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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한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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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샘가족 이야기방 스크랩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
musical 추천 0 조회 45 09.09.14 14: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몽골의 '슈바이쳐' 로 불리는 이태준 열사. <p>

 

1) 몽골인들에게 현대적 의술 베풀어. <p>

 

자이승 승전탑 아래 이태준(李泰俊.1883∼1921) 열사 기념공원은 연세대 의대와 몽골 연세 친선병원, 그리고 한국 주재 몽골 대사관의 노력이 컸으며 몽골 정부가 2천평의 부지를 제공하고 연세대에서 공원 조성 비용을 부담하였다. <p>

 

조국 광복을 위한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활동했던 이태준 열사가 한ㆍ몽 친선의 상징적 인물로서 감격스럽게 부활한 것이다.
이태준 열사는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한 뒤 광복 운동에 뛰어들어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다가 몽골의 울란바토르에 정착, 광복 운동과 함께 몽골인들에게 헌신적인 의료 봉사로 「몽골의 슈바이처」라는 말을 듣고있다. <p>

 

이태준 열사는 1883년 11월 23일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4세 되던 1907년 세브란스 의대에 입학, 3년 9개월 뒤인 1911년 6월 21일 졸업했다. 이 열사는 재학 시절부터 항일 운동에 적극 참여, 안창호(安昌浩)의 권유로 비밀 청년 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담했다.
학교를 졸업한 이 열사는 잠시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했다. 그러다가 1911년 10월 중국에서 신해(辛亥)혁명이 일어나자 크게 감동을 받았고 중국 망명을 결심한다. 결국 그 이듬해 초 이 열사는 한국을 탈출해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다. <p>

 

이 열사는 남경에서 기독회의원의 의사로 일하게 된다. 직업은 의사지만 이 열사의 하는 일은 중국에 나와있는 다른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조국 광복 운동에 열을 쏟는 일이었다. <br>
이 열사가 몽골의 고륜(庫倫. 당시 Urga. 지금의 울란바토르)로 간 것은 1914년이었다. 이 열사의 몽골 행은 김규식(金奎植)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김규식은 미국의 르녹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새문안 교회의 장로로 있으면서 광복 운동에 참여하다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 투사다. <p>

 

2) 몽골인이 가장 존경하는 한국인. <p>

 

김규식 장로가 이 열사를 몽골로 갈 것을 권유한 것은 김 장로가 몽골에 비밀 군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에 정착하게 된 이 열사는 1921년 일본군에 의해 피살당하기 전까 지 7년 동안 몽골에서 활동했다. 울란바토르에 온 이 열사는 이곳에서 동의의국(同義醫局)이란 병원을 개업했다. 이때의 몽골 사람들은 라마불교의 영향으로 병에 걸리면 기도나 드리고 주문이나 외우는 등이 고작이었다. 이 열사는 이런 몽골인들에게 현대적인 의술로 치료하면서 헌신적인 봉사를 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이 열사는 몽골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추앙 받았고 이로 인해 몽골 국왕의 어의(御醫)가 되었다. <p>

 

당시 몽골엔 전체 국민의 70∼80%가 성병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열사는 성병 치료와 퇴치에 온 힘을 쏟아 성병이 몽골에서 사라지게 했다. 이런 지대한 공헌으로 이 열사는 몽골의 영웅이 됐다. 몽골 국왕은 이러한 공로로 1919년 7월 이 열사에게 국가 훈장을 수여했다.
이 열사는 몽골에서의 이런 두터운 신뢰를 배경으로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항일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p>

 

이 열사의 항일 활동은 필요한 단체에 항일 자금 지원과 러시아로부터 받은 막대한 독립 지원금을 상해 임시정부까지의 비밀 운송을 하는 일 등이었다. 그리고 이 열사의 병원엔 각지에서 온 항일 운동가들로 언제나 여관처럼 붐볐다. <br>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거점으로 러시아, 중국 등을 무대로 활동하던 이 열사가 일본군 장교에 체포된 것은 1921년 2월 3일 울란바토르에서였다. 그리고 이 열사는 체포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참히 학살당했다. 그 때 이 열사의 나이는 34세였다. <p>

 

이태준의 짧고 극적인 일대기는 우리 나라에서 보다 몽골에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한국 정부는 1980년에서야 이 열사의 공적이 인정하여 서훈(敍勳)했다.   현재 이 열사의 무덤은 몽골에 있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소재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몽골 정부는 현재 현상금을 걸고 이 열사의 묘를 찾고 있다.   몽골 국민들로부터 추앙 받고 있는 한국인이 있다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료:다음카페 '여백의 무늬') <p>

 

사진1) 이태준열사 기념공원 내의 수리중인 기념관<br>
사진2) 이태준열사 기념공원 비<br>
사진3) 이태준열사 추모비<br>
사진4) 비문을 읽어 보고 있는 일행<br>
사진5) 이태준열사 기념공원의 정문<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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