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8일 주일 낮
제목 교회의 세 가지 본분
본문 이사야 56:6-7
교회란 어떤 곳이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성전을 내 집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교회를 성전이라 부르지 않지만,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 함에는 전혀 어색함이 없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따르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는 무엇일까요?
만민이 예배하는 곳이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라고 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들을 뜻합니다. 3절 “그들이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이방인들도 성전에 올라와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으로 예고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성전에 들어와 이스라엘과 함께 예배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7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예배를 받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어서 하나님께서 직접 오랜 세월을 두고 준비하셨습니다. 때가 되매 이방인들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이방인들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이방인들도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장벽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는 이방인이요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며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가까워졌느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 환상을 봅니다. 보자기 속엔 부정한 짐승들이 가득했습니다. 마침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것들을 먹어라. 베드로는 부정한 짐승들이어서 먹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정하게 했으니 먹으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부정한 짐승과 같았던 이방인들도 예수님 안에서 깨끗하여졌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어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와 유대인 베드로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평소엔 유대인과 이방인은 함께 할 수 없었지만 이제 만나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함께 예배하기를 원하심처럼 교회는 만민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곳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어린아이들, 세리와 창녀들까지 가까이하셨습니다. 교회도 예수님의 정신으로 만인들을 포용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노인, 어린이, 젊은이, 가난한 자, 부자, 건강한 자, 병든 자, 외국인 노동자, 외국인 신부, 나그네, 중독자들까지 머물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다 거절당해도 교회는 그를 받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필요 없는 자처럼 취급받는 자들도 교회만큼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만민들이 함께 예배하는 교회가 되는 소원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만민이 교제하는 곳이다
교회란 만민이 한마음과 한뜻으로 풍성한 교제를 나누는 곳이어야 합니다. 한집에 살면서 남편이 죽은 지 6일 동안 모르는 아내가 있다면 믿어집니까? 실제로 알코올 중독자인 아내는 죽은 남편도 알아보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담임목사가 교회 성도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장로님이 교회 성도들을 이름도 모르고 형편도 모른다면 어떻게 여겨야 할까요? 몇 주간 예배에 나오지 못한 성도들이 있는 데도 왜 그런지 궁금함도 없고 적절한 보살핌이 없다면 한 몸이라는 교회의 정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교회는 밝은 모습으로 인사도 하고 격려와 위로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교제를 통해서 믿음의 풍성함을 누리고 피차 힘을 얻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 전후 안부도 묻고 격려함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드린 후 영화 관람 마치고 극장 문을 빠져가는 것처럼 하지 말고 개개인들과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평소 얘길 많이 해보지 못한 분들과 안부도 묻고 얘기도 나누면 좋을 것입니다. 온 성도들과 골고루 교제가 이루어짐을 목표해야 합니다.
특히 항존직 직분자들은 안내위원이 아니어도 먼저 오셔서 모든 성도를 향해 환영하고 영접하면 좋을 것입니다. 모든 성도를 골고루 만나서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한 사람도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이 없어야 합니다. 특정한 사람과만 편향된 교제를 나누면 나중엔 파벌이 되고 편이 갈라지는 데로 나아갑니다. 교회는 내 편이 네 편이 있으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못다 이룬 교제는 평일 일상에서도 여러 가지 통신수단이나 전화를 걸어보면 좋을 것입니다. 평소 데면데면하며 지냈던 분들을 살펴서 일부러 전화를 주고받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각자의 집으로 초대할 수도 있고, 상대방을 내가 방문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찻집에서도 만나도 좋고, 자연 속에서 산책하면서 교제를 나눌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만민을 성산에 불러 모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교회는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곳입니다. 7절 “기도하는 내 집”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교회의 존재 목적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정하셨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몇 사람만 나와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좋은 교회란 건물이 크고 화려한 인테리어를 한 교회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많은 교회입니다. 애양원교회, 소록도교회는 건물은 우중충하고 냄새나고 누추한 한센인들이 모이는 교회이지만 새벽기도회 모인 숫자가 주일예배와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은 두 교회가 이 세상의 어떤 교회보다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건물이 좋은 교회가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교회를 향하십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을 인용하시며 성전을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반복하셨습니다. 기도에 관심이 없이 성전에서 장사를 하여 이득을 보려는 자들을 몰아내셨습니다. 성전에 기도하는 자만 머물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교회가 많은 행사를 치르느라 분주하고 회의하느라 많은 시간을 소일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은 없다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현수막은 걸지 않더라도 기도 준비는 많이 해야 합니다. 교회 각 기관은 어떤 행사나 헌신 예배를 앞두고 기도로 준비하면 더욱 은혜가 되고 복이 될 것입니다. 적어도 임원들만큼이라도 새벽기도회를 하거나 특별한 기도시간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사람들끼리 모여 행사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은혜도 없고, 감동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기도 없는 교회는 벽돌만 남고 맙니다.
교회의 위상과 가치는 기도가 풍성할 때 향상이 됩니다. 교회는 말씀과 기도의 두 바퀴가 잘 굴러가야 건강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할 때도 묵묵히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직분이 있거나 없거나, 신앙의 연륜이 길든 짧든 다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린이, 노인, 청년도 기도해야 합니다. 병든 자와 건강한 자가 함께 기도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도 함께 기도하고, 농부와 어부도 모두 함께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결론
우리 교회가 만민이 모여 예배하는 집이 되기를 바랍니다. 만민이 모여 교제하는 곳,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교회로 세워가려는 뜻을 정하고 마음의 소원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