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7월 19일 몽양 여운형이 암살당했다. 여운형은 1918년 결성된 신한청년당의 당수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해 한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호소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에도 참여했다. 레닌·트로츠키 등과 만나 한국독립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를 요청하고, 제3 인터내셔널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 등 활발한 국외활동을 펼쳤다. 1944년에는 해방에 대비하고자 건국동맹이라는 항일지하조직을 조직했고, 해방 후에는 이를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1947년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에게 피살되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발발/1870. 7. 19 ◀ 비스마르크(1880)
1870년 7월 19일 보불전쟁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을 격파함으로써 황제의 명예를 회복하려 했고,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는 남독일 국가들을 끌어들여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독일 제국을 형성하려고 했다. 프랑스가 전쟁을 선포했으나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은 바젠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야전군을 요새에 가둠으로써 전쟁은 독일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마크 마옹 원수가 지휘하고 나폴레옹 황제가 가담한 프랑스의 주력부대가 바젠 구출작전을 펼쳤던 스당 전투는 프랑스 군대의 항복으로 끝났다. 결국 휴전을 위해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체결되었고, 프랑스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했다.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황제로 선포됨으로써 비스마르크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프로이센의 독일 지배는 확고해졌다.
제22회 모스크바올림픽 개막/1980
인류최대의 스포츠제전인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대회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 미국을 위시한 세계 약 60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레닌 스타디움에서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브레즈네프 소련 당서기장은 올림픽에 참석한 선수들과 관람객들을 통제하기 위해 레닌 스타디움 주위를 경찰과 군인들로 벽을 쌓은 뒤 개막을 선언, 동서 냉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이 대회는 1896년 근대 올림픽경기가 시작된 이래 사상최초로 공산권에서 개최되는 것이었다.
전해인 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침공, 서방국가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철퇴하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자 이에 미국을 위시한 서독 일본 등 스포츠 강국이 올림픽대회를 보이콧함으로써 스포츠제전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잃고 반쪽짜리 올림픽이 되고 만 것이다. 당초 소련은 최고 최대의 올림픽을 준비했지만 모스크바올림픽은 1952년 핀란드 헬싱키올림픽 이후 가장 적은 81개국 선수 5326명만이 출전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 대회 스타는 소련의 남자체조 선수 디디아틴이었다. 그는 금메달 3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개를 얻어 가장 많은 메달 획득수를 기록했다. 이로써 소련은 6백30개의 메달 중 1백95개, 1백27개의 금메달 중 80개를 따내며 1위를 차지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하와이서 별세/1965 ◀ 이승만과 김구
독립운동가·초대대통령. 호는 우남(雩南). 황해북도 평산(平山) 출신.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897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7년 조지워싱턴대학을 졸업하였다. 이어서 1908년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0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으로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당하자 친일정권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96년 서재필(徐載弼)이 미국에서 돌아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이에 가담하였으며,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의 주필을 지내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개화·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고 중추원 설치를 주장하다가 98년 황국협회의 무고로 체포, 투옥되었으나 1904년 출옥하였다. 그해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가 T.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0년 국권피탈 뒤 귀국, 이상재(李商在) 등과 조선기독교청년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을 양성하다가 12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4년 《한국태평양》지를 발간하였고, 19년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 임시정부의 직제를 대통령제로 바꾸고 20년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21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않자 의정원의 불신임을 받았다. 그 뒤 워싱턴·하와이 등지에서 항일외교활동을 벌이다가 광복 후 귀국,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총재,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지내며 반공·반탁을 주장하였다. 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이어 초대 국회의장·대통령이 되었다. 6·25 때 정부가 부산에 피란해 있던 51년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유당을 창당, 이듬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54년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重任制限條項) 철폐를 골자로 한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으로 대통령에 3선되었고, 60년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로 하야,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독립정신》 《일본폭로기》 등이 있다.
그밖에
2001년 헌법재판소, 전국구 선출방식 위헌 결정
1999년 대우그룹 '구조조정 가속화 및 구체적 실천방안 발표'(그룹해체 시작)
1992년 김달현 북한 부총리, 판문점 경유 서울도착
1989년 야루젤스키, 폴란드 대통령에 선출
1988년 납북-월북작가 1백여명의 해방전 문학작품 출판 허용(해금)
1985년 부산 지하철 1호선 개통 (동래구 청룡동∼부산진구 범7동 광장간)
1982년 한국-자메이카 경제기술협력협정 체결(킹스턴)
1981년 김환진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1년 한국,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전 우승
1980년 은행-보험-증권기관 임직원 431명 숙정
1979년 김진호(女), 세계양궁선수권대회서 60m 더블라운드 세계신기록 수립
1977년 등소평 복권
1967년 김도연 박사 별세
1962년 미국 나이키제우스 미사일, 가상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요격 성공
1962년 美 건물 13층 높이의 '맘모스'기구 발사에 성공
1962년 미국 나이키제우스 미사일, 가상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요격 성공
1957년 미국 네바다서 원자로케트탄 첫 실험
1956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한국 등의 유엔가입 촉구에 관해 언급
19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개막
1951년 국민방위군사건 김윤근소장 등 5명에 사형 판결 (8월13일 집행)
1950년 미국 국무성, 한국사태에 미국정책(한국백서) 발표
1949년 프랑스, 라오스 독립 승인
1938년 최초의 우리말 사전(문세영) 발간
1933년 계초 방응모,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
1924년 조선일보, 편집방침을 변경(1면에 뉴스를 게재)
1920년 코민테른 제2회 세계대회 개최
1907년 고종 강제퇴위(양위조칙 발표)
1882(조선 고종 19) 임오군란 일어남
1864년 태평천국의 수도 남경의 함락으로 태평천국의 난 종식
1859년 한국 최초로 찬송가를 간행한 언더우드 선교사 출생
1848년 美 뉴욕주 세니카폴스서 '여성권리대회' 개막
1846년 최초의 광도성표인 하버드 광도측정법을 확립한 미국의 물리학자 피커링 출생
1840년 칠레의 대통령(1889-91) 발마세다 출생
1834년 프랑스 화가 드가 출생
1814년 권총을 발명한 미국의 발명가 콜트 태어남
1799년 로제타 스톤 발견
1455년 세조, 단종 폐위하고 즉위
64년 네로 황제 때 6일간의 로마 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