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에도 그림자가 있다
김나무 (시인)
여영현 시집 『그 잠깐을 사랑했다』
천년의 시작
살아있는 것은 어디론가 향한다
네발짐승은 발자국이 매화 문양이다
발길은 눈밭에 새겨진다
짐승들은 다쳤을 때 울지 않는다
끊임없이 스스로 상처를 핥을 뿐,
산다는 건 속울음을 삼키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눈밭을 건너고 있다
살아서 수고 많았다
발자국마다 홍매가 핀다.
―「겨울 홍매」 전문
여영현 시인은 김천 출생
김천고, 건국대, 연세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플로리다 주립대에서 연구함
2004년 <문학과 창작> 신인문학상 등단
시집으로 <밤바다를 낚다>
현재 선문대학교 인문사회대 교수 이니티움교양대학 학장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그림자다” 색깔을 찾기 위한 시인의 발걸음마다 찍혀진 무늬를 따라가 본다.
”짐승들은 다쳤을 때 울지 않는다.“ (넝쿨장미) 등록금을 내지 못하고 종일 가슴앓이를 하였을 화자는 빈 속에 먹었을 감자 한덩이가 노란 열다섯 살을 토해내었다고 한다. 주식으로 삼았던 구황식품이 지금은 쌀보다 귀한 몸이지만 그 시절 무심한 세상은 소년을 품어주지 못하고 천길 벼랑으로 밀어낸 것이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스승의 강의를 들어보려 귀를 기울이다가 원망하다가 체념을 하기도 했으리, 평생을 잊지 못할 상처를 품고 살아가며 “산다는 건 속울음을 삼키는 일이다”라고 화자는 되뇌인다.
탈무드의 이야기에서 한 청년이 병이 들어 수입이 없어지자 다니던 학교를 갈 수가 없게 되었다. 공부는 너무 하고 싶고 궁리를 하다가 학교 천장에 빛이 들어오라고 유리창을 댄 것을 알았다 천장에 올라가 랍비의 강의를 듣다가 따뜻한 햇볕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어두워진 교실이 이상해 랍비가 천장을 올려보니 잠든 청년을 발견하고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되었다. 학교는 그 후로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게 되고 청년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어떤 아이) “살다 보니 그중에 제일 어려운 게 사랑이라 가끔 눈물을 흘려” 원망과 증오심을 사랑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성경에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말하고 있지만 화자는(사랑의 썰물) “몽돌 하나 물살에 부딪히는 뼈아픈 공명 천 번을 반복해야 하나의 옹골진 돌 하나 된다” 면서 “희망이라면 가장 절망일 때 희망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며 순기자연順基自然에 이르른다.
계절 중 살을 에이는 눈을 맞으며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홍매는 심연의 고통과 상처를 헤집는 피울움이지만 (크리스마스의 그림자) “걱정마라 너의 국 그릇은 신이 따로 채울 것이다” 라는 믿음이 돋보인다. 어둠의 긴 터널을 견디어내고 발자국마다 홍매화는 피고 만다.
시인을 뵈온 것은 2003년 숲속의 시인학교 행사에서다. 시인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시인이 될거라는 무명인은 숲속의 시인상 수상자로 여영현 시인의 (은하계 사진)을 만나게 되면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시란 실제 경험이 아닌 시각적인 것만으로도 상상력을 무한하게 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논평에서도 초음파 사진에서 은하계의 사진을 읽어내는 상상력을 극찬한 것으로 안다. 그 후로 시인의 근황이 멀어졌지만 이방인의 긴 시간을 지나며 대학교 강단에 계신 것은 겨울 홍매가 혹독한 겨울을 오롯이 견디고 눈밭에 찍힌 발자욱을 견디어낸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 잠깐을 사랑했다』 시편을 몇 번이나 통독하며 감정 이입되어 문득 문득 눈시울이 더워졌고 가장 절망일 때 희망이라는 문장도 동감이 된다. 한 사람의 독자로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