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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누정 정원 스크랩 靑溪亭
이장희 추천 0 조회 18 14.08.05 16: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의 혼 樓亭 .39] 영양읍 대천리 '삼귀정'·영양군 청기리 '청계정'

  • 사진=김신곤기자 
  • 2007-04-03 08: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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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혼 樓亭 .39] 영양읍 대천리 '삼귀정'·영양군 청기리 '청계정' [한국의 혼 樓亭 .39] 영양읍 대천리 '삼귀정'·영양군 청기리 '청계정'


함양오씨의 세거지인 영양군 영양읍 대천리와 청기면 청기리 일대에는 오씨 일가의 유적들이 곳곳에 보존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1599~1617)은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일어나 아우 오윤성과 함께 무과에 응시하여 형제가 나란히 급제, 험난한 구국의 길을 걸었다.
 
문월당은 선전관으로 근무하다가 선조 임금에게 발탁되어 군기의 요직을 맡아 육전의 난제 해결과 황간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로 인해 훗날 황간현감을 지내기도 하였다. 아우 오윤성은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거제도 앞바다에서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영양에서 유일하게 해전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장군으로 꼽힌다.
 
문월당은 3남1녀를 두었다. 큰 아들은 용계(龍溪) 오흡(吳 :1576~1641)이고, 둘째는 우재(愚齋) 오익(吳瀷:1591~1671)이다. 셋째는 취수당(醉睡堂) 오연(吳演:1598~1669)이다.
 
영양 대천리에 있는 삼귀정(三龜亭)은 용계가 만년에 지내던 곳이고, 청기리에 있는 청계정(靑溪亭)은 우재가 거처하던 정자이다.
 
#삼귀정은 용계의 항거정신이 밴 곳
 
용계 오흡은 퇴계선생 문하인 간재(艮齋) 이덕홍의 제자이다. 광해조 때 간신 이이첨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비분강개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고향인 대천리 반월산 아래 초가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그 후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되고 맞은편 강둑에 다시 정자를 세워 만년의 강학처로 삼았다. 그리고 정자 옆에는 사명대(思明臺)라는 대를 축조하고 주변에 송, 죽, 매를 가꾸면서 절의를 세워 청나라에 항거하며 끝까지 복종하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용계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호조좌랑 벼슬을 내렸으나 결단코 부임하지 않았다.
 
침략자는 물론, 그들에게 항복한 조정(朝廷)의 부름까지 단호하게 거부한 철저한 절개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따름이다.
 
삼귀정 앞에는 정자를 등에 업은 듯한 형상의 세 거북바위가 엎드려 있어 삼귀정(三龜亭)이라고 했다. 지금은 정자를 고치면서 터를 돋우는 바람에 거북바위는 땅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정자 앞에는 동쪽에서 맑게 흘러 내려오는 동천과 반변천이 합류되어 계절마다 갖가지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용계의 저서로 용계선생 문집이 있다. 용계의 12세손 오원일씨는 공직에서 은퇴하고 현재 영양문화원장을 맡아 지역의 문화재 보호와 선대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고향을 지키고 있다.
 
 
#청계정 또한 우재의 절의를 상징
 
우재 오익은 문월당의 둘째 아들이고 바로 용계의 아우다. 청계정 기문에는 구읍지(舊邑誌) 내용을 간추려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학문이 일찍 완성되어 여러 번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약봉(藥峯) 서 선생을 찾아가 뵈니 약봉이 대단히 인정해 주었다.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하였으나 우재는 사양하였고 물러나 산수 간에 은거하였다. 그 당시 이웃에 사는 표은(瓢隱) 김시온(金是 ) 선생이 절의를 지키며 지내는 것을 보고 도의(道義)로 사귀며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
 
표은이 우재에게 남긴 시에 '병으로 인하여 삼년을 누웠으니(因病三秋臥), 팔년 동안 이웃으로 지낸 정 잊기 어렵네(難忘八載隣). 푸른 눈빛으로 바라본 반가움 오히려 옛날부터 사귀어온 인연 같았는데 (眼靑猶似昔), 흰머리 되도록 사귀어도 어찌 이제 막 사귄 사람 같다는 인연일 수 있으리(頭白豈如新)'라고 하면서 표은이 돌아갈 때 산과 토지를 분할하여 한 구역을 떼어 주었다.
 
그러나 우재는 굳이 사양하고 별도로 마을 앞 암석 위의 한 구역을 점지하여 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청계정이라 이름하였다. 또 곁을 연어대(鳶漁臺)라 하고 자서(自序)를 남겼으며 앞산 봉우리는 천일봉(天一峯)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정재(定齋) 류치명이 지은 행장을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에게 수학하였고 창석(蒼石) 이준, 참의(參議) 신홍립과 교유하였다. 향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불리하였다.
 
부친상을 마치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항복하자 비분강개한 시를 짓고 세상과 교유를 끊어버렸다. 당시 표은 김시온이 그 지역으로 피란을 오자 함께 의기투합하였다.
 
나중에 표은이 토지를 분할하여 주자 너무 많아 사양하고 연어대 주변에 몇 이랑을 취하여 청계정을 세우게 되었다. 석문(石門) 정영방, 영은(靈隱) 조정곤, 임천(臨川) 조정헌과 교분이 두터웠고 난고(蘭皐) 남경훈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난고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표은공 같은 높은 정신과 우뚝한 절개를 기려 그와 교유하며 땅을 분할하여 경작하였고 산을 나누어 살았으니 한 구역의 풍광이 마치 어제처럼 완연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표은이 우재에게 땅을 떼어준 부분은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둘 간의 사상적 교류와 친분은 대단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청계는 나중에 우재로 호를 바꿈
 
표은 김시온은 현 안동 천전리(내앞) 학봉 김성일의 부친 청계(靑溪) 김진의 증손자이다. 병자호란때 나라가 청에 항복하자 예전에 증조부 청계공이 터전을 이루어 놓은 청기리로 들어가 은거하다가 우재와 땅을 분할해 가질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됐다.
 
우재의 처음 호는 청계(靑溪)였다. 정자를 청계정이라 이름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학봉의 부친 청계공의 호와 같고 서로 멀지 않은 지역의 선배에 대한 죄송함이 있었다. 이에 청계란 호를 우재로 바꾸고 정자에도 우재라는 현판을 걸어두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주는 단서가 해월(海月) 황여일의 연보에 나타나 있다.
 
연보 '6년 갑인 선생 59세' 조에 "구월에 오익이 와서 뵙다(九月吳瀷來謁)"라고 되어 있다. 그 아래 주석에 '영양사람 호 청계가 일찍이 문하에서 수업하다(英陽人號淸溪, 曾受業門下)'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인들이 청계공 김진의 청계정을 그대로 우재에게 넘겨 주었다는 말은 사실에 없는 낭설이다. 현재 청계정 현판글씨는 안동 천전리의 김희수(金喜壽)가 쓴 것이다. 우재란 현판도 마루 위에 걸려 있다.
 
우재의 저서는 우재문집 4권 2책이 전한다. 현재 우재의 13세손 되는 오병직씨가 공직에서 은퇴하고 고향에 들어와 선대의 유적을 더듬어 연구하고 있다.
 
청기리에는 삼귀정과 청계정 외에도 오연(吳演)의 강학처인 취수당(醉睡堂)이 남아있고, 우재의 8세손되는 구재(懼齋) 오정교(吳正敎:1825~1897)의 학행을 기려 후손들이 세운 조계정(造溪亭)이 있다. 이 마을에는 또 우재와 절친했던 표은의 유적인 돈간재(敦艮齋)도 남아 있어 이들 간의 깊은 우의를 다시금 느낄 수 있다.

                                                                              

                                                                                             -영남일보, 한국의 혼 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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