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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
현실공간에서 詩를 쓰지 않는 또 다른 한 손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머님께.
이 몸이 불초하여 스무 해가 넘어서야 당신께 서신을 다시 올려보는군요. 혈기가 방자하였던 시절, 詩에 들떠 있던 저에게 “죽이 나오느냐? 밥이 나오느냐?” 하시며 아침저녁으로 나무라셨던 분도 당신이셨고, 군(軍)에 간 자식을 위해 시 전문지 <시문학>을 매월 소포로 보내주셨던 분도 당신이셨습니다. 제대 이후 당신의 깊은 뜻을 받들어 결국 詩를 접고 아등바등 살아오다가 어찌어찌하여 불초 소생 시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詩를 포기하게 한 것도, 詩人을 만든 것도 당신이기에 원망이나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난밤 꿈자리가 하도 뒤숭숭하여 몇 자 적어 보냅니다. 어머니! 아무리 꿈속이었어도 어머니의 힘은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더군요. 어머니께 손목을 꽉 잡힌 제가 문밖으로 질질 끌려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 머 니 문 학 이 죽 어 가 고 있 어 요.” “어 머 니 詩 가 아 파 해 요.” 목구멍이 잠긴 채 속으로만 외치고 있었는데 저를 끌고 가던 당신께서 갑자기 멈추시더니 제 손목을 탁 놓으시며 “네가 한 일이다.” “네가 알아서 해라.” 일러주시고는 안개 속으로 숨어버리시더군요.
봄이 오는 소리/땅을 깨우니/나뭇가지 눈을 비빈다//봄이 오는 소리/듣지 못하니/나뭇가지/하늘에 귀 만들어/샘물 소리 듣게 한다//봄이 오는 소리/냇가로 와/빛으로 앉으니/바람 불러/동산에 꽃씨 뿌리고/흙 향기로/푸른 하늘 불러본다//
ㅡ 김중영의 <봄이 오는 소리> 전문
하얀 구름/호숫가에 앉아/고향 마당 바라보며/영혼의 노래 부른다//생각으로/떠나는 그림자/긴 한숨을 앞세우니/돌아서지/못하는 길가에/저녁노을 손을 흔든다//바람으로 찾아가는/언덕에서/쉬어 갈 곳 찾으니/어둠이 자리 잡아/새벽종/가지 끝에 걸어두고/잎새 위에 잠을 청한다//
ㅡ 김중영의 <호숫가에 앉아서> 전문
빈 둥지 위에/바람이 쉬어간다//쉬었다 떠난 자리/영혼의 그림자/바람을 불러본다//가는 바람/돌아보지 아니하고/오는 바람/자리 없어/쉬어가지 못하니/그림자 먼길 떠나/빈 둥지로 남겨둔다//
ㅡ 김중영의 <빈 둥지> 전문
세상을 순리대로 살아가라고 지금도 제게 가르치시는 어머니께서 무척 공감하실 것 같아 시인의 시 3편 모두를 가장 먼저 올려보았습니다. 언뜻 보아서는 자연을 노래한 서정시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연의 순리와 사랑에 동화되어 함께 흐르고자 하는 인간의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관조주의적인 작품입니다. 대자연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자연의 질서에 깊숙이 천착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엿보입니다. 어머니! 시인은 자연이라는 시적 공간 안에서 시간의 변화와는 별개로 무위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미사여구가 아닌 부드럽고 걸림이 없는 정갈한 시어만을 사용하여 자신의 동양적 세계관마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에 순화되어짐이 달관이나 초월이라는 말로 일컬어짐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붉은 입술로
ㅡ 김광련의 <홍매화> 전문
어머니! 철광석이 순철로 재탄생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광로 안에서 수천 도로 끓어올라 갖가지의 불순물들이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짧은 詩일수록 그만큼 정제가 많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난 투계가 쪼아댄 햇살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이걸, 가학적이라고 수사를 붙여 성토할 수 없었다 겁에 질려 급하게 도망을 치던 닭들이 발을 꼬며 기도를 역류한 거친 숨에 휙 꼬그라지고 있었다 맨살의 사랑을 엎치고 덮친 역신처럼? 암탉이 수탉의 벼슬을 물고 교성을 지르고 있었다 놀라 자빠지는 탕건을 쓴 서라벌의 새벽 깃털 빠진 상처가 잔혹하다 의혹 없이 달빛 아래 방치한 사랑 아무리 이탈을 소망해도 어둠의 소굴을 탈피할 수 없었고 침낭 속 뒤엉켜있던 음탕함만 역신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이건, 더 잔혹하다 멍든 발끝에 날카로운 면도날을 달고 시퍼렇게 쿡쿡 세상을 찍어주고 싶었다 역신이 잠든 밤 투계장으로 달려가 통정을 묵과한 달빛을 너덜너덜 갈게 놓고 싶었다 쏟아지는 분노로 온 세상의 피를 적셔 싸우고 싶었다 그러다 낯 뜨거운 화면 속으로 뛰어들어 비명 지르고 싶었다 투계장 밖 잔뜩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던 여린 병아리들 철쭉꽃에 막 날아와 아비의 투계장면을 관전하려던 나비를 톡 쪼아 물었다. 피가 꽃잎마다 질퍽하게 고였다 이렇게 생명은 피로 태어나고 피로 최후를 지웠다 싸움에 승리한 닭들이 어둠을 투계장 밖으로 쫓아내고 있었다 처절한 투계의 끝 일확천금을 거머쥔 역신이 숫기없는 사랑을 꼬드겨 산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거기, 처용이 급간의 벼슬을 버리고 먼저 와 있었다
ㅡ 이용균의 <산으로 간 처용> 전문
어머니!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너무 비대해졌나요? 물질만이 대접을 받을 뿐 정신은 점점 공허해지고 있습니다. 패권주의가 득세하여 정치, 경제, 사회, 국제관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헤게모니를 서로 먼저 쟁탈하기 위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구석구석에서는 지금도 집단이나 개인 간의 경쟁이 도(道)를 넘어 동족상잔의 비극마저 연쇄적으로 발생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닻을 내린 포구에 빗방울이 굵게 떨어진다.
스쳐가는 바람과
그리움이 옷소매에 절여져 짠기를 뱉을 때
빗방울이 깡통불에 닿으면
빗방울 소리가 내 영혼에 닿으면
ㅡ 한영숙의 <빗방울 소리가 내 영혼에 닿는다> 전문
어머니! 어느 시인이 제게 詩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詩는 사기다)라고 대꾸를 하였습니다. 그가 시인임에도 그리 말하였는데 수긍을 해 주니 괜히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럼 詩人은 사기꾼인가?) 하구요. 生과 死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정반대일 것 같으나 포장만 그러할 뿐 각각 서로 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완벽히 말입니다.
어머니! 지금까지 언급한 네 분의 작품 말고도 회화성이 짙게 배인 이문조의 <욱곡의 사계>, 내밀하고도 육감적인 언어감각이 돋보이는 손성미의 <목련>, 시어에 힘이 넘쳐나는 한승석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고독과의 동반탈출을 모색하는 홍미영의 <고독> 등 나머지의 시편은 찾아뵙는 날 제가 직접 낭독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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