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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29:1-4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이 시는 처음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고통과 환난에 넘기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더 좋게 하셔서 자신이 구원자요, 보호자이심을 스스로 입증하셨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성도들의 기억을 되살려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극심한 핍박을 받아왔으며 또 얼마나 기이한 방법으로 보호를 받아왔는지 기억하게 함으로서 이 실예를 통하여 앞날에 대한 소망을 강력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뒷부분에서는 저주의 형식을 사용하여 이유 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모든 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보응이 임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본문 1-2절은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번 나를 괴롭게 하였도다 (2) 저희가 나의 소시부터 여러번 나를 괴롭게 하였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입니다.
이 시는 주님의 교회가 큰 위험으로 낙담하였거나 극심한 재난 속에 빠졌을 때, 또는 폭군의 압제를 받아 완전히 파멸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추측은 강조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은 “이제” 라는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이 시험에 빠져 간신히 숨을 들이쉴 때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태초부터 대대로 자기 백성들에게 역사하신 방법을 생각해 보는 좋은 시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들이 자기들 좋을 대로 행하도록 고삐를 늦추자마자 우리는 슬픔 속에 빠지며 우리의 생각은 완전히 우리를 괴롭히는 죄악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절망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열조들의 인내가 그러한 시련을 견디어 냈으며 그들이 겪지 않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당했던 교회의 환난과 교회가 항상 십자가를 지고 있었다는 것과 대적들의 부당한 세력 하에 극심한 환난을 당했다는 것을 돌이켜보는 것은 참된 신자들에게 위로를 주는데 매우 적합한 일입니다.
시편 129 편
우리가 가진 가장 타당한 추측은 이 시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후, 이웃 족속들의 의해 많은 고통과 잔인한 박해를 당하여 마침내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학정 밑에서 거의 기진맥진해졌을 때에 기록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선지자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몇 사람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지식을 말합니다.
선지자는 또 그토록 맹렬한 공격을 잘 견뎌낼 수 있도록 교회는 인내를 가지고 견디어 내면 기필코 승리하게 된다는 소망을 가지고 원수들과 맞서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거의 모든 단어가 다 강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이란 말씀은 옛날에 교회가 당한 시련, 즉 하나님의 백성은 결단코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사실과 많은 환난을 겪은 다음에라야 항상 복이 임했던 사실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저희” 라는 대명사로만 말하고 특별한 이름을 들지 않음으로서 시인은 앗수르나 애굽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원수들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또 어떤 특별한 부류를 말하지 않음으로서 세상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원수들의 무리로 가득 차 있어 사단은 손쉽게 선한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무장을 갖추며 항상 사면에서 새로운 싸움을 일으키려 하고 있음을 암암리에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소수의 적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외부의 원수들에게만 괴롭힘을 당하는 게 아니라 교회에 속해 있다고 고백하는 내부의 원수들에 의해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음을 역사는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여기서 “소시” 란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음 시작이라는 뜻입니다(호11:1).
즉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을 때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족장들이 거의 모든 일생동안 고통스러운 전쟁에 시달려야 했었던 때를 가리킵니다.
만일 이 족장들이 낯설게 가나안 땅에서 유리하였다면 그들의 후손들이 애굽에 있을 때 노예로서 압제를 당했을 뿐 아니라 온갖 비방과 무시를 짊어진 채 그들의 기업은 더욱 악화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애굽 땅을 떠날 때에 어떠한 어려움을 당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때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을 취할 때까지의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다윗의 통치 시대에 이를 때까지 도무지 쉴만한 때가 없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통치 기간에는 그들이 형통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얼마 못가서 패배를 당하고 문제가 생겨 하나님의 백성들은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시편 129 편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도중에는 모든 소망이 거의 사라져 버려 그들은 마치 무덤 속에 묻혀 썩어져 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이 돌아온 이후에도 얼마동안은 쉽게 숨을 내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완전한 멸망에 이르게 될 때까지 여러 차례 칼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만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마땅히 환난을 당해왔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발로 짓밟기를 주저함이 없이 그들을 걷어찼던 원수들로 말미암아 반쯤 죽게 된 사람처럼 되었음을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들을 돌이켜본다면 만약 하나님께서 매우 은밀하고 신비로운 수단으로 교회를 보호하고 거의 죽은 것 같은 상태에서 교회를 일으키시지 않았다면 교회가 수없이 쓰러지고 말았을 무시무시한 핍박을 부연하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에 처했을 때 우둔하지만 않다면 이 불행한 시대의 어려운 상황은 우리에게 똑같은 교훈을 생각하게 할 것입니다.
선지자가 ‘저희가 나를 괴롭게 하였도다 저희가 나를 괴롭게 하였도다’ 라고 두 번씩 반복한 것은 쓸데없이 반복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단 한두 번만 환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인 환난을 당할 때 인내로서 견뎌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소시부터” 이 환난이 시작되었다고 말함으로서 백성들의 열조 때부터 환난은 시작되었으며 백성들이 십자가를 익숙하게 지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이제 그들이 이 가혹한 연단을 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이 환난들을 통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굴복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직 어렸을 때에 그렇게 어려운 일을 겪었다고 한다면,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교회가 성년(成年)이 된 후에도 시련을 확고하게 견뎌 나가지 못한다면 이는 실로 수치스러운 나약함을 드러내는 결과가 됩니다.
하반절에는 위로의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온갖 수단을 다해 보았으나 결코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하나님은 항상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리시고 그들의 시도를 좌절시키셨음을 보여줍니다.
2. 본문 3-4절은 “(3) 밭가는 자가 내 등에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4)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의 줄을 끊으셨도다” 입니다.
시편 129 편
여기서 선지자는 명백한 비유를 들어 교회의 극심한 환난에 대해 앞 절에서 말한 것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쟁기로 갈아 일구는 밭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고랑이 길어졌다고 말함으로서 쟁기로 갈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생생하게 십자가가 항상 교회의 등에 지워져 있어 길고 넓은 고랑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4절에 같은 비유를 사용한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의 줄을 끊으셨도다” 라는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쟁기가 소의 멍에에 줄로 매여 있는 것을 비유합니다.
이 말씀은 악인들은 잔인한 일을 하는데 지치거나 만족을 누리지 않고 잘 무장을 갖추고 있기에 악인들이 앞으로 더 나아갈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그들의 맹렬함을 누르시고 마치 사람이 쟁기에서 소의 멍에를 풀고 그 줄과 가죽 끈을 산산조각으로 잘라 버리는 것처럼 하신다는 개념을 매우 적절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의 멍에 메는 것을 만족하게 해주셨기에 성령은 우리를 경작이 가능한 밭에 적절하게 비유하여 쟁기로 갈아 엎기를 거부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혹 더욱 세련된 의미를 찾으려는 자가 있다면 선지자는 밭이 쟁기질되어 씨를 받을 준비를 갖추는 것과 마침내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자기의 관심을 교회의 환난에 제한시키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는 “의로우사” 라는 형용사는 본문의 의미에 맞추어 볼 때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동안은 모르는 척하고 계시지만 결코 자기 공의를 잊으신 것은 아니므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서 구원을 거두어 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비슷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왜 성도들이 항상 핍박을 받지 않게 하시는 것에 대한 동일한 이유를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1:6, 7)라고 밝혔습니다.
교회의 복은 하나님의 공의와 불가분리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특별히 중요합니다.
선지자는 또 교회의 원수들이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고를 헛되게 하사 자신의 마음이 결정하신 것 이상으로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임을 지혜롭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시편 129 편
시129:5-8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는
성도를 핍박하는 악인들의 장래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6-8).
(1) 그들은 일시 잘 되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 아무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저희는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붕에 돋아난 풀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2) 그들은 여호와의 복을 받지 못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자들이 그들에게는 중심으로 축복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실상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으로서 하나님의 복밖에 있는 자는 실상 망한 자입니다.
1. 본문 5-6절은 “(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6) 저희는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입니다.
이 구절이 기도이든 약속이든 선지자는 장차 될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동사가 다 미래 시제로 되어 있으므로 선지자는 과거의 교훈을 통해서 미래에 될 일, 또는 끝 날에 될 일을 매우 적절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의미로 해석하든지간에 선지자는 이 구절에서 성도들은 원수들의 높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에 실망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붕에서 자라는 풀은 높은 곳에 있기에 발로 짓밟히는 낮은 땅의 옥수수 잎사귀보다도 더 가치가 없습니다.
비록 사람의 머리 위에까지 올라가기는 하였으나 첫째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쉽게 말라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라나다’ 로 번역한 שלף (샬라프)를 어떤 사람들은 ‘들어 올려지다’ 로 번역합니다.
이 번역에 의하면 지붕의 풀이 사람의 손이나 수고 없이도 말라 버렸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이 동사는 ‘자라나다, 끌려나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으므로 이 말씀은 지붕에 있는 풀이 오래 신선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막 싹이 트자마자 말라 죽어버리는데, 그 이유는 그 풀에 뿌리가 없고 흙에도 그 풀이 자랄만한 수분이나 양분이 없기 때문인 사실을 나타냅니다.
원수들의 영광과 위대함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 때마다 이 비유를 기억하십시다.
시편 129 편
지붕에서 자라는 풀은 비록 높이 있기는 하지만 뿌리가 없고 따라서 오래 가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원수들도 교만한 마음으로 높아져 태양에 점점 가까이 올라가면 갈수록 곧 그 열로 말미암아 소멸되어 버립니다.
그들은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생명과 힘을 공급받습니다.
2. 본문 7-8절은 “(7)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줌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8) 지나가는 자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 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악인들이 자신을 높이고 자기가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단지 풀에 불과하여 좋은 열매를 맺거나 잘 익지 못한 채 다만 신선한 모습을 가진 것으로 부풀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선지자는 그것들을 골짜기 낮은 땅에서 사람을 위해 열매를 맺고 있는 열매 맺힌 곡식과 상반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그것들은 마땅히 모든 사람들의 미움과 멸시를 받는 반면에 곡식밭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열매 맺힌 곡식을 복주며 추수를 기도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말합니다.
또 선지자는 이 교훈을 설명하기 위해 일상생활의 행위를 빌어 왔기에 우리는 풍성한 추구를 기대하며 바라볼 때마다 특별하신 섭리로 땅을 비옥하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그의 복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것을 간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땅이 소산을 내는 데는 매우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사람과 짐승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 소산을 기도하기에 힘쓰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인은 추수하는 자를 복주는 구절에서 오직 땅의 소산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달려 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배운 하나님의 자녀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동일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세상 사람까지도 포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여호와의 교회에 거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순전한 백성들 속에 포함된다면 우리는 원수들의 모든 세력을 두려움 없이 맞서 대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수들은 얼마동안은 왕성하고 겉으로 보기에 위대해 보이지만 그들은 열매 맺지 못한 풀에 불과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시130:1-4 여호와여 내가 깊은데서
선지자는 이 시편 말씀에서 특별히 자기 개인의 이름으로 기도하든지, 혹 전 교회를 대표하여 기도하든지 자신이 고난으로 짓눌려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매우 열렬하게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한편 선지자는 자기가 분명히 하나님의 손에 채찍을 맞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과 모든 순전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영원하신 구원자이시요 항상 자기 백성들을 죽음에서 구원할 준비를 갖추고 계시기에 선한 소망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본문 1-2절은 “(1) 여호와여 내가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입니다.
선지자는 친히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재난에 짓눌려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깊은 수렁에서 건져 주시기를 부르짖습니다.
종식될 전망이 없는 고난을 당하면 대부분은 그 계속되는 상태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극심하고 심각한 슬픔을 당했을 때에 마음에 용기를 얻어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없습니다.
또 우리가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동안에는 기도가 냉랭해지기 쉽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냉랭한 안일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일깨워 주는 환난 가운데서도 여전히 넋을 잃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실로 기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은혜의 보좌에 나아감으로서 자기가 빠져 있던 모든 근심과 걱정과 위험과 슬픔에서 벗어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어려움과 간절한 소망을 모두 ‘부르짖는다’ 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이 말씀은 2절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교황주의자들의 야만적인 무지가 더욱 더 혐오스럽습니다.
그들은 이 시편을 모독하여 그 순수한 의미와 전혀 이질적인 것을 이끌어 냅니다.
교황주의자들은 죽은 사람을 위해 중얼거리기 위해서든지 아니면 그들은 사단의 마법에 걸려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순수한 교훈을 무색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편 130 편
이 시편의 말씀이 기록되던 시대부터 이 말씀이 죽은 자들의 영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억지 해석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산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견해가 매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짐으로서 세상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보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2. 본문 3절은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신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입니다.
1) 이 모습은 재판석에 나가는 모습입니다.
시인은 ‘만일 주께서 세상의 재판관처럼 모든 죄악의 순간들을 기록하고 계신다면 누가 감히 그 심판대에 설 수가 있으며 누가 감히 주의 심판대에서 정죄 받지 않을 자가 있겠나이까?’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동사 שמד (샤마르) 는 ‘지적하다, 관찰하다’ 라는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찰”은 잘못한 것을 영원히 기억할 만큼 세밀히 조사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즉 과오에 대해 엄격히 법적으로 고찰한다는 사실을 뜻합니다(욥10:14, 14:16, 17).
2) 여기서 선지자는 극심하게 고난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마땅히 그러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인정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을 본으로 내세워 온 교회가 알아야 할 규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구도 감히 주 앞에 자신을 세우지 말고 겸손히 주의 진노가 그치기를 구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엄히 대하실 때 우리는 여기 언급된 동일한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치켜 세우는 자나 자기 죄에 대해 무관심함으로써 죄를 묻어버리는 자는 마땅히 곤란을 당해야 합니다.
그런 자들은 최소한의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의 증거를 나타내실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친구들 중 가장 거룩한 사람으로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겸손히 고백을 하십시다.
즉 하나님이 율법의 지엄하신 요구대로 우리를 대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우리를 심문하신다면 세상 사람들 중 아무도 심판대 앞에서 서 있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3) 여기서 기도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지만 기도 내용은 온 인류에게 해당됩니다.
선지자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은 처음 세대부터 마지막 세대까지 죄를 지은 자들이며 정죄를 받아야 하는 자들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자신에게 맡길 것을 요구하신다’ 라고 설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거룩한 자라 할지라도 이러한 정죄를 받게 되기에 자신을 유일한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의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이 자신을 정당화 할 수 없을 때에 ‘나만 죄를 범했나?’ 라는 변명을 하면서 자신을 다른 무리들 속에 뒤섞어서 마치 자기 죄가 절반은 경감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130 편
그런 위선자들을 우리가 수없이 많이 보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다른 사람들에 자신을 포함시켜 자기 잘못을 경감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는 이러한 핑계로 자신을 방어하려 하지 않고 심사숙고한 뒤에 만일 온 인류 중 한 사람도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가 없다면 자기 죄악을 덜기보다는 차라리 더하여 형벌을 받겠다고 고백합니다.
4) 하나님 앞에 서는 자마다 아무리 뛰어나게 성결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굴복해야 하며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그러면 가장 뛰어난 자도 되지 못한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 교훈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길은 모든 사람이 율법 속에 나타난 완전함으로 우리의 생활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영원한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될 것이요, 자신은 수천 번 죽었어야 할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5) 또 이 구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누구도 자신의 행위로는 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자는 모두 자기 죄를 용서받은 결과로 얻은 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방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6)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은 이와는 아주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들도 사실 우리의 복종함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보충되어져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부분적인 의가 있다는 꿈도 꾸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생각을 품게 됨으로써 선지자가 계속해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는 의미에서부터 아주 멀어져 가버립니다.
3. 본문 4절은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입으로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죽음의 형벌로 심판하는 것을 받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대로 자기들에게 은혜가 필요하다는 진리를 추종하는 자는 얼마나 적은가? 입니다.
사람들은 우매하여 죄 가운데서 잠을 자고 있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의심 속에서 동요하고 있다가 마침내는 절망으로 압도당해 버리고 맙니다.
‘아무도 죄에서 자유한 사람은 없다’ 는 이 격언은 우리가 말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논란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기는 합니다.
시편 130 편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린 채 은밀한 곳에 안전하게 감추고 자기들은 죄를 범하지 않은 체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해 오면 놀라 자빠지거나 절망 속에 떨어진 것처럼 매우 동요를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리라는 이 소망이 부족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라는 데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사람이 주의 심판에 대한 생생한 자극을 받으면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겸손하게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느끼는 이러한 불만은 마음을 경성케 하여 두려움을 내쫓고 사죄를 간구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 주는 믿음이 함께 하지 않으면 충분하지 못합니다.
다윗은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마치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자신을 먼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합니다.
그러나 다음에 곧 이어서 두려움에 압도되어 실족함으로서 자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용서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부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자신들이 영원한 죽음에 처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그 이상을 넘지 못하는 자들이 성급하게 격노한 사람처럼 크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확신을 주기 위해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선지자 자신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선지자의 말씀의 요지는 ‘내가 주를 생각하자마자 주의 자비로운 역사가 내 마음에 떠올랐나이다. 주는 본질적으로 내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의심하지 않나이다. 주께서 여호와시라는 바로 그 사실이 네게는 주께서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증하였나이다’ 입니다.
동시에 선지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혼미한 지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로 하여금 확신 있게 그들이 하나님을 구하기만 하면 곧 하나님께서 자기와 화목하실 준비를 갖추고 계신 사실을 알게 하는 지식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 가운데 하나님을 꾸준하게 부르는 자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칭하는 자신의 공로, 만족,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와 하나님의 은혜를 뒤섞는 결과 자기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있는지에 대해 계속 의심합니다.
그들은 불붙은 나무를 올려놓듯 기도함으로 자기 슬픔과 고통을 증대시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 하는 자는 누구나 먼저 죄를 값없이 용서받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용서하기를 좋아하시며 자신을 섬기는 자들과 화목하심이 없이는 자신을 결코 나타내지 않으시는 최종적 용인을 지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 위해,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이 사죄를 얻는 소망이 절대 필요합니다.
시편 130 편
이것은 교황주의자들이 모르고 있는 또 하나의 원리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 긴 설교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요하고 의심하는 빈약한 영혼을 방치해 둔 채 기초 없는 건물을 짓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첫 단계는 분명히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 자신이 기꺼이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가르치신 대로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는 말씀은 우리의 모든 생활에 다 해당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고 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지 못한 자가 어떻게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피하거나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때 하나님께 전혀 등을 돌려대지 않은 자라면 핑계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용서의 소망이 결부되어 있지 않다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기필코 증오감을 일으키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채찍에 놀라 스스로 고통을 느끼는 죄인은 하나님을 멸시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피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피하는 것은 완전히 배도하는 것이요 반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고 한 다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확신이 없으면 나태함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우리의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교황주의자들이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불신자들도 가끔 대단한 진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화목하셨다는 확신이 없기에 자발적인 순종을 하나님께 전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노예적인 공포심에서 돌아서지 않는다면 이 공포심 때문에 감추어져 짓눌려 있
던 그들의 마음의 무서운 반역은 얼마가지 못해서 겉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시편 130 편
시 130:5-6 나 곧 내 영혼이
본 시편 후반부는 여호와를 기다린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1) 감옥에 갇힌 죄수가 일구월심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은 석방되는 그 날 입니다.
그처럼 죄인은 죄 문제의 해결을 받고 구원받게 되는 사실을 기다립니다.
그러면 이런 좋은 소망이 인생에게 있을 수 있는가?
그런 좋은 소망은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하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2) 만일 하나님이 무능하시든가 무자비하시다면 그런 소망이 인생에게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신 천지 만물을 지으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신(롬4:17)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여 주실 방침을 세우시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신 만큼 택하신 자들을 관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좋아하십니다.
정죄하시는 이가 하나님 뿐 이시니 사죄하실 권한도 하나님에게만 있으십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은 무한히 자비로우시사 사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입은 인생들은 이 길에서만 소망을 얻습니다.
1. 본문 5절은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먼저 일반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불쌍한 죄인들에게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실 준비하고 계신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 후에 죄인들에게 좋은 소망을 가지라고 용기를 불어넣어 줌으로 결론합니다.
‘기다린다’ 와 ‘신뢰한다’ 는 동사는 현재 시제 대신 과거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기다린다’ 나 ‘내가 기다렸다’ ‘내가 바란다’ 도 아니고 ‘내가 바랐다’ 입니다.
이 구절 상반절에 나오는 반복은 강조형입니다.
“영혼”은 덧붙인 강조로 선지자가 ‘마음 깊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신뢰했다’ 입니다.
또 우리의 추측은 선지자는 사람들 보기에도 인내하고 신실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내적 감정도 하나님 앞에 조용하고 인내 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믿음이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드러나게 하나님을 비방하거나 자기 불신앙 나타내는 일을 억제합니다.
그러나 동료들의 감시가 없을 때 잠잠히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열 사람 중 한사람도 찾기 어렵습니다.
선지자는 자기 인내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130 편
이 약속이 없어진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앞에서 필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다면 우리의 마음은 쓰러지고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선지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만족을 느끼는 길만이 우리가 참된 소망을 가질 증거를 제시해 준다고 가르쳐 줍니다.
사람이 말씀을 붙들고 자신의 복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때에 이 확신은 기다림과 인내의 어머니가 됩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비록 자기 자신의 믿음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말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선지자는 먼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직 말씀만을 의지하도록 합니다.
다음에 선지자는 그 믿음이 우리를 인내하게 해 주지 못하면 그 믿음은 헛되고 쓸데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경계합니다.
2. 본문 6절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의 소망의 열렬함과 소망 중에 인내한 사실을 말합니다.
이 비교 구문은 선지자가 누구를 기다리는가가 잘 나타납니다.
선지자가 파수군의 기다림을 말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부지런함과 경성함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반복구문은 자신의 오래 참음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같은 과정을 중단 없이 계속하였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즉 반복구문은 인내를 나타내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선지자의 이 두 가지 면은 유의해서 살펴볼 가치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 얼마나 느리고 냉담한가와 사소한 바람소리만 들어도 흔들리거나 떨어지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잘 나타내 주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보통 네 교대로 밤의 파수군을 세웠기에 이 구절은 밤을 교대로 지키는 밤의 파수군들이 아침이 밝아오기를 조심스럽게 기다리는 것처럼 선지자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더 자연스런 의미는 성문을 지키는 자들이 아침에 다른 모든 백성보다 일찍 일어나 자기들이 맡아야 하는 성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선지자의 마음은 전력을 다해 하나님을 찾기에 분주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반복구문은 선지자가 눈을 뜨고 지켜 서서 자기의 목표에서 끝까지 요동치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시간을 지체함으로서 우리를 불안케 하여 날마다 지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열심이 식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시편 130 편
시130:7-8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선지자는 자기의 구원에 대한 대망의 정신을 모본으로 보이면서 온 이스라엘에게 같은 정신을 고취(鼓吹) 합니다.
비록 좋은 일이라도 먼저 내가 하지 않고 남에게 권하기는 어렵습니다.
혹시 그리할 수는 있으나 성과는 적을 것입니다.
1. 본문 7절은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자신을 말하여 자신의 본을 모든 사람이 따를 수 있도록 보여줍니다.
그 후에 선지자는 이 교훈을 교회의 모든 몸에 적용시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본성이신 인자하심이요, 또한 이 근원에서 구원이 나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상반절에서 비록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받을만한 공로나 가치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렇게 교회의 믿음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의 상호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보응하신다고 생각하기에 성경 말씀에 나타난 소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치 우물에서 물을 긷듯이 인자로부터 선지자는 구원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움직여 자신이 자기 백성들의 구속주이신 사실을 나타내도록 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이 구원을 “풍성한” 것이라고 말씀함으로서 성도들이 막다른 상황에까지 다다른다 해도 하나님의 손 안에는 자기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많은 방법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자신을 자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의 위대함이 성도들을 방패로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낙심하였을 아주 어려운 상태에 교회가 처해 있을 때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이 교훈을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 성도들이 가장 깊은 웅덩이에 빠졌을지라도 자신의 구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필요하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알려지지 않은 방법들을 동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시편 130 편
둘째는 교회가 환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이 교회의 구원자이심을 나타내실 것은 분명한 사실로 붙드는 것입니다.
이 진리에 대해서는 그 뒤를 이어 다음 구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2. 본문 8절은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자기가 앞 절에서 말했던 내용을 교회에 더욱 가깝게 적용시킵니다.
선지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백성들의 구원자가 되신 사실을 입증하실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선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증거를 가질 때 우리는 또한 우리의 구원을 확실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선지자가 한 말씀은 좀 더 친숙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구속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사역이요, 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택한 백성들만 구원하시기에 성도들은 모든 환난에서 피하지 못할까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주장하신 일의 수행 중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앞 절의 말씀을 되풀이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겸손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용서를 간구한다면 그들의 죄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구세주이신 사실을 보여주시는 데에 방해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어 עון (아온)은 가끔 죄에 대한 형벌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렇지만 암암리에 죄 자체를 가리키는 의미도 가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형벌 면해 주시기를 약속하실 때마다 동시에 자기가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도 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과 값없이 화목하심으로서 사죄를 약속하십니다.
이 해석대로 하면 선지자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바벨론의 포로에서나 원수들의 학정이나 압제, 가난이나 다른 질병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부터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신 사람의 죄가 용서함을 받기 전에는 구원에 대한 진정한 소망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환난에서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지를 기대해야 합니다.
즉 구원을 구하는 순서를 이 구절에서 배워야 합니다.
항상 죄 용서가 먼저 따르지 않으면 은혜로운 일은 도무지 생길 수 없습니다.
시편 130 편
오직 형벌만 면하기를 바라는 자는 마치 어리석은 병자와 같이 고통스러운 병세가 다소 없어지면 그들을 괴롭히는 병 자체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우리를 고난에서 건져 달라고 구할 때 우리는 먼저 사죄함을 받음으로서 하나님과 은혜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힘써야 됩니다.
만일 사죄함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형벌 면제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버림받은 자들에게서 흔히 일어납니다.
참되고 실질적인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고 우리에게 인자하심을 나타내 주실 때 이루어집니다.
또 우리의 추측은 한번 용서함을 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이나 긍휼에 가까이 가지 못하거나 또 그것을 누리지 못할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라는 말은 형벌이나 채찍을 완화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죄 용서하심에서 장래에 죄인들에게 형벌의 집행이 남아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만족설이나 연옥설에 관한 교황주의자들의 어긋난 사상을 반증해 줍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이미 용서해 주신 자들에게도 때때로 벌을 내리셨다고 반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사람들과 화목하신 바로 그 순간에 자기의 인자하심의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시지 않고 사람들이 앞날에 조심스러운 행동을 하도록 채찍질하기 위해서 항상 자신의 노를 완화시키지 않으신다’ 는 사실로 답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은 하나님께 구속의 댓가를 반밖에 드리지 않는 교황주의자들이 생각해 낸 만족 교리를 제공해 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외면적인 복을 약속해 주신 수많은 성경 구절은 항상 죄 용서에 대한 약속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 공로로 하나님을 만족케 할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형벌을 집행하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어떤 형벌이나 채찍을 가하여 좀더 완전하게 율법을 지키도록 해주시는 일을 교황주의자들은 죽은 이후에까지 해당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들이 이교적인 많은 꿈들을 모다 쌓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못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속에서 죄 용서를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신다는 참되고 유일한 화목의 방법을 그들이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악에서” 란 말씀은 불쌍한 죄인들이 여러 가지로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하십시다.
시편 130 편
3.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앞서 말씀한 것과 같은 하나님께서만이 주시는 그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 바로 하나님 자신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5-8).
“기다림”은 신앙의 중요한 방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되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바라보면서 잘 기다려야 됩니다.
우리가 다른 일은 잘 기다려도 하나님의 일 기다림에는 너무 부족합니다(약5:7-11).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되 소망을 가지고 낙심하지 않을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사 우리 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7절).
하나님의 “인자” 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서 흘려 보내시는 “구속”은 우리의 확실한 소망의 근거요, 유일한 피난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