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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6월 21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마침 하지 일이고 또 음력으로는 오월 보름입니다. 그래서 결제 기간이 벌써 한 달이 지나고 이제 두 달 남았네요. 여름공부 결제기간이 벌써 삼분의 일이 지나가버렸습니다.
오늘은 낮의 길이가 제일 길다는 날이지요. 화가 지극했다. 동지 하면 겨울이 지극했다. 사실은 이제 하지 하면 여름이 제일 지극해서 태양이 제일 가까이 온 날이지요. 그래서 지금부터 차츰 차츰 해가 짧아지고 태양은 멀어져 가지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지금부터 태양과 거리가 멀어지고 열을 적게 받는데 아직은 여열(餘熱)이 있어서 정작 가장 더운 기간은 칠월보름부터 팔월 보름까지 한달, 칠월 팔월이 그때가 사실은 덥습니다마는 오늘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해가 제일 가까운 것은 오늘을 기점으로 차츰 차츰 멀어지는 것이지요.
겨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울도 동지 하니까 겨울이 지극했다 이 뜻인데 동지 때가 태양과의 거리가 제일 멀지요. 그렇지 만은 정작 추운 날은 동지 이후부터 사실은 춥지요. 남은 그런 추위가 있어서 그래서 그렇습니다. 뭐 태양이 멀어졌다고 해서 금방 추운 것도 아니고 태양이 또 가까워졌다고 해서 금방 또 따뜻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이치지요.
다른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뭐 방에 불을 뺐다고 해서 금방 방이 또 차가워 지는 것이 아니지요. 한참 지난 뒤에야 그때서 추워지고 옛날에 우리가 나무를 가지고 방을 데울 때는 저녁에 한번 이렇게 불을 때 놓으면은 한 밤중쯤 그 때가 제일 따뜻할 때입니다.
한 두 시간 세 시간쯤 지난 뒤 그 불이 살아 진지는 오랜 뒤에도 사실은 그와 같이 그런 이치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오늘 마침 하지고 또 결제를 벌써 한지가 삼분의 일이 벌써 지나가버려서 정말 빠른 것은 세월 뿐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참 자주 있습니다. 무엇이 빠르네 해도 살아보면은 세월만큼 빠른 것이 없지요. 그렇습니다.
오늘도 법화경 하권 교재 79쪽 “마음의 안락행” 이라고 하는 대목을 할 차례인데, 안락한 삶이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안락행이라고 하는 것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흘러가는 것이니까 삶이라고 하는 것은 정체되어 있는 어떤 물체가 아니잖아요. 한 순간 한 순간 살아가는 삶이고 그것이 생활이고 그것이 곧 인생이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안락한 행이란 안락한 삶이다. 안락한 인생! 여기에 보면은 마음의 안락행이라 해서 “마음 쓰는 법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드릴 수가 있는데, 이것은 사실 법화경 경전의 내용으로서는 법화경과 관계 지어서 법화행자로서 또 법화경을 펴는 사람으로서 법화경을 전파하는 사람으로서의 어떤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 이렇게 되어 있지 만은, 사실 이것은 법화경과 관계없이 일상생활에서도 우리가 마음가짐을 가질 때 참으로 안락한 인생이 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요, 불교공부를 한다. 성인의 그 가르침을 공부한다 하는 것도 결국은 무엇이겠습니까? 성인의 마음 씀씀이를 좀 배워서 우리도 성인과 똑 같이는 못되더라도 거의 비슷하게라도 마음을 이렇게 쓸 때 행복할 수가 있고 바를 수가 있고 또 그것이 안락할 수가 있고 하는 이것을 사실 궁극적으로 바라고 불교공부를 하는 것이고 성인의 공부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는 성불이니 견성이니 무슨 기도 성취니 온갖 그런 표현들을 하지만은, 사실은 성인의 삶을 배워서 내 삶이 되도록 노력하므로 해서 우리의 삶도 성인의 편안함처럼 성인이 누리는 그런 그 안락한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지요.
(5) 마음의 안락행
[1] 마음 안락행의 행법
(21)“ 또 문수사리여,보살마하살이 오는 말법시대에 법이 없어지려 할 적에
대개 말법시대가 오면은 말세라고 이렇게 합니다마는 “불법이 없어진다.” 이런 이야기들이 있지요. 그래서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려 하는 사람은
그러니까 말세! 상법시대나 정법시대에야 법을 펴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대다수 사람들이 성인을 또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법시대가 오면은 사람들이 전부 영악해지고 자기만을 생각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조그마한 일에도 화를 내서 큰일을 저지르고, 또 어떤 선한 일을 생각하는 시간도 적고 이익과 자기 손해 이런 것만 계산하는 시간은 많아지고 그래서 업이 그 쪽 방향으로 자꾸 가게 되지요.
그래서 세월이 갈수록 성인의 가르침을 많이 알게 되고 그런 정보를 많이 알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얇아지고 생각이 어려워지고 더 영악해지고 더 정직하지 못하고요. 내가 그 전에도 어떤 자리에서 그런 말을 했지 만은 ‘모든 공양을 다 멈추더라도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놓은 이런 경제적인 부를 아주 정직하게만 쓰고 산다면은 모든 공양을 다 멈추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만 된다면은 정말 진정으로 잘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조금 지나친 표현이기는 하지만은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모든 풍요로움을 가지고 정직하게만 쓰고 산다면은 얼마든지 잘살 수 있고 풍요롭게 살수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모두 정직하지 못하게 위에서부터 그렇게 하니 그것이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한 삶을 보장 받지 못하는 것이지요.
요즘 군대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나라가 뒤숭숭하고 상당히 시끄럽고 가나 오나 그 이야기를 가지고 이러고 저러고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사실 한쪽에서는 뭐가 옥류관에서 무슨 평양 냉면이다 뭐다 희희 닥 거리고 어울려서 남북이 하나가 된 것처럼 그렇게 먹고 놀고, 예를 들어서 금강산 같은 데서 내 드나들고 어떻게 하더라도 자주 접촉하려고 하고 서로 퍼주고 말이죠. 또 뭐 오고 가고 그렇게 하는데 누구를 지킨다는 말입니까?
지킨다고 하는 그런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렸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알뜰히 그렇게 지킬 일이 뭐 있습니까? 일부러 돈을 한 짐씩 싸 가지고 가서 주고 그냥 무슨 행사라든지 잔치라든지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이 행해지고 있습니까? 매일 그렇거든요.
매일 그렇게 행해지고 있는데 그렇게 한쪽에서는 누구를 향해서 총을 겨누고 누구를 지키고 누구를 못 오게 하고 가고 오고 하는 그런 문제를 지킨다고 하는 일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되지요. 그 문제는 그 문제고 이 문제는 이 문제다. 아무리 어떤 논리를 가지고도 이해 시키려고 하더라도 이해가 안될 것 같아요.
한쪽에는 그렇게 다 풀어놓고 계속 더 풀어지기를 바라고 더 자주 거래를 하고 더 어울려서 즐겁게 놀고 하기를 바라면서, 한쪽에는 총 뿌리를 들고 지키라고 하니 이것이 어떻게 지켜지겠습니까? 이런 것에 대해서 통일성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상당히 이번에 충격도 많이 받고 고민도 많이 했는데 어디서든지 통일성 있는 그런 정책으로 일관되게 딱 하면은 풀면 같이 풀고 막으면 같이 막고 이렇게 해야지, 한쪽에서는 잔뜩 풀어놓고 한쪽에는 막고 하니까 이렇게 요즘 정보라는 것이 모를 리가 없는 그런 것이고, 똑같이 정보를 공유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사는데 그것이 어떻게 그 일은 그 일이고 이 일은 이 일이다 이렇게 나누어서 이해가 되고, 특히 또 젊은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그대로 실천하게 한다고 하게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서 정책은 어느 분야에 있든지 일관된 정책 하에서만 딱 움직이고 그렇게 해야 되지 않을까? 그러면은 문제가 덜 생기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예를 들어서 정말 개방을 할 생각이라면은 군대 쪽에서도 그렇게 하고 만약에 만일 꼭 그렇게 막아야 된다면은 다른 것도 그렇게 철저히 막는 것을 보여줘야 되지요. 오는 것을 그렇게 크게 환영하고 보도하고 하는 그런 일은 부단히 하면서 그 젊은 사람들보고 철저하게 지키라고 이렇게 하니까 지켜야 할 의미를 모르는 것이지요.
한쪽에서는 어떻게 하든지 서로 많이 오고 가고 서로 받아주려고 하는 그런 입장인데, 눈감고 아옹 하는 그런 식이 되니까 이것이 철저히 지켜야 할 곳에는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하는 그 의미와 필요성을 이해 시키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 같고, 또 이해 시킨다 하더라도 납득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사고 하고는 관계가 있다면은 있고 없다면은 없는 이야기일수도 있지 만은 이야기가 그렇게 까지 발전이 되었습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21) “또 문수사리여,보살마하살이 오는 말법시대에 법이 없어지려 할 적에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려 하는 사람은 질투하고 속이려는 마음을 품지 마라. 또 불도를 배우는 이를 업신여기고 꾸짖어서 그의 잘 잘못을 찾아내려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그렇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법화행자로서의 마음 쓰는 법을 이야기 하고 있지 만은 이것은 모든 사람이 마음을 이렇게 써야 할 그럴 일이지요.
만일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로서 성문(聲聞)을 구하는 사람, 벽지불을 구하는 사람, 보살(菩薩)의 도를 구하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의심하고 뉘우치게 하려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도(道)에 나아 가기가 매우 멀어서 마침내 갖가지 지혜를 얻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그대들은 방일(放逸)한 사람으로서 도에 대하여 게으른 때문이라.’고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러면 공부 좀 못한다고 아예 싹수없다. 이런 식으로 남의 희망을 그렇게 꺾어 놓는 이런 식인데, 법화경과 관계 없이도 사실은 젊은 사람에게 한창 공부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식으로 어떤 장례의 희망을 그렇게 없애는 이야기는 참 금물이지요.
정말 그런 이야기는 뭐 무슨 다른 어떤 희망을 꺾는 것이니까 일종의 살생 이예요. 그것도 그런 말은 절대 젊은 사람들에게 하지 말아야 됩니다. 뭔가 꿈을 가지고 살도록 하고 희망을 갖게 하고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기쁜 마음으로 사는데 거기에 의미가 있는 거예요.
성공했다고 한들 사실 그까짓 성공이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 예요. 결과는 아무것도 아니 예요. 사실은 과정이 중요한 거예요. 삶이라는 것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란 과정이지 절대 결과가 아닙니다.
그러기 어느 만치 성공을 하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열심히 희망과 꿈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사실은 사는 그것뿐 이예요. 깨달음이라는 것이 뭐 있습니까? 깨달음을 향해서 살아가는 삶이지 설사 깨달았다 하더라도 삶은 계속 되고 끝난 것이 아니 예요.
깨달음 이야기를 하니까 깨달음도 거기다 거론 시키고 싶은데 기도 생활이다 참선 생활이다 간경 생활이다 불교 안에서의 어떤 특수한 그런 생활들을 우리가 이야기들을 우리가 많이 하는데, 그것도 물론 어떤 꿈을 가지고 결과를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마는 그 결과를 향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삶! 그 생활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값진 것이고요. 그러니까 그 점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참선도 참선 생활이 중요한 것이지 참선을 해서 어떻게 하자고 하는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 참선을 해서 어떻게 된 사람도 없습니다. 그저 참선할 뿐이고 기도할 뿐이 예요. 기도해서 어떻게 된 사람이 없습니다. 되려고 생각을 해서도 안되고 또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참선도 참선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그것이 제일 나쁜 생각이다.
“大悟至心(대오지심)이 在前道妨(재전도방)” 이라는 문자를 쓰는데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 딱 앞에 놓여있어 가지고 올바른 참선 생활이 안 된다 이런 표현인데, 그래요 사실은 그저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자기의 취향대로 자기 아는 만큼 자기 분야대로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그 삶이 중요하다고 하는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표현한대로 꿈을 향해서 열심히 신나게 살도록 만들어 주지 남의 꿈을 꺾어 놓는 그런 말은 이것이 불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점잖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또 마땅히 모든 법을 희롱거리로 말하여 쟁론하고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하느니라. 그랬습니다.
성인의 가르침을 장난 삼아 희롱거리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또 그것을 가지고 다툰다든지 쟁론 하는 그런 일도 안됩니다. 옳다 그르다 어느 경전의 이야기가 이렇다 이것을 가지고 다툴 것은 없어요. 쟁론 할 것이 없습니다.
다투고 쟁론 하다 보면은 결국은 어떻게 의가 상하게 돼요. 옳다 그르다 하는 것 때문에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 사는 데는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화목이지 옳다 그르다 경전의 말이 옳다 무슨 사상이 옳다 이 경전의 말이 옳다 저 경전의 말이 옳다 어떤 스님의 말씀이 옳다 이것은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사람이 화목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 이야기가 편안하게 이렇게 토론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마는, 토론이 지나쳐서 쟁론이 되고 다툼이 되고 큰 소리가 오고 가고 해서 화목에 조금이라도 험 집이 생기거나 한다 면은 이것은 크게 앞뒤가 전도되는 그런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쟁론하고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모든 중생에게 어여삐 여기는 생각을 내고, 여래에게는 인자한 아버지라는 생각을 내고, 모든 보살들에게는 큰 스승이라는 생각을 내어야 하느니라.
모든 보살들에게는 큰 스승이라는 생각을 내어야 하느니라.
스승이라고 생각 하는 이것은 불교에서는 선지식 이렇게 표현하는데 선지식 하면은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지요.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서 수많은 세월과 멀고 먼 그런 길을 행각을 하고 그러면서 53명의 별의별 선지식을 친견하므로 해서 자신이 정말 인간으로서 이르러갈 수 있는데 까지 성숙해 갔다고 하는 이 사실이 진실이든 아니든 간에 화엄경에 있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53명의 선지식은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불교인도 있고 비 불교인도 있고 외도도 있고 술 파는 잡부도 있고요. 또 사냥꾼도 있고 무슨 불을 섬기는 외도도 있고 그래서 어떤 불을 섬기는 사람을 만났는데 불 속에 뛰어 들라고 이렇게 해서 선재동자가 의심을 하게 되지요.
“저 사람을 내가 선지식으로 찾아왔는데 선지식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나를 저렇게 불 속에 뛰어들라고 하는가?” 이런 의심까지 이제 일으키게 되는 그런 이야기도 등장하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들을 선지식이라고 생각하고 무엇인가 나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하고 내가 배울 것이 있다라고 무조건 이렇게 일단 접고 사람을 대하고 사건을 대하는 것. 그리고 자연현상을 또 그런 마음 자세로 대한다고 하는 이것이 참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소나무를 보고는 항상 늘 변함없는 푸르름을 배운다든지 또 대나무를 보고는 곧음을 배운다든지 바위를 보고는 견고함을 배운다든지 이런 이야기가 옛날 선지식들께서 다 이야기 하셨어요.
그래서 삶뿐만 아이라 또 사람 중에서도 뛰어난 선지식이라고 간판을 내건 그런 선지식들 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다 그렇게 선지식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사건을 또 선지식이라고 생각을 하고 모든 자연 현상까지도 또 선지식이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배울 것이 참 많지요.
사건도요 지금 매일 매일 신문에서 또는 뉴스에서 보고 듣는 사건들도 그것들을 잘 소화 하면은 전부 선지식입니다. 어디 사람만 선지식이겠습니까?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가 전부 선지식이다 하는 그런 자세! 우리 불자들은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선재동자의 53선지식의 친견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어요.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 설산동자는 법문구절 하나 얻어듣기 위해서 나찰에게 몸을 던지지 않습니까? 참 대단한 이야기지요.
범소유상[凡所有相]이니 약견제상[若見諸相]이
비상[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니라. 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금강경의 사구게다 이렇게 알지요.
그 다음 열반경의 사구게 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이렇게 이야기 되지요. 그 다음에 또 두 구절이 있어야 되는데 듣고 보니까 그 다음 구절을 이야기를 안 한단 말이 예요. 그래서 소리질러서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이 누구냐고 부르니까, 나찰 귀신이 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 구절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하지요.
“내가 배가 고파서 더 이상 이야기 못한다. 이 법문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 이것이 힘 드는 것이 아닌데, 무슨 아무 말이나 한다면은 할 수가 있지 만은 법문의 무게라는 것이 너무 무거워.” 이렇게 조르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함부로 할 수 없어, 그래서 지금 배가 고픈데 내가 먹는 음식은 바로 사람의 뜨거운 피다. 그래 당신이 나를 위해서 그 몸을 던진다면 내가 일러줄 수가 있다.” 이렇게 까지 이야기가 되지요.
설산동자가 그럽니다.
“내가 그러면은 당신에게 몸을 희사 하는 것은 좋은데 죽어버린 뒤에 일러주면은 누가 듣느냐? 그 이치가 안 맞으니까 아무리 힘들더라도 나를 위해서 일러주세요. 내가 틀림없이 내가 이 몸을 희사하겠습니다.” 나찰귀신 하고 이렇게 이제 약속을 합니다.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나찰 귀신은 있는 힘을 다해서 이 두 구절을 마저 일러줍니다. 그러고는
“얼른 몸뚱이를 내 있는데 바쳐라” 그러지요.
그러니까 설산동자가
“어찌 내 혼자만 들을 수 있느냐?”
그리고는 말하자 면은 손가락을 물어서 피를 흘려 가지고 암벽에다 나찰 귀신에게 들은 법문을 적지요.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이 이것을 보고 널리 좀 전하라고 그렇게 해놓고는 그 다음에
“높은 벼랑에 올라가서 떨어져 죽거든 바로 피를 먹든지 살을 먹든지 알아서 하시오”
그래서 바위에 올라가서 몸을 던지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설산 동자의 어떤 법문을 듣기 위해 선지식에게는 그러한 자세로 대했다고 하는 그런 예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여기
보살들에게는 큰 스승이라는 생각을 내어야 한다.
큰 스승은 선재동자의 예라든지 설산 동자의 예도 있지 만은 “모든 사람이 다 스승이고 모든 사건이 스승이고 모든 자연 현상이 다 스승이다.”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참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시방의 모든 대보살들에게는 항상 간절한 마음으로 공경하고 예배하라. 모든 중생에게는 평등하게 법을 말하되 법에 순응하여 많이 말하지도 말고 적게 말하지도 말라.
나는 말을 좀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나는 또 내 나름대로 소신이 있습니다. 건강도 그렇고 살아보니까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전혀 예측이 없는 것이라서 할 수 있는데 까지 다 퍼 버리고, 돌아오는 그 시간을 당당하게 맞이하는 그런 마음으로 사실은 이렇게 힘 닿는데 까지 한다 하는 그런 소신으로 하고 있지요. 뭐 어쨌거나 그래도 말이 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비록 법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도 너무 많이 말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것을 적당히 말해야 사실은 좋은 것이고 옳습니다. 자세하게 친절하게 그렇게 한다고 꼭 덕 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안 하는 것도 또 그것도 좋은 자세는 아니지요.
옛날에 정말 말하지 아니해서 큰 은혜를 입었다는 그런 사례들도 아주 매우 조금이지만은 있습니다. 법을 일러 주라고 했는데 도대체 일러주지를 않았지요. 나중에 크게 깨닫고는 와서 감사히 인사 드리는 것이 “나는 스님에게 다른 것 때문에 이렇게 감사히 인사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나는 너무 감사합니다.” 하는 그런 예들도 과거 선지식들에게는 간혹 있습니다. 상당히 일리 있는 이야기 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많이 일러준다고 꼭 덕 되는 것도 아니지요.
[2] 마음 안락행의 행법의 성취
23 문수사리여, 이 보살마하살이 미래의 말세(末世)에 법이 없어지려 할 때에 이 셋째 안락행(安樂行)을 성취한 사람은 이 법을 설할 적에 괴롭히고 시끄럽게 하는 이가 없을 것이니라. 좋은 동학(同學)을 만나서 함께 이 경전을 읽고 외우게 되고, 또 많은 대중들이 와서 들을 것이니라. 듣고는 지니고, 지니고는 외우고, 외우고는 널리 설하고, 설하고는 쓰며, 혹 다른 이로 하여금 쓰게 하여 경전을 공양 공경하고 존중 찬탄할 것이니라.”
“공양 공경 존중 찬탄” 이 네 가지 조건이 늘 이렇게 따라 다니고 구비가 되어야 된다고 합니다. 아주 이 대목이 중요한 대목이지요. 듣고는 지니고 마음속에 지닌다는 것이지요. 지니고는 외우고 외우고는 널리 설하고 널리 설하고는 또 쓰며 출판을 하라 이것이지요. 또 그래서 여러 사람이 다 봐야 하니까 다른 이로 하여 쓰게 한다. 그래서 “경전을 공양 공경하고 존중 찬탄 할 것이니라.” 앞에 이런 내용을 게송으로 거듭 설합니다.
(6) 게송으로 거듭 설하다
[1] 마음 안락행의 행법
24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경전을 설하려는 사람은 질투하고 성내고 교만하고 아첨하고 속이는 삿되고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항상 질박하고 곧은 행을 닦으며
법화경을 설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그런 의무지요. 당연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멸시하지 말고
이것도 마찬가집니다. 이것도 보통 사람으로서 좀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은 사람을 멸시 하거나 가벼이 여기거나 해서는 안되지요. 사람보다 더 존귀한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부처님인데 어떻게 가벼이 여기고 멸시합니까?
또한 법을 희롱거리로 논하지 말며 다른 이를 의심하고 한스럽게 하여 너는 성불할 수 없다고 하지 말라.
이런 그 희망을 싹둑 잘라놓는 그런 표현을 하지 말라고 내가 앞에서 말씀 드렸지요. 설사 크게 소질이 없고 가능성이 없는데도 열심히 하고 있더라도 좀 북돋아 주고 이렇게 힘을 내게 해주는 그런 말을 해야 돼요.
내가 옛날에 해인사 강원에서 처음에 공부할 때 나하고 한 반이었는데 시를 쓴다고 하는 도반이 있었어요. 늘 시를 쓴다고 그렇게 끙끙대고 아주 열심히 쓰는 거예요. 머리에서 짜내는지 써 놓은 것을 내가 이렇게 보면은 저도 잘 모르지 만은 아직도 한글 철자법도 제대로 모르는 그런 상황이라, 철자법을 잘 알아야 꼭 시인이 된다는 것이 조건은 아니지요.
물론 그런데도 한번도 우리 도반들이 ‘아이고 자네는 시에 소질도 없고 시 싹수도 없다’고 이런 소리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도 물론 그렇지 않았어요. “열심히 하라고 먼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그리고 많이 써라.” 다독(多讀) 다사(多思) 다서(多書) 그것이 아주 글 쓰는데 철칙 아닙니까? 시를 쓰려면 남의 책을 많이 읽어야지요. 그리고 사유를 많이 해야지요. 그리고 또 습작을 많이 해야 되는 이런 조건이 있는데 그런 것을 제대로 안 갖추고 우선 뭔가 하여튼 남겨보고 쓸려고 그렇게 그 아둥바둥 애를 쓰더라고요. 그래도 그것이 희망을 꺾는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자꾸 북돋아 주고 그래서 열심히 시를 잘 쓰면 뭐합니까? 시를 쓰려고 하는 그런 희망과 용기와 꿈을 가지고 사는 그 삶이 중요한 거예요. 결국은 인간에게 삶은 사는 과정 그것뿐이거든요.
25 이 불자(佛子)가 법을 설하되 항상 부드럽고 온화하며 참으며 모든 이를 자비로 대하여 게으른 마음을 내지 말라. 시방의 대보살들은 중생들을 불쌍히 여겨서 도를 행하나니
시방의 대보살들은 중생들을 불쌍히 여겨서 도를 행하나니' 했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측은심 또 연민심 이런 것이지요. 연민심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어리석다든지 못하던지 이러면은 우습게 보거나 이렇게 하는데 참 그것은 금해야 할 사실이지요.
정말 자기 보다가 그렇게 못나고 부족하고 생각이 잘못되고 생각이 악하고 정말 그렇더라도 그 사람에 대해서 연민심을 내어서 참 안됐다. 어떻게 하면은 저 사람 마음을 돌이켜줄 수 있을까? 그런 자세는 가벼이 여기고 웃어버리고 무시해 버리고 시시하게 여겨버리는 그런 일이 흔히 있는데 그것은 좋지 않은 자세지요.
그런 것들이 결국은 어린아이들은 철이 없어서 그래서 좀 뭣하면 따돌림을 당하고 그래서 학교에 아주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런 것들이 연민심을 일으킬 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마땅히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 나의 스승이라고 여겨야 하느니라.
자기가 서있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전부 다릅니다. 저쪽 위치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물을 보는데 아주 잘 볼 수 있는데, 나는 이쪽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사물이 제대로 비춰지지 않지요. 세상을 보고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 그와 같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그런 견해를 존중하고 배울 것이 있다. 이렇게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 세존께는 가장 높은 아버지라는 생각을 내어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면 법을 설하기에 장애가 없으리라.
이런 자세가 되면은 법화경을 설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아주 여기 “마음의 행법(마음 쓰는 법)” 해 가지고 이렇게 간단하게 했는데 두고두고 읽고 외우고 읽고 외우고 써서 붙여놓고 해도 좋은 그런 내용입니다.
[2] 제삼(第三) 행법의 성취
26 셋째 법이 이와 같나니 지혜 있는 사람은 잘 수호하여 일심으로 안락하게 행하면 한량없는 중생들이 공경하리라.”
사람들이 공경하기 전에 내 자신이 기분이 좋지요. 이렇게 우리가 살면은 공경을 받기 전에 내 자신이 기분이 좋다. “내가 행복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역시 함께 행복하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법화경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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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나무묘법연화경
안락한 행이란 안락한 삶이다. 안락한 인생! 마음의 안락행이라 해서 “마음 쓰는 법이다",,,,나무묘법연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