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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3.24.PM 2시)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조도심심(助道甚深)
화엄경 한단락 공부하겠다. 오늘은 보살문명품(菩薩問明品) 조도심심(助道甚深)이라고 하는 부분을 가지고 공부하겠다.
8. 조도심심(助道甚深)
1) 문수보살이 지수보살에게 묻다
(열 가지 수행)
37조도라는 말도 있고, 여기서도 조도심심(助道甚深)이 있고, 조도(助道)라는 말이 경(經)에는 자주 나온다.
왜냐하면 도를 돕는다, 돕는 도 이렇게도 해석해도 상관이 없는데 대개 참선하는 사람들, 또는 기도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보면 자기가 믿고 있는 한 가지 일만 가지고 모든 수행을 다 해결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그렇다면 불교에 조도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밥만 먹지 반찬은 왜 먹는가?
달마스님이 잘못 말씀하신 내용이 하나 있다.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이랬다.
‘마음 하나 관하는 일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하고 있다’ 이렇게 말을 잘못해서 뒷사람들이 그것이 맞는 말인 줄 알고 그 외의 것은 전혀 하지 않는다.
계행도 별로 관심 없고,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사섭법 사무량심 기타등등 많고 많은 수행법, 심지어 기도까지도 다 무시하고 그것은 크게 돌보지를 않는다.
그것이 전부 조도(助道) 도를 돕는 보조적인 것인데, 우리가 ‘밥 먹는다, 밥 먹는다’ 하지만 밥만 먹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전부 반찬을 더 많이 먹는다.
또 요즘은 반찬을 밥보다도 더 많이 먹는다.
옛날 사람은 밥만 가지고 물에 말아 먹기도 하고, 또 국만 있어도 밥 한 그릇 다 먹을 수도 있었다. 현대사회에서는 밥 한 그릇 가지고 만족하지 않는다. 반찬을 골고루 여러 가지로 먹는다. 그것이 상식이고 또 여러 가지를 먹어야 영양이 치우치지 않는다.
이 수행법이라고 하는 것은 더욱더 그렇다.
그래서 조도(助道) 37도품이 있고, 심지어 대만에는 중대선사라고 하는 사찰이 37층짜리 근사한 사찰이다. 37층 짜리 집 하나가 사찰인데 그 안의 내용이 어마어마하다. 온갖 참선수행, 기도수행, 교육관, 기념관 등이 다 갖추어져 있다. 그것은 뭔가? 37조도품, 서른일곱 가지의 도를 돕는 모든 조건들을 그 안에 다 갖추었다, 이런 뜻이다.
여기서 조도심심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한 가지에 치우쳐서 수행하면 안된다,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내용이다.
이시(爾時)에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이 문지수보살언(問智首菩薩言)하사대 불자(佛子)야 어불법중(於佛法中)에 지위상수(智爲上首)어늘 여래(如來)가 하고(何故)로 혹위중생(或爲衆生)하사 찬탄보시(讚歎布施)하시며 혹찬지계(或讚持戒)하시며 혹찬감인(或讚堪忍)하시며
그때에 문수사리보살이 지수보살에게 물었습니다.
“불자여, 불법(佛法) 가운데 지혜가 으뜸이거늘 여래께서 무슨 연고로 혹은 중생을 위하여 보시(布施)를 찬탄하시며, 혹은 지계(持戒)를 찬탄하시며, 혹은 감인(堪忍)을 찬탄하시며”
감인(堪忍)은 인욕이다.
혹찬정진(或讚精進)하시며 혹찬선정(或讚禪定)하시며 혹찬지혜(或讚智慧)하시며 혹부찬탄자비희사(或復讚歎慈悲喜捨)니잇고 이종무유유이일법(而終無有唯以一法)으로 이득출리(而得出離)하야 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니이다
“혹은 정진(精進)을 찬탄하시며, 혹은 선정(禪定)을 찬탄하시며, 혹은 지혜(智慧)를 찬탄하시며, 혹은 자(慈), 비(悲), 희(喜), 사(捨)를 찬탄하십니까? 그러나 마침내 오직 일법(一法)으로써 벗어남을 얻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법(一法)으로써 한가지 법으로써 벗어남을 얻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사람은 없습니다
열심히 수행을 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가 불교를 인연으로 해서 불교 공부를 한다고 하면 이러한 것을 정확하게 알고는 있어야 된다.
‘내가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고 말 것이 아니라, 이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스스로 수행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는 기회가 있든지 간에 어쨌든 이 열 가지는 최소한도 갖추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는 말이 참 잘못된 것이다.
마음 하나 관하는 것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한다.
그 마음 하나 관하는 것을 지혜라고 하고 그것이 으뜸이라고 하자. 그런데 여래께서 혹은 보시를 권하기도 하고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자(慈) 비(悲) 희(喜) 사(捨) 여러 가지가 많지만 아주 근본이 되는 열 가지만을 여기서 들어서 도대체 치우치지 마라, 치우쳐서는 안된다 하는 원융무애한, 원만한 수행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2) 지수(智首)보살의 답
가. 설(說)할 것을 허락하다
시(時)에 지수보살(智首菩薩)이 이송답왈(以頌答曰)
그때에 지수보살이 게송으로 답하였습니다.
불자심희유(佛子甚希有)하야 능지중생심(能知衆生心)하시니
여인소문의(如仁所問義)라 제청아금설(諦聽我今說)호리이다
불자여 매우 희유해서
능히 중생의 마음을 아시니
어지신 이의 물으신 뜻과 같나니
제가 이제 설함을 자세히 들으소서.
‘중생의 마음을 아시니’ 그랬지 않는가.
우리나라를 두고 이야기하면 한 2천여 명 되는 선객들이 지금 줄기차게 선방에 앉아서 참선 하나만 하고 그 외의 것은 전혀 돌보지 않는다. 다른 수행은 전혀 안한다. 그것이 최고라고, 그것 하나만으로 다 해결이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그에 대한 어떤 오류를 여기서 아주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대목이다.
나. 심성(心性)이 같지 않다
과거미래세(過去未來世)와 현재제도사(現在諸導師)가
무유설일법(無有說一法)하야 이득어도자(而得於道者)니라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도사께서
한 법(法)만을 설하여
도(道)를 얻는 이는 없느니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하는 소리를 아주 정면으로 부정하는 부분이 되겠다.
물론 화엄경이 훨씬 먼저 있었다.
화엄경에다 대면 달마스님은 아주 후대사람이다. 선배인 부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해놨는데도 불구하고 뒷사람들이 왜곡을 하는 것이다.
화엄경을 안보셨는지, 봐도 복잡하고 귀찮아서 이렇게 안하는지, 그런 경우가 많다. 못 본 경우도 많다.
그리고 또 여러 가지 것을 하려니까 솔직하게 귀찮은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많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도사께서
부처님께서, 도사께서, 선지식께서
한 법(法)만을 설하여
도(道)를 얻는 이는 없느니라
불지중생심(佛知衆生心)의 성분각부동(性分各不同)하사
수기소응도(隨其所應度)하야 여시이설법(如是而說法)하사대
부처님은 중생들의 마음과 성품이
각각 같지 않음을 아시어
그 마땅함을 따라 제도하여
이와 같이 법을 설하시니라.
마땅함을 따라서, 편의를 따라서 ‘이 사람에게는 이러한 수행법이 필요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러한 수행법이 필요하고’ 그것이 마땅함을 따라서 제도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저 ‘이뭣고’만 하라고 한다든지 ‘무(無)자’만 하라고 한다든지 무슨 ‘판치생모(板齒生毛)’만 하라고 한다든지 ‘부모가 나를 낳기 전에 무엇이 참나인가’ 수십 년 읊조리고 있는 지도 방법인데 그것을 가지고 다 통한다고 그렇게 치우쳐서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은 너무 편협한 생각 아닌가?
그것 하나만 가지고 모든 문제해결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치우치고 편협한 생각이다.
수행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은 차치하고, 이 이론만 가지고 우리가 한 번 적나라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마음과 성품이
각각 같지 않음을 아시어
그 마땅함을 따라 제도하여
이와 같이 법을 설하시니라
결코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 하나 관하는 것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하고 있다, 하는 것은 제발 오늘 이 순간부터 우리가 버려야 할 주장이다.
저도 선방에 있을 때 이 이야기에 매료되어서 이 이야기를 많이 한 바가 있다. 그런데 그때는 저 혼자 수행했지,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펼쳐놓고 많은 사람에게 설법을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오직 저 혼자에게만 그저 마음의 어떤 위안을 삼고 수행방법을 삼고 있었을 뿐이었다.
다. 근기 따름을 찬탄하다
간자위찬시(慳者爲讚施)하고 훼금자찬계(毁禁者讚戒)하며
다진위찬인(多瞋爲讚忍)하고 호해찬정진(好懈讚精進)하며
아끼는 사람에겐 보시를 찬탄하고
계(戒)를 파하면 계행(戒行)을 찬탄하며
진심(瞋心)이 많으면 인욕을 찬탄하고
게으른 사람에겐 정진(精進)을 찬탄하도다.
관심일법이 총섭제행이 아니다.
아주 인색한 사람이 있지 않는가?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보시가 니한테는 제일 약이다. 최고가는 보약이다. 수행으로써 제일가는 보약이다. 그러니까 보시를 좀 하는 훈련을 하라’ 그다음에 계를 파할 것 같으면, 계를 안 지킬 것 같으면 ‘계행을 지키는 것이 너한테는 보약이다. 그보다 큰 소득이 없다’ 이렇게 이해를 시키고, 진심(瞋心)이 많을 것 같으면 인욕을, 화를 잘내면 ‘제발 참아라, 제발 참아라, 어질 인(仁)자 하나가 사람을 살린다’ 어질 인(仁)자 하나가 사람을 살린다, 그러한 이야기가 많지 않은가.
그러한 수행법도 정말 관심일법보다도 훨씬 더 큰 효과가 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정진을 찬탄한다.
잘 알기는 아는데 게을러서 도대체가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정진을 찬탄한다고 했다.
이것이 부처님의 원만한 법이다. 불교의 원융무애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원융한 법이다.
난의찬선정(亂意讚禪定)하고 우치찬지혜(愚癡讚智慧)하며
불인찬자민(不仁讚慈愍)하고 노해찬대비(怒害讚大悲)하며
생각이 어지러우면 선정(禪定)을 찬탄하고
어리석은 사람에겐 지혜를 찬탄하며
어질지 못하면 자민(慈愍)을 찬탄하고
성을 내어 해치면 대비(大悲)를 찬탄하도다.
생각이 어지러우면 선정(禪定)을 찬탄하고
산란심이 많고, 마음이 분산하고, 마음이 산란하다. 현대인들 특히 그렇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선정을 찬탄하고
어리석은 사람에겐 지혜를 찬탄하며
어질지 못하면 자민(慈愍)을 찬탄하고
자비와 불쌍히 여기는 것을 찬탄하고
성을 내어 해치면 대비(大悲)를 찬탄하도다
대비, 크게 어여삐 여김을 찬탄하도다.
그렇게 해서 원융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완벽한 사람 부처님 같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아니하는 원만한 사람, 원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수행을 원만하게 하고 소견이 첫째 원만한 소견을 가짐으로 해서, 수행일선에 나아갈 때 원만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모든 것이 그렇게 돌아간다.
우척위찬희(憂慼爲讚喜)하고 곡심찬탄사(曲心讚歎捨)하시니
여시차제수(如是次第修)하면 점구제불법(漸具諸佛法)이니라
근심이 많으면 환희를 찬탄하고
마음이 굽으면 버릴 것을 찬탄하시니
이와 같이 차례로 수행하면
모든 불법(佛法)을 점점 갖추리라.
근심이 많으면 환희를 찬탄하고
사람이 또 근심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늘 비관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환희를 또 찬탄해야 한다.
마음이 굽으면 버릴 것을 찬탄하시니
치우친 마음이다. 굽었다 하는 것은 성질이 꼬부랑하다, 마음이 어떻게 해서 왜곡되어 있다. 그것이 곡(曲)이다. 굽을 곡(曲)자 곡심(曲心) 마음이 굽으면 버릴 것을 찬탄한다 ‘그런 마음 다 버려버리고 어디 치우치지 않는 소견을 가져라’ 이렇게 찬탄한다
이와 같이 차례로 수행하면
이와 같이 차례로 수행하면
모든 불법(佛法)을 점점 갖추리라
모든 불법을 점점 갖추리라.
그래야지 어느 한 가지 ‘이뭣고’ 하나만 들고, 그것도 정말 일심불란으로 잘 나가면, 일사천리로 순풍에 돛단 듯이 그렇게 나가면 그런대로 소득이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
특히 현대인들은 아주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에 그저 정말 한 시간 앉아있는데 화두를 열 번도 더 챙기고 스무 번도 더 챙긴다. 놓쳤다가 들고, 놓쳤다가 들고, 놓치면 그것 찾으러 간다고 한참 찾으러 가고, 찾아다가 갖다 놓으면 그거 어느새 딴 데로 가버리고, 그거 훤한 것 아닌가?
그것을 꼭 그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가야만 아는가?
들어가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우리가 기도를 해봐도 그렇다.
재밌는 영화를 봐도 영화 한 편 보는 동안에 마음이 온갖 곳으로 달아났다가 또 제자리에 오고 그러는데 하물며 재미도 없는 화두 참선 그것이 뭐 그렇게 일심불란하게 한 곳에 집중이 되겠는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라. 여러 가지 수행으로 결과를 이루다
여선립기도(如先立基堵)하고 이후조궁실(而後造宮室)인달하야
시계역부연(施戒亦復然)하야 보살중행본(菩薩衆行本)이니라
마치 집터를 먼저 닦고
그 뒤에 집을 짓듯이
보시(布施)와 계행(戒行)도 또한 그러해서
보살의 모든 행의 근본이니라.
보시 인색하지 않는 것, 남에게 잘 베푸는 것, 베푸는 것은 법보시, 재보시, 무외보시 여러 가지가 있다.
또 무재칠시라고 해서 재물이 하나도 들지 아니하면서도 일곱 가지로 보시하는 방법도 있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생각하고 하는 것, 그리고 계행 질서 윤리 도덕 이것을 잘 지키는 것 이것이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행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집을 지을 때, 집터를 먼저 닦는 일하고 똑같다.
비여건성곽(譬如建城郭)은 위호제인중(爲護諸人衆)인달하야
인진역여시(忍進亦如是)하야 방호제보살(防護諸菩薩)이니라
비유하건대 성곽을 세우는 것은
모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이듯이
인욕과 정진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보살들을 보호하느니라.
비유하건대 성곽을 세우는 것은
모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이듯이
인욕과 정진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인욕하고 정진하고 그것은
모든 보살들을 보호하는 일이 된다
중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니까, 중생을 위한 수행이다. 그러려면 인욕하고 정진해서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다.
비여대력왕(譬如大力王)을 솔토함대앙(率土咸戴仰)인달하야
정혜역여시(定慧亦如是)하야 보살소의뢰(菩薩所依賴)니라
비유하건대 큰 힘을 가진 왕을
온 천하가 다 우러러 받들듯이
선정과 지혜도 또한 이와 같아서
보살들의 의지하는 바이니라.
여기에 선정과 지혜가 보살들의 의지하는 바가 된다고 했다.
큰 힘을 가진 왕이 온천하가 다 우러러 받들 듯이 선정과 지혜가 그런 역할을 한다, 하는 내용이다.
역여전륜왕(亦如轉輪王)이 능여일체락(能與一切樂)인달하야
사등역여시(四等亦如是)하야 여제보살락(與諸菩薩樂)이니라
또 전륜왕이
능히 온갖 즐거움을 주듯이
자, 비, 희, 사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보살에게 즐거움을 주느니라.
자비희사 육바라밀하고 자비희사 그래서 열 가지다.
열 가지 수행법을 이렇게 우선적으로 들었다.
열 가지 뿐이겠는가?
많다. 염불도 있고, 기도도 있고, 여러 가지 수행법이 있는데 기도하고 염불하고 절하고 간경하고 사경하고 요즘 경전 쓰기를 많이 하는데 사경이 참 좋은 수행법이다.
경전의 뜻도 알 수가 있고, 부처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일러주고자 하는가 하는 그 뜻을 잘 알 수가 있다. 사경을 통해서 특히 알기가 쉽다. 그냥 혼자 읽는 것보다도 사경을 하면 열 번 읽는 것보다 낫다.
그래서 사경책도 많이 나오고 사경을 권하기도 한다. 해보면 아니까 사경을 하는 분들이 많다. 해보면 마음이 집중이 되고, 글도 알게 되고, 경전의 내용도 알게 되고, 유식해지고, 한문도 알게 되고, 불교 아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경전 한 구절 한 구절 의미가 통하니까 ‘부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구나, 경전에 이런 말씀이 있구나’ 하는 것을 깊이 있게 알게 된다.
남이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잠깐 법회에 와서 듣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건성으로 지나간다.
집에 돌아가서 혼자 그렇게 시험공부 준비하듯이 알뜰히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그렇다면 사경을 통해서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 그것이 참 중요하다.
그런 것도 있고, 또 근기 따라서 경을 읽는 것도 독송(讀誦) 소리를 내서 읽는 방법도 좋고, 요즘은 경을 잘 읽는 사람들이 유튜브에 녹음을 해서 잘 올려 놓았다. 그런 것을 틀어놓고 들으면서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것도 좋고, 방법이 여러 가지다.
그런데 여기 경전에서는 육바라밀하고 자비희사 열 가지를 특별히 우선적으로 권하고 있다.
전륜왕이란 사천하를 다스리는 가장 큰 왕이다. 즉 천자와 같은 지위다. 전륜왕은 온 천하 사람들의 행복을 책임진다. 자, 비, 희, 사와 같은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베풀면 일체 중생의 행복을 책임지게 된다. 조도심심(助道甚深)이라 하였다. 불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점 중의 하나가 수행을 강조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방법에 이와 같이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도심심(助道甚深) 돕는 도, 도를 돕는 일이 알고 보면 매우 깊은 도리다. 그렇게 간단하게 알려고 하지 말라.
우선 그 한마디 어쩌다 주워들은 것 가지고 ‘이뭣고’ 하나만 가지고 다 된다, 관심일법 총섭제행이다, 이렇게 그냥 대충 들어 아는 것으로써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다.
수행이 그렇게 쉬울 것 같으면 그렇게 애써서 부처님도 했겠는가?
모두가 깊고 깊은 도리다.
심심한 도리다. 이러한 것을 조도심심이라고 하는 한단락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러 주었다.
경문은 얼마 안되지만 얼마나 의미심장하고 필요한 말씀인가? 이것이 비단 불교적인 수행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여러 가지로 다 적용이 되고 활용이 되는 가르침이다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오늘 화엄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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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신 분들 한 번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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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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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중생들의 마음과 성품이 각각 같지 않음을 아시어
그 마땅함을 따라 제도하여 이와 같이 법을 설하시니라.
중생의 제각기 다른 근기에 따라 교화하는 방법을 달리한다.
37가지 道를 돕는 방법이 그렇게 갖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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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