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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산소
마18:21-35, 하나님이 하시는 용서 방법.
우리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사랑은 용서를 전제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용서 한다는 것은 자신이 엄청난 큰 용서를 받았을 때, 그 받은 용서를 생각하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Palestine)에서도 같습니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는 죄를 용서해주되 네 번부터는 용서해주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적이고도 율법적입니다. 고대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Talio)으로 사람을 대하던 것에 비하면 많이 개선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해 줄까요? 일곱번이면 될까요? 유대인의 관습에서 배도 더 되는 수, 완전수 일곱번이면 되나요? 그러자 예수님은 '일흔번씩 일곱번'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용서, 예수님이나 하실수 있는 용서를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서 지킬수가 없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주실 메시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21절에서 수제자 베드로는 몇번 용서해 주어야 할지를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용서 하여 주리이까''아페소'의 원형'아피에미'는 '~으로부터'의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와 '보내다''가게하다'의 동사'히에미'의 합성어로 '보내 버리다'의 의미를 시작해서 여러 가지로 쓰이고 있는 단어 입니다. 부부가 이혼을 할 때, 이단어는 아내와 인연을 끊어 버리다,(고전7:11), 또한 사람이 완전히 숨이 끊어 졌을 때, 죽었다고 쓰이고,(마27:50), 또는 빚을 완전히 포기했을 때, 탕감하다라는 단어로도 쓰입니다,(본장32절), 이 용례를 종합하면 어떤 의미라고 생각이 드나요?
아패소의 원형, 아피에미는 본래의 상태에서 완전히 다른 상태로 떠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명 나에게 잘못을 했지만은 그 잘못을 더 이상 나의 의식속에서 기억하지 않고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용서가 몇번을 해 줄수 있을까, 랍비들은 세번을 해주라고 했는데, 베드로는 나름 생각하고 일곱번이면 될까? 일곱은 완전의 수이고, 또 용서의 수이고, 또한 거룩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일흔번씩 일곱번 하라고, 이것은 가능한 일일까?
23절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서 천국을 말씀합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그가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이 명하여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팔아 갚으라 명하였습니다. 그러자 빚진 자가 엎드려 절하여 간청을 하기를 참아 주소서 다 갚겠습니다. 그러자,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일만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은 가다가 자기에게 빚진 동관하나를 만나 자신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것을 빨리 갚으라 하자, 동관이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그러나 종은 허락지 아니하고 그를 갚을 때까지 옥에다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동관들이 민망히 여겨 그 주인에게 가서 그일을 고하였더니 그 주인이 다시 그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참아 달래서 불쌍히 여기고 전부를 탕감해 주었더니 너는 네게 빚진 자를 불쌍히 여겨야 마땅하지 아니한가, 하시고 그종을 붙잡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라고 명령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은 천국의 용서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천국은 용서로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용서하셨기에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 참 어려운 일입니다. 끝없는 용서를 하는 것은, 그러나 용서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데 용서 받은것을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23절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을 받았는데 그 자신은 100데나리온 빚진자를 만났을 때 탕감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때문일까요? '악'입니다. 이기주의입니다.
최고의 것을 용서 받았는데 최하의 것을 용서 할 수 없다는 것은 자기 밖에 모르는 행위, 욕심입니다. 다이야몬드를 선물 받았다면 금반지는 줄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욕심이 두 개다 움켜 쥐고 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도 이동관과 같지는 않는지요? 죽을 죄에서 용서를 받았고 생명으로 옮겨 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또한 용서받은 것에 대한 감격이 없습니다. 머리로는 들어서 지식으로는 아는데 그 가슴에는 인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냉냉하고 생활속에서 실천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단어가 말하는 것은 기억속에서 그 사람의 잘못을 떠나 보내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모습입니다. 늘 와서 잘못 했다고 고백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매일 첨 짓는 죄처럼 용서하시고 기억속에서 지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대언합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 또한 사44:22절에도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또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그런가 하면 바울은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 하셨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쓴 강해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결코 행위때문에 잃어 버리지는 안는다, 오늘 비유는 어느 한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전체적인 것은 아니다, 이렇게 가르치다보니 말씀이 약화 되어서 행함이 없는 기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행하지 않은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이고, 행하지 않은 자들의 대한 판결은 영벌, 즉 지옥입니다. 생명의 주인은 생명을 주시고 사명을 주시고 마지막 날에는 셈을 하신다고 하십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손익 계산을 하시겠다고 단어 '셈''로고스'와 '손익을 맞추다'의 '쉬나이로'가 중복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종말을 맞을 때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고후5:10)
이종들은 누구일까요? 죄라는 엄청난 부채를 짊어진 인류 전체입니다. 임금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죄의 부채를 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롬3: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채는 죽음으로서만 갚을 수 있는 빚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롬6:23) 롬14:10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채는 우리 자신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오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그의 피가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마치 양의 피를 바른 문지방은 죽음이 넘어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구원은 하나님이 거져 주시는 은총의 선물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발앞에 진심으로 꿇어 엎드리어 간청하면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그리고 8절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셨습니다.
25절에서 '절하며''포세퀴네이'는 미완료형입니다.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주인에게 절하며 자비를 호소합니다. 26절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갚을 능력이 없으면서 다 갚겠다는 말은 순간만 모면하자는 인간의 술수입니다. 우리는 안그런가요? 그런데 주인은 불쌍히 여겨 단번에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단번에 믿기만 하면 탕감해 주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나가다가 동료를 만났는데 그가 자기에게 백데나리온을 빚진 자였습니다.
자신은 지금 빚을 탕감을 받고 나오면서 자신은 동료에게 빌려준 돈을 갚지 않는다고 힘으로 억제하여 잡아다가 감옥에 넣었을 때, 이것은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민망하여'이말은 '슬퍼하여''괴로워하며' 동료 동관들이 가서 주인에게 고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한 주인은 다시 종을 불러 들여서 추궁하십니다. 나는 전부를 탕감하여 주었는데 너는 그 사정하는 네 동료를 숨막히도록 목을 조르고 참아 주지 않고 옥에 넣었느냐? 너도 다 갚기전에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우리는 어떨까요?
주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사실이 감격해서 우리 동료의 과오는 용서해 주었는지요? 혹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도저히 용서 못해, 하고 보복하지는 않았나요? 우리는 본질적으로 용서할 수있지 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릴 위해 생명으로 용서하고 그리고 영생으로 인도하시면서 너희가 내 제자인가 그러면 내 말을 지키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셔서 우리의 심장과 페부를 살피시고 계시며 또한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감찰하고 계십니다.(욥34:21)
또한 모세의 율법으로는 구원 얻을 육체는 없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절망하게 하십니다. 나의 힘으로는 이 죄의 짐을 벗을 길이 없구나 나를 구원해 줄 구원자는 없는가, 그 구원자를 갈망하는 것이 구약의 율법인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가슴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 받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35절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35절과 같은 맥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과 혀로만 용서하지 말고 마음으로 용서하라' 하십니다. 입술로는 한번만 용서해 줄게, 했지만 속에서는 계속 부글 부글 끓고 있으면 용서가 안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일4:10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했고 또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한 확증이라 하셨습니다(롬5:8)
예수님이 마음에 오신 자에게는 교제의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이름으로 주시리라(요16:23), 그래서 기도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시작할 때에도 넣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용서를 했다면 교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1:22), 예수님이 천하보다 귀한것이 목숨이라 하셨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살려주셨는데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용서 할수 있는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어떻게 조건없이, 그러나 용서는 허물이 있는 자가 용서를 구할 때 일이지, 죄라는 인식을 하지 않는데 내가 너를 용서한다, 이것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분별이 요구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다 일만 달란트를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나에게 백데나리온 빚진자가 한번만 참아 달라고 하면 당연히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때 우리의 죄가 하늘에서 사해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안에서 조금씩 실수가 보여도 너그럽게 관용을 베풀고 용서를 받은 자는 또한 감사의 표현도 하고 그렇게 될 때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감당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들어내고 영광을 돌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할렐루야!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