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1장 은혜가 필요하다 (찬 338)
1. 본문은 다윗의 비열한 죄악을 폭로한다.
다윗은 왕들이 출전하는 전쟁에 나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상 하나님의 갑주를 벗었다(1~2).
저녁에 침상에서 일어났다는 말은 부하 장수들이 전쟁터에서 생사를 오갈 때, 왕은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는 것을 고발한다.
영적인 게으름은 타락을 가져온다. 게으른 자의 밭에는 가시덤불이 퍼지고 거친 풀이 덮이고 돌담이 무너지게 마련이다(잠 24:30~32).
다윗의 범죄는 시각에서 출발했다(2).
그는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고’ 그 여인은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 다윗은 이미 음란한 눈으로 여인을 바라봄으로써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범했다(마 5:28). 이것은 욥이 보여준 경건한 태도와 상반된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 31:1).
밧세바가 부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인 유부녀였다는 신하의 보고는 다윗의 정욕을 그치게 했어야 옳았다.
이것은 십계명의 열번째 계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의 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이 선은 도리어 다윗의 마음을 충동질하였다.
다윗의 범죄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약 1:15).
밧세바의 임신 소식은 또 다른 죄를 낳게 했다.
2. 우리아는 본문이 보여주는대로 신실한 장수였고 다윗에게는 충성스런 신하였다.
그는 다윗의 정예부대 37인의 용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삼하 23:39).
하나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다윗은 또 다른 죄를 계획한다.
전쟁터에 있는 우리아를 불러 아내와 잠자리를 갖게 함으로써 자기의 범죄를 은닉하는데 실패한 다윗은 우리아를 다시 전쟁터로 내보내 죽게 할 계획을 세우고 요압에게 편지를 전한다.
이것은 사울이 자기 딸을 준다는 미끼로 다윗을 블레셋의 손에 죽게 하려고 시도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삼상 18).
사람은 똑같다! 우리아가 죽자 다윗은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왔고 이후 아기가 태어났다.
다윗은 주변 사람들에게 죄가 숨겨졌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아니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7).”
3. 본문에 특징적 단어의 반복이 있다.
다윗은 모든 일을 사람들을 ‘보내어’ 하게 한다.
1절에서 다윗은 요압과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전쟁터로 ‘보낸다’.
3절에서 다윗은 목욕하는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사람을 ‘보낸다’.
4절에서 전령을 ‘보내’ 그 여인을 자기에게 오게 한다.
6절에서 우리아를 ‘보내라’고 요압에게 전갈을 보낸다.
14절에 다윗은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낸다.
이 단어들의 반복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다윗은 이제 무언가를 직접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말만 하면 사람들이 오가면서 그의 말을 듣는다.
본문은 다윗이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낸다’는 말의 반복을 통해서 보여준다.
권력과 죄는 밀접하다. 권력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권력이 주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4.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을 때 인간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여준다.
본문은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힘이 얼마나 가공할 만 하고 질긴 지를 보여준다.
율법이 죄를 막지 못한다는 사실과 도리어 죄를 부추긴다는 사실도 본다.
한 사람의 도덕성과 인격이 신앙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분을 닮아가도록 변화시킨다.
또한 과거의 순종이 현재와 미래의 신앙의 보증이 되지도 않는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5. “하나님 아버지, 저희로 범죄하지 않도록 눈과 입과 귀와 모든 몸의 지체들을 지켜주시고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한시도 잊지 않게 하시고 심령이 가난하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로 늘 주의 은혜를 구하고 주께 나아가게 하옵소서.
한시도 하나님의 갑주를 벗지 않고 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