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신 그리스도, 마태 28:1-9
어제 오전에 교회 정원에 서 있는 한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른 나무들은 싹이 나고 파릇파릇 생기가 돋는데, 그 나무는 아직 싹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지의 끝 부분을 아주 조금 꺾어 보았더니 푸른색이 보였습니다.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하루 속이 속 시원하게 움이 돋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것처럼 아쉽고 서글픈 일이 없습니다. 반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아름다움과 희망을 안겨 줍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부활에 있습니다.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삶도, 가정도 그리고 개인의 희망도 늘 새로워지는 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진리를 가정에서부터 바르게 정립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생명 있는 기독교의 힘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그의 작품에서 지옥의 입구에는 "여기에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고 적혀 있다고 적었습니다. 희망이 없다는 것은 저주라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며 소망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비롯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여서 우리에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기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돌무덤에 묻어버리고 시원하다는 감정을 간직하며 이틀을 지냈습니다. 하지만 3일 되는 날은 모든 것이 완전히 역전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이 죽여 무덤에 묻고 크고 무거운 돌로 막은 뒤 경비병을 세워 지키고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힘을 뚫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은 허망하게 굴러 내렸고 경비병들은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셨다는 것을 보여 준 장면입니다.
무거운 돌도 , 중무장한 경비병들도 예수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힘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파괴하고 혼란스럽게 하려는 그 어떤 이단들의 세력도 부활하여 세우신 주님의 교회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거센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문화의 도도한 물결도 부흥하는 주님의 교회를 어지럽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실리신 그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살리셨고 우리 삶에 능력으로 동행하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삶에 어둡고 답답한 것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어서 괴로움을 주고 있다면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깨끗하게 해결 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어둠의 세력을 꺾으셨습니다. 죽음의 무서운 힘도 물리치셨습니다. 이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괴롭히고 당황하게 하는 모든 어둠의 권세를 물리쳐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랑과 은혜를 입어 지금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자유인이 되었으면 자유를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주님께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진정한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부활의 신앙은 주님을 가까이 하려는 마음이 있는 자들이 먼저 경험하게 됩니다. 1절을 보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을 보려고 찾아갔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주님을 보기 위해 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연약한 여인들의 모습으로 그것도 새벽에 무덤을 찾는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은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모하였고, 주님의 은혜를 그리워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의 바로 믿음이 가장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뵈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만히 않아 있는 사람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힘쓰는 자들에게 풍성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은 교회 주변을 도는 것이 아니라 교회 중심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들은 바로 그런 찾아가는 신앙이 있었기에 가장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믿음은 성숙하는 것이고, 믿음 안에 있는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활의 주님을 바로 만나지 못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이 타의에 의해 움직여지게 됩니다. 능동적인 신앙이 아니라 피동적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마음 깊은 곳에서 울어 나오는 진정한 즐거움이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믿음의 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되면 모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되면 내 삶의 모든 것들이 변하게 됩니다. 또한 내 속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여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그런 역동적인 힘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에겐 사명이 주어집니다.(9-10) 이 여인들은 제자들보다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오히려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주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본래 사도란 의미는 주님의 부활을 보고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인들이 가장 먼저 주님의 부활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내 안에 있는 부활의 신앙을 벅찬 가슴으로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리는 복 있는 사람이 되십시다.
어제 우리 교회 여전도회에서 계란을 삶아서 시장 주변을 돌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주님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전도하고 돌아온 여전도회원들의 얼굴엔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었습니다. 다들 너무나 좋아하더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부활의 즐거움과 부활의 놀라운 힘을 우리들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어둠의 권세에 눌려 고달파하고 있는 뭍 영혼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고 그들을 누르고 있는 어둠의 세력을 거두어 내도록 해야 합니다.
부활의 봄이 되어서 만물이 소생하지만 심령의 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고달파 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따뜻해야 할 사람들의 심령은 혹한에 얼어붙고 동풍에 말라 죽은 것 같습니다. 정말 모든 성도들이 기뻐하는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우리들은 이제 악마의 함정에 빠져 죽어 가는 심령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하루라도 빨리 전해 주어야 합니다. 마음이 괴로워 애통할 때에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다 슬프고 귀찮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아 먼저 시들어 죽어가는 심령을 살리는 일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 마비 된 영혼들을 소생하게 하여 주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아야 이 땅에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아질 때에 이 세상은 모두가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은 아름답다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