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은선 시집 {기억의 강물} 출간
천은선 시인은 경남 거제에서 출생했고, 2017년 《한국시원》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현재 충남 서산에 거주하며, 흙빛 문학회 회원, 충남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멈추었으나 멈추지 않는 기록을 기억이라고 할 때, 천은선 시인의 첫 시집 『기억의 강물』은 정지된 과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흐름이라는 연속성을 지닌다. 그것은 소멸된 대상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시인의 행위이다. 체험으로 얻은 과거의 이미지를 현재의 이미지로 생산하는 동안 그것들은 변형되고 각색되어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시집 『기억의 강물』에서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이별”의 실상은 ‘죽음’에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별의 대상은 “아버지”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구라고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아버지”를 투과해 보여주는 “이별”의 순간과 이후의 기억은 ‘문득’을 뛰어넘어 ‘숱한’의 지속성을 담고 있다. “서리 내린 날”의 화단처럼 이미 진 꽃과 겨우 남아 있는 꽃의 수명은 미미한 차이다. 겨울을 맞닥뜨린 꽃의 이미지를 “아버지”에 얹는 순간 갈등은 증폭된다. “아버지 닮은 달이/ 넘어가는 해를 붙잡으려 애쓰고”(「어머니의 허리」)있는 모습에서 “달”은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 전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도 기울고 달도 기울고, 삶이란 이렇듯 굵직한 통증을 수시로 남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통증을 중심으로 파편들이 여전히 세계를 이룬 채 현재의 시간을 흘러가고 있다.
“기억과 망각은 반복하며 가슴 깊은 곳으로 써 내려가고 멈출 줄 모르고 걷는 시간은 미래로만 가는데 사그라지던 가슴으로 여백에 잠시 침묵하는 사이”(「할머니 밥그릇」) 불쑥 시는 찾아온다. “아버지의 노트”는 잔상으로 남은 기억을 재생시켜주는 발화체이고, “아직 피지 못한 꽃들 사이”(「분리수거 중」)에는 시로 변모하지 못한 언어들이 수북하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별이란 끝을 의미하는 분리가 아니라 새로운 항해를 준비하는 시적 동력인 셈이다.
이별은
찬바람 삼켜가며
씨앗을 키우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별에 대하여」부분
천은선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은 “씨앗”이 싹을 틔우는 일과 동일한 통증을 지닌다. 통증이 통증을 밀어내며 꽃을 피울 때 기억은 새롭게 해석될 것이다. 과거의 기억이 기억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허상은 타자의 감정이 소멸된 건조한 세계다. 그곳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서 시인은 스스로 꽃대가 되어 흔들려야 한다. 몸으로 뱉고 몸으로 받는 떨림. 이렇게 흔들리는 순간이 기억의 마디에 닿을 때 시라는 움을 틔우지 않을까. 그래서 이전에는 “떫어 울던 눈물 속에서도/ 알토란같은 날들/ 행여 누가 밟을까봐 얼른 껴안”(「그래도」)듯 소극적이었다면, 이제는 “해탈하지 못한 봄빛/ 꽃잎 사이, 풍경소리 고인”(「풍경소리」)날을 시적배경으로 남겨두고 “건널목 지나오는 봄에/ 다시 몸을 일으”키듯 능동적인 몸짓을 충분히 드러내도 좋을 것이다.
호기롭던 언덕에 헛물이 들어
푸념으로 넘어진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보자
어줍어 머문 자리
희멀거니 선 밑그림 위로 방황이 지나면
뇌리에서 부스럭거리는 고집들
반만 접어보자
미완성의 걸작을 기대하며
불그스레함이 붉다고 고집하고
푸르스레함이 푸르다고 고집하면
그렇다고 하자
나를 고집하지 않기로 하자
시간을 주무르며
다시 일어나
천천히 채우기를 반복하는 달과 함께
한발 한발 느린 길을 가보자
-「한발 물러서서」전문
‘기억’은 생성과 소멸의 영역이다. 그곳에서 파생된 세계는 다양하다. 그러므로 시인이 만나는 시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한 세계이다.
“상처가 날 때마다/ 온몸에 꽃잎을 붙이고/ 가시 돋친 말들을”(「꽃 진 자리」) 달래는 동안 천은선은 시를 만났을 것이다. 독립된 개체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구성을 이루는 대상의 범주가 표면적으로는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 ‘가족’일지라도 그것이 만들어낸 시적 세계는 공유할 수 있는 영역이어서 기억의 파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발 물러서서」를 통해 고백한 천은선 시인의 목소리는 비장하면서도 겸허하다. 그래서일까 “설익어 내게로 온 시간들/ 여물어가고 있는 여정에 담고/ 하나둘 익히는 중이다”(「익어가는 중」) 라는 고백은 더욱 진솔하게 다가온다.
“마지못한 삶도 내 것이라 여기고”(「당신의 발자취」), “도시의 불빛이/ 거리에서 비틀거릴 때/ 별을 사냥하는 거미”(「거미」)처럼 시를 찾아나서도, “오월이 피면/ 추억을 붙잡고/ 고향으로”(「감꽃」)향해도 좋을 일이다. 그 걸음에서 ‘문득’ 기억의 강물을 다시 만난다면 강물에 몸을 담군 채 울퉁불퉁한 강바닥의 속살을 맘껏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그때쯤 “무슨 재미로 사냐고” 사람들이 또 물어오면 “나이만큼의 봄이 한껏 밝다”고 대답해주면 될 것이다.
----천은선 시집, (기억의 강물}, 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