인가에 대한 좋은 시험은 ‘이리’(위험)가 나타날 때입니다. 이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선한 목자인가 삯꾼인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지만, 삯꾼은 13절입니다.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예수님은 다시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시면서(14a),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14-18).
그러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들과의 특별한 관계, 즉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14-15절입니다. “P)나는 선한 목자라. A)내가 내 양을 알고 B)양도 나를 아는 것이, A’)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B’)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E)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것은 내용상 서언(P)와 결언(E)를 가진 반복 대구 구조입니다. 서언(P)와 결언(E)은 11절을 반복합니다. 즉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이유가 자신의 양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 14b-15a절입니다.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여기서 우리말 성경은 ‘내 양’으로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나의 것’입니다. 이것은 양들이 예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알고, 아는, 아시고, 아는’이라는 동사는 ‘안다(기네스코)’라는 현재형의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입니다. 이것도 예수님과 양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가 서로 한 몸이 되어 아는 것과 같이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특히 예수님이 자신과 양이 서로 아는 것이 자신과 아버지가 서로 아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14b-15a).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구별되지만 분리할 수 없는 영원히 하나입니다. 이같이 예수님과 양의 관계도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영원히 하나입니다. 이것이 언약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의 문제가 선한 목자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죄악과 그 결과로 저주와 사망의 문제가 예수님의 문제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들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대신하여 창조(율법) 언약에 따라 양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인 죽음, 즉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양들의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예수님이 오신 목적(10)이며, 예수님이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대속의 죽임을 당하신 이유입니다(14-15). 막10: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그런데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따라 유대인들의 선한 목자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16절입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여기서 ‘다른 양들’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한 목자이신 에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엡2:19-22).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정도로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 특별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서로 알고 있다면, 우리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다시 목숨(부활의 영광) 얻기 위해서입니다.
17절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여기서 ‘버린다(티데미)’라는 동사는 원래 ‘예치한다. 저축한다’라는 의미로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의 부활과 그의 양들의 부활을 암시합니다. 요12: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즉 에수님 자신만 아니라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10)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양으로 부활 생명을 얻게 하시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 즉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경험하고 있다면(고후4:10-11), 우리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사랑의 계명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이 계명(엔톨레)’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계명’은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고 다시 얻을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내린 결정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강제적으로 아들에게 부여하신 의무가 아니라, 상호 간의 동의로 의해서 이루어진 것(구속 언약)입니다.
그래서 ‘계명(엔톨레)’은 요한복음에서 항상 사랑과 관련해서 사용되었습니다(11번). 이 사랑은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사랑의 순종과 동시에 자기에게 속한 자들에 대한 완전한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13:1).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의 계명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스스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명(율법)은 사랑입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으로 알고 자발적으로 순종한다면, 우리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많은 교회 가운데서 우리 교회가 존재할 이유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은 바리새인들과는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를 영원히 존재할 자로 인정하셨습니까? 소경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지만, 예수님의 치유와 계시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 때문에 영원히 존재할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보게 된 소경’과 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많은 교회 가운데 존재할 이유가 있기를 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알고 있고, 알아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고후3:18). 빌3:13-14절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성도 여러분, 창립 8주년을 맞이해서 우리 교회가 바울과 같이 겸손하게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려고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찬송 569장을 부르시고 다 같이 기도하신 후에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