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속에서 옷을 꺼낸다. 거울에 비춰진 옷에 주목하지만, 눈길은 세월이 지나간 흔적을 담 은 얼굴에 멈춘다. 옛 모습을 기억하는 내 눈길이 슬며시 얼굴 아래로 피한다. 약간 늘어난 허리 사이즈가 조금은 답답하다. 그나마 박스스타일 옷이라 불어난 몸매를 무난히 소화 시켜줄 것 같 다.
빽빽하게 채워진 옷장을 정리했다. 언젠가 입겠지 하는 미련으로 옷걸이에 걸어둔 옷가지들이 손이 가지 않은 채 수년간 옷장을 채우고 있다. 이번만은 아쉬움을 접고 웬만한 것은 버리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옷걸이가 옷 하나를 걸치고 있다. 검정 바탕에 가느다란 오색으로 체크 무늬가 있는 몸빼 옷이 어둠 속에서 돋보인다. 삼십 년이 넘는 동안 ‘한 번쯤’ 주인이 입어주겠지 하는 기대로 옷장 깊숙한 곳에서 버티고 있는, 중이다. 그리움 하나 끌어안고 있는 그 옷을, 지켜보노라니 빛바랜 사진을 들춰보듯 마음이 아련해진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하는 오래전 광고 문구가 생각난다. 옷 역시 그랬다. 한때 이 옷은 사람들의 시선을 듬뿍 받았지만 새 옷에 밀려 외면받았다. 그 후 세월을 달게 된 몸빼 바지는 옷장 속에서 화려했던 날들을 회상하며 한 번만이라도 주인이 더 입어주기를 기다렸다. 젊은 후궁의 투기에 밀려 궁궐 깊숙한 곳에서 찾아주지 않는 군왕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전마마 같은 신세랄까.
살다 보면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다. 특별히 마음을 나누고 친밀감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면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옷도 매한가지다.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가 하면 왠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옷이 있다. 나는 단색만을 고집하는 편이지만 이 옷만은 오랫동안 즐겨 입었다.
한때 의상실을 경영했다. 70~80년 대의 의상실은 호황을 누렸다. 보세 공장에서 남은 자투리 원단이 시장으로 흘러들어왔다. 잘만 고르면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이색적인 고급 원단을 구매할 수가 있었다. 몇 감을 끊어와 단골손님들에게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개성을 살려 주기도 하였다.
그날도 보세 가게로 발길은 돌렸다. 주문한 물품을 구매한 다음 색다른 원단이 있나 살펴보는데 검정 바탕에 가느다란 오색 체크 무늬에 눈길이 끌렸다. 무작정 한 벌 감을 끊었다. 며칠을 두고 디자인을 구상해 봤다. 체크 무늬가 화려하니 복잡한 모양은 피하고 심풀하게 만들기로 정했다. 상의 목 부분을 원형으로 하고 몸통은 박스형으로 만들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알라딘’ 바지 스타일을 응용해 봤다. 노트에 스타일을 그려가는 동안 그것은 어릴 때 보았던 엄마의 일 바지를 닮아갔다.
엄마는 겨울만 되면 몸빼 바지를 입었다. 군복색 미군 담요로 만든 것인데 소재가 양모로 짐작되었다. 겨울내내 엄마는 외롭고 추운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카키색 몸빼 바지만 입었다. 엄마에게는 일 바지였다. 오랫동안 입어 낡아버렸건만 차마 버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꿰매어 입었다. 군용 담요로 만든 바지를 입은 엄마는 궂은일을 가리지 않았다. 농사일은 물론 산에서 땔감을 구해오기도 하고 물때가 되면 갯가에서 바지락을 캤다. 어린 사 남매를 지켜야 하는 버겁고 고달픈 청상의 엄마는 몸빼 바지를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로 여겼을까. 십 년이 넘도록 그 옷만 입으며 한 가정을 지키는 씩씩한 가장으로 변했다.
외삼촌들의 권유로 부산으로 이사한 후로 엄마는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엄마는 딸이 만들어주는 옷을 입고 친지들의 경조사에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지만, 그 멋진 날들을 오래 즐기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몸빼 바지가 엄마의 삶을 버티게 한 것처럼 현실에 지친 나를 지켜줄 무엇인가 필요했다.
벨트 아래 앞뒤 양쪽 맞주름을 풍성하게 잡아 일하는데, 편하게 만들었다. 바지 끝에는 리본 끈을 넣고 조여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일주일 만에 옷이 마무리되었다. 엄마의 일 바지 스타일에 시대를 앞선 약간의 패션을 보태었다. 엄마의 옷이 환생되었다.
그동안 나는 손님들이 구매 의욕을 높이도록 옷을 입었다. 처음으로 나만을 위해 디자인한 옷을 입었다. 상의는 바지 속으로 넣어 잘록한 허리를 강조했다. 파여진 목 부분에는 니트 쇼올을 자연스럽게 감아 멋스러움을 더했다. 바지 끝에 묶인 깜찍한 리본은 삼십 대 초반 여인의 발랄함을 더해주었다. 엄마의 담요 바지를 응용한 몸빼 바지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끓었다.
“어느 백화점에서 산 무슨 메이커예요?”
사람들은 다가와 살펴보며 만져보기도 했다. 특이한 원단과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으로 십 년 가까이 입었다. 언니 옷만 대물림해서 입혀주던 엄마에게 투정 부리던 나는 의상실을 경영한 후로 멋진 옷만 입었다. 생전의 엄마는 어릴 적 한풀이를 한다며 새로운 차림을 볼 때마다 흡족해하셨다. 자신의, 일 바지보다 패션에서 앞서가는 몸빼 바지를 입은 모습까지 보았다면 엄마는 얼마나 행복해했을까.
다시 거울 앞에 선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내 모습도 성격도 목소리까지 엄마를 닮아간다. 거울 앞 나의 모습이 엄마가 몸빼 바지를 입고 서 있는 듯하다. 엄마도 아버지가 계셔서 느긋한 삶을 살았더라면 그 시절에 유행하는 멋진 옷을 계절에 맞게 즐겨 입었으리라 짐작된다.
옷을 옷장 맨 앞쪽에 다시 걸어둔다. 올해 찬 바람이 부는 늦가을이 다가오면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줄 몸빼 바지를 입을 것이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따스한 엄마의 손도 잡힐게다. 몸빼 바지 계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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