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황경순(시인)
최금녀 시집『기둥들은 모두 새가 되었다』
힌국문연
시가 써지지 않아
마당에 서 있을 때
제주에서 온 돌확이 내게 말을 건다
불구덩이 속을 굴러 본 적 있니?
천 길 벼랑 아래를 내려다본 적이 있니?
온몸을 숨구멍으로 만들어 본 적 있니?
울퉁불퉁한 돌확
숨구멍마다 거품이 박혔다
불을 빠져나올 때
시커메진 그 얼굴로
숨만 쉬면 시가 나오는 줄 알았니?
불구덩이 속에서 숨구멍을 찾아보라고
내게 말을 건다
—「돌확」전문
최금녀 시인의 신간 시집을 읽으면서 참 다사다난한 삶을 살아오셨다
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민족의 비극 6·25전쟁으로 인하여 피난 시절
의 이야기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시리즈 시들은 참 가슴 아
프고 마음 한구석이 저절로 애잔해지는 작품들이었다. 그 외의 작품에
서도 지난 추억의 파편들이 무심한 듯 시대의 아픔을 나누게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흘러간 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문화의 차이에서도 묘한
아픔들이 느껴지고, 그늘진 곳의 이야기가 툭툭 던져지며 현재, 또는 미
래의 삶의 지혜를 말해주고 있다. 어느 시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
절이 읽을 수 있을까? 참 귀중한 작품들이다.
사람들마다 살아온 굴곡이 있고 개인적인 일들이 많지만, 특히 함께
아픔을 겪은 전쟁과 피난살이, 그리고 가난의 흔적들은 더욱 공감을 일
으키게 마련이다. 재작년에 작고하신 시아버님의 고향이 황해도 연백이
고, 참전용사로서 미군과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고, 1·4후퇴 때는 눈
물을 머금고 흥남 부두에서 피난민들을 태우고 떠났다고 하셨다. 영화
『국제시장』을 함께 보러 갔는데 바로 그 자리에 당신이 계셨다고 무척
흥분하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산 전투에서 옆구리에 총상을 입으셔서
2개월 동안 일본에서 치료를 받으신 일도 있으셔서 7, 8년 전에 참전용
사로 등록되기도 하셨다. 35년을 함께 살면서 고향 이야기, 전쟁 이야기
를 무수히 들어서 내게도 낯설지 않은 일이라 이번 최금녀 시인의 시집
은 더욱 감회가 새로운 것 같다.
「돌확」이라는 작품을 읽으면서‘잃어버린 시간’은 현생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숨구멍 자국이 있는 돌확을 보면
서 화산 폭발할 때의 그 순간을 떠올린다는 것이 얼마나 기발한 발상인
가? 그것도“시가 써지지 않아/ 마당에 서 있을 때/ 제주에서 온 돌확이
내게 말을 건다”라고 했다. 정말 시가 써지지 않을 때는 별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그때 눈에 들어온 돌확, 상상의 날개를 펴니 단단한 돌에서
도 숨구멍을 발견한 것은, 예리한 시인의 눈이 아니라면 힘들 것이다.
“불구덩이 속을 굴러본 적 있니?/ 천 길 벼랑 아래를 내려다본 적 있
니?/ 온몸을 숨구멍으로 만들어 본 적 있니?”의문문으로 제시한 시어
가 절묘하다. 구구절절 경험하지 않고 시를 쓰려고 하면 안 된다는 사
실, 온몸을 숨구멍으로 만들어 새록새록 느껴야 세상 이치를 알 수 있다
는 것을 절실하게 말하고 있다.
마지막“숨만 쉬면 시가 나오는 줄 알았니?‘ 라는 구절에서 시인의 그
절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오래 시를 써온 시인이라도 시가
안 써질 때가 있게 마련이고, 절실하지 않으면 감동적인 시를 쓸 수 없
음을 시인들은 다 공감할 것이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국민들도 전쟁에 시달리고 있다. 전쟁의 비극과 아
픔은 겪어본 사람이 더욱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인처럼 전쟁
과 피난 생활을 겪은 경험을 풀어 놓아 시대의 아픔을 되새기고, 잃어버
린 시간 속에서 미래의 삶의 혜안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을 쓰실 수 있는
분이 많지 않으시다. 오래오래 더 많은 이야기를 시로 승화시켜 주시고,
그 밖에 인간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좋은 시를 더욱 많이 써 주시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