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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바란다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 여기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으로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실상은 헬라어 원어로 ‘히스테미’라는 말인데 그 뜻은 ‘기초’라는 의미가 있고 ‘실체’라는 의미가 있는데 마치 건물을 비교할 때 설계도와 같은 것입니다. 건축을 할 때 설계도를 먼저 그립니다. 그러면 그 설계를 따라 건축을 그대로 하게 되는데 나중에 보면 자신이 꿈꾸었던 것이 그대로 건축물로 현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있습니다. 하나님도 육신적인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말씀이 살아서 역사를 하십니다. 여기서 ‘증거’는 ‘증명’이라는 뜻이 됩니다. 어떤 사건의 물증이나 증인이나 증거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겠죠. 그만큼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만 확실하고도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그런 믿음을 말합니다. 아멘
그럼 구체적으로 이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첫째: 믿음의 선진들의 증거
우리는 오늘날 우리만 하나님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의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으며 또 역사적으로 믿음의 조상들이 있습니다. 그 믿음의 조상들의 인생이나 걸음의 여정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의 역사를 우리는 기록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서 먼저 믿음의 선진들의 증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증거라는 말은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브리서11:3]
우리가 오늘날 세계를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봄이 되니 꽃이 피고 또 비가 와서 만물이 푸르고 산과 나무들이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 작품을 만드신 분은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답겠습니까! 예수를 보면 그림이 아름답습니다. 조각품도 멋집니다. 또한 소설이나 시를 보면 아주 훌륭합니다. 그런 작품을 만든 사람이 훌륭하기 때문에 그런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역시 이 세계의 창조물을 보니 창조주 되신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지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아멘
그리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하나님은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가인과 아벨이 태어났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11:4]
창세기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어서 곡물을 제단에 드립니다. 그리고 아벨은 양을 치므로 양을 잡아서 제단에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은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너무 화가 나서 아벨을 질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이해하기 힘든 이 일을 히브리서 11장에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는데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았을까? 어떤 사람은 아벨은 양을 드렸고 가인은 곡물을 드렸기 때문이라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시대에 양을 드리는 제사도 있지만 곡물의 소제를 드려도 하나님은 받으십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받으시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가인은 믿음이 없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믿음도 없이 그냥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없는 것이고 정성이 없으며 사랑과 성실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받으시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는 아벨처럼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찬양을 하고 온 정성을 다해 기도하며 마음을 집중하여 주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죽음으로서 지금도 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너무나 싫어하여 결국 죽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피가 성토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벨의 교훈은 지금도 전해지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며 그 믿음의 예배의 정신이 전달되고 교육되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많은 사람들을 교육하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살아서 보다 죽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또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벨이 그런 사람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면서 또 에녹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브리서11:5]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바로 천국으로 올리워진 사람이 두 사람 나옵니다. 하나는 에녹이요 하나는 선지자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바람 가운데 하늘로 올리워갔다고 했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바로 옮기워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에녹은 죽음 없이 옮기어졌는지 5절 말씀에는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평생에 살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이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그렇게 기쁘시게 했는가?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5:21~24]
이것이 에녹의 사적의 전부입니다. 에녹이 어떤 위대한 일을 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있다면 에녹이 므두셀라와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평생에 늘 주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위대한 일을 많이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와 늘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늘 함께 하신 것처럼 우리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평안할 때에도 주님이 함께하시며 평안과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도 주님이 함께 하셔서 힘을 더하여 주십니다. 아멘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은 성령의 인도심이요, 내주시함심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주님이 이끄시는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아멘
자녀가 부모께 많은 대접을 하고 또 훌륭한 일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자녀는 늘 함께 해주는 것입니다. 시간 있을 때 찾아와 주고 전해주고 안부 묻고 가까이 해주는 그것이 가장 큰 효도인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11: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살아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주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십니다. 상급으로 보상해주시는 분입니다. 아멘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히브리서11:7]
창세기에 보면 노아의 사건이 나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 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을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숭배하고 범죄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전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선택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 14~16절에 나와 있는 치수대로의 방주 크기는 길이가 삼백규빗(135m), 폭이 오십규빗(22.5m), 높이가 삼십규빗(13.5m)으로 짓게 됩니다. 학교 건물보다 조금 길고 큰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에 순종을 했습니다. 그 당시 시대에 사람들이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을 하고 방주를 통해 구원한다고 경고할 때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 했습니다. 경외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또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주를 지었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신앙이고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과 달라서 구원도 하시고 심판도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아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노아는 그 경고를 받고 순종함으로 온 가족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사람들은 경고를 듣지 않고 오히려 더 부패하여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서 에녹의 후손으로서 노아는 믿음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상속자가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믿음을 강조할 때에 한 사람을 더 예로 듭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브리서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세상의 우상 가운데서 살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으니 그 주변환경이 어떻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너의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습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신앙이 제일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인도하는 땅으로 갔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로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의 행동을 믿음으로 여겨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갈 때에 모든 것을 다 알고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장래 우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선하심으로 인도해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멘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브리서11:9]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나안 땅으로 와서 거주하였습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이방인의 땅이었고 이방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땅 한 평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이 땅을 너와 너의 자손에게 줄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약속을 하셨고 또 그 아들 야곱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그 당대에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430년이 지난 후에 실제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큰 민족을 이루어 이 땅을 점령하고 그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고 살았습니다. 비록 그의 삶은 나그네의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으시며 그 약속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브리서11:10]
지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하나님은 이 터에 성을 짓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를 지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비젼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히브리서11:11]
실제로 사라는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내년 이맘 때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장막 안에서 듣고 믿지 않았습니다. 사라는 자신이 경수가 끊어졌는데 90이 다 된 나이에 어떻게 아들을 낳겠냐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사라는 장막 안에서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라는 실제로 믿었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며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삭’이라 지었습니다. 그 뜻이 ‘웃음’이죠.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일찍이 약속하시기를 [네 아내 사라를 통해서 낳은 아들을 통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어 큰 민족이 되게 하실 것이라]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셨습니다.
사라의 믿음은 처음에는 인간적인 믿음, 현실적인 믿음, 계산적 믿음을 가졌지만 후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멘
결론: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믿음
우리는 이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믿음을 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우리와 늘 동행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가장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여야 합니다. 그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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