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매체와 소통
성급하게 역사화시켜 버리는 것 같지만, 조영일(소조) 평론가와 소설가 김영하의 논쟁은 여러 가지 점에서 흥미로웠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 중심엔 한국 사회에서 예술가/작가의 ‘살아감’이라는 문제가 놓여있다. 예술가/작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가 하고 있는 혹은 하려고 하는 일과 생존하는 일 사이의 갈등을 사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옳을까? 블로그를 통해 이루어지던 이 논쟁 와중에 최고은 작가의 사망 소식이 알려짐으로써 더 한층 현실성을 얻게 된 이 토론에, 트위터 글로 인해 생겨난 한 바탕의 논란이 있었고, 급기야 김영하는 블로그와 트위터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 논쟁은 내게 우선 인터넷이라는 소통 매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했다. 원리적으로 누구나, 그리고 ‘모두’를 향해 자신의 생각을 ‘공표’할 수 있는 인터넷 소통매체는, 그 즉각적 공공성과 개방성, 실시간성 등의 근거로 커뮤니케이션에 새로운 가능성을 던져줄 것이라고 기대되었지만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자신의 진술을 인터넷에 접근 가능한 ‘모든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공표’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터넷에 접근 가능한 ‘모든 사람들’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자신에게 집중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찬동과 동의일 경우엔 별 문제 없겠지만 비판과 비난일 경우 이를 감당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존재하기 전까지는, 감히 단언컨대,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바로 자기 자신을 지목해 실시간으로 ‘달려드는’ 그렇게 많은, 원리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비난과 공격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가시적으로, 눈 앞에서 직접 겪을 기회가 없었다. 1대 1이 아닌 1대 다수의 관계에서, 거의 구술성의 형식을 띤 비난이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이러한 상황이 한 개인에게 얼마나 공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가는 이미 그간 한국에서 일어난 여러 사례를 통해 분명해졌다.
이러한 총체적 비판에 자신을 노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인터넷을 통한 소통에 새로운 감수성을 요구한다. 이를 각오 혹은 극복할 만한 마음가짐이 되어있지 못하면 여기에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 급속하고 집단적인 이러한 비난/비판의 ‘열려진 가능성’에 대해 자신을 방어할 능력과 감수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그로인해 상처받기 쉽상이다. 조영일-김영하 논쟁의 와중에서 조영일은 ‘트위터 사태’를 통해, 김영하는 자신의 블로그에 대한 트랙백과 댓글을 통해 그러한 ‘총체적 비난/비판’을 겪었다. 조영일이 그를 새로운 매체환경에 대한 미숙함이라는 간단한 언급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면, 김영하는 온라인 활동을 접었다. 두 논쟁 상대자는 온라인 매체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온라인 소통에 대한 나의 감수성은, 어느쪽이냐 하면, 김영하의 그것에 가깝다.)
문학/예술/인문학과 아이
이 논쟁과 관련해 내게 다가온 더 큰 물음은 한국사회에서 예술가/작가의 살아감이었다. 예술가/작가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혹은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이 논쟁을 보며 나는 그 범주에 ‘인문학자’를 겹쳐 읽고 있었다. 그 와중 김영하가 올렸던 글에서 다음 대목이 확 눈에 들어왔다. ‘아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김영하의 블로그가 폐쇄되어 링크 할 수는 없지만 아래 인용 글은 그의 블로그에서 직접 Copy 해 온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얘기 하나만 할까 한다. 나보다 어려운 작가들이 부지기수인데 아무래도 엄살 같아서 그동안 잘 하지 않았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등단을 하자마자 나는 결심을 하나 했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지켰다. 아이를 양육할 돈으로 더 오래 작가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처럼은 아니겠지만 내 동료작가들 역시 어떤 식으로든 뭔가를 희생해 지금 여기에 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문학이 나를 받아주는 한, 나는 그저 쓸 것이다. 그리하여 가늘고 길게 살아남을 것이다. 다행히 운이 좋아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적 유행은 자주 바뀐다. 내 소설을 읽던 독자들은 언젠가 다른 작가의 책을 읽게 될 것이고 내 소설은 잊을 것이다. 아니, 아예 아무도 소설책이라는 것을 사지 않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의 생존을 늘 고민한다. 살아있어야 쓸 수 있으니까. 소조님은 이런 발언을 작가들의 낭만주의적 허세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라는 존재를 잘 모르는 거다. 잘 모르는 대상은 공격할 수도 없고 하물며 바꿀 수는 더욱 없다.
김영하는 등단하자마자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 결심의 이유는 “아이를 양육할 돈으로 더 오래 작가 노릇을 하기 위한” 것이다. 김영하는, 그가 실행에 옮긴 이 결심을 “희생해야 했던 뭔가”라고 말한다. 그는 그가 지금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 - ‘지금 여기’ - 에 와있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던 이 결심, 그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삶을 위해 사람들이 ‘희생’시키고 있는 그 ‘뭔가 중, 가질 수 있으나 갖지 않는 ‘아이’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복잡한 수치나 통계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다. 언젠가부터 한국사회에서 “아이”는 자신의 분야에서 어떤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포기 혹은 희생되어야 하는 제일순위가 되어있다. 내게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렇게 삶과 직업의 영역에서 일정한 위치에 오르기 위해 아이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속해있는 분야가 바로 문학/예술/인문학 분야라는 사실이다. 다른 직업분야에서도 성공 혹은 커리어를 위해 아이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겠지만, 다른 직업에 비해 경제적 여건이 훨씬 열악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이 분야에서만큼 아이를 포기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위험 부담과 스트레스를 갖는, 예를들어 증권 매니저 혹은 모빌리티가 요구되는 저널리스트 등등이 자신분야에서 일정한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 아이를 포기한다면 이는 개인적 선택의 문제이기 쉽다. 그는 ‘커리어’냐 ‘아이’냐라는 양자택일에서 전자를 택한 것이다. 그런데, 문학/예술 혹은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를 위해 아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내 생각에, 단순한 개인적 선택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왜 그런고 하면, 문학/예술/인문학은 다른 인간 활동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예술/인문학이 무엇하는 것이냐라고 묻는다면, 아주 나이브한 수준에서 나는, 그것이 인간의 ‘살아감에 대한 성찰’이라 답하겠다. 예술과 문학, 나아가 인문학은 인간의 삶 혹은 살아감의 문제를 다룬다. ‘살아감에 대해 생각함’으로서의 그 활동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살아감이 단순한 생존이 아닌 ‘좋은 살아감’이 될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런데, 문제는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함은 ‘살아감’ 속에서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으며 ‘살아감’을 배제하고 괄호친 ‘생각함’이란 원리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이로부터 ‘살아감’과 ‘생각함’ 사이의 갈등과 긴장, 혹은 질곡이 생겨난다.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이 처한 곤란한 상황을 내 방식으로 정의하자면, ‘생각함’을 ‘살아감’의 논리에 종속시켜 버리거나, 그 반대로 ‘생각함’을 ‘살아감’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온 형행화된 공식으로 만드는 분위기 속에서 ‘생각함’과 ‘살아감’이 서로 충돌하고, 분열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삶의 논리, 다른 한편으로는 삶과 유리된 아카데미즘의 지배 속에서 ‘살아감’과 ‘생각함’ 사이에 심대한 불균형이 강요되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이 깊은 불균형과 갈등의 결절 점에 예술/문학/인문학자들에게서 “아이”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반드시 스스로 아이를 키워보아야만 ’제대로 된 삶‘을 살았다고, 그래서 좋은 살아감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학과 예술, 인문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낳고 키워보는 삶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늙은이처럼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인간의 삶의 문제를 다루는 문학/인문학이 처한 오늘날의 조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살아감을 사유하는 사람들조차 아이 갖기를 희생해야만 이 분야에서 일정한 위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김영하가 말하고 또 우리도 널리 믿고있는 이 생각이, 도대체 어떤 조건에서 생겨난 것인지, 그 생각은 문학/예술/인문학의 진정성에 대한 추구와는 어떤 관계을 갖는지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나아가, 예술/문학/인문학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는, 김영하가 그랬듯. 아이 갖기를 포기해야 한다면, 현재 이 분야에서 그 정도의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은 이들은 도대체 어떤 조건 혹은 특혜(?) 속에서 문학/예술/인문학을 해왔다는 것인가를 함께 질문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부인, 남편 혹은 부모의 삶의 시간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라면 그의 문학/예술/인문학 활동은 그럼에도 어떤 진정성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건 어떻게 해서야 가능할까?
예를들어, 한 해에도 몇 권씩의 책을 출간하는 괴물 인문학자 지젝에게는, 듣기로, 아이들이 있다. 그 정도의 지위에 오르고, 그 만큼의 ’인문학적 활동성‘을 발휘하기 위해, 그는 아이 갖기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을까? 그는 자기 아이들에게도 좋은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활동을 다 벌일 수 있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가 책을 읽고, 수많은 테레비젼 방송과 영화를 보고 전 세계의 학회를 돌아다닐 때 그의 아이들을 돌보고 챙겨주었던 헌신적인 부인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능력있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인문학자인 그는 자기 아이들에게는 낯설고 얹짢은, 늘 시간이 없는 아버지일까? 그건 인문학자로서의 그의 정체성과 양립되어도 되는 것일까? 이 두 경우 모두에 있어 아이 갖기를 포기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오늘날 문학/예술/인문학의 활동은, 내가 보기엔, 무척이나 분열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살아감의 조건 속에 처해있다. ’좋은 살아감을 생각함‘을 업으로 삼는 문학/인문학은 지금 여기의 삶의 조건 속에서 생겨나고, 우리 스스로가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분열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문학/인문학자 자신의 삶의 모습을, 이제는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첫댓글 사실 전 두 사람의 논쟁글을 읽던 와중에 이번 일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주장 모두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고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
더랬지요. 이번 논란에서 제가 가장 강렬하게 느낀 것은 표현에 대한 자구적
해석 부분이었습니다. 소설가가 '영악하게 살아남자'고 말할 때, 우리는 혹은
저는 그 배면에 숨겨진 반어적 여백을 읽습니다. 모처럼 물꼬가 트인 논쟁이
중단되었지만 나중에라도 시간을 내어 마저 읽을 생각입니다.
^^; .....
참 쓸쓸한, 씁씁한, 이야기 입니다. 그 작가를 모르지만 참으로 팍팍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동물"이 쓰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지?, 참으로 막막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다가 우리가 여기까지 왔나 알 수 없는, 알 수 있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작가는 "희생"이란 말을 어디에 써야하는 말인지를 좀처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의 행위가 전혀 그것과 상관없는, 아니 그것과 정 반대의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aurore님! 어떤 맥락에서 '그 작가'를 '동물'이라고까지 부르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 갖기를 포기하고 있는 많은,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 처럼 행동했기 때문인가요? 아내나 부모에게 생활과 양육을 맡겨야 하는, 아이를 가진 이 땅의 문학/인문학자들보다는, 그의 선택은 더 문학과 인문학의 본령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가 쉽게 말하는 희생이 저는 동물적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즉 내가 갖을 수 있는 먹을 수 있는 것을, 어떤 좋은 것을 누군가를 위해 나를 희생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아이에게 부어야 할 시간과 노력과 돈을 희생하기를 거부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이를 갖기를 포기하는 많은 부부들이 있습니다. 다만 그들 둘만의 시간을 더 오래 가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이것을 희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를 위한 한 선택, 더 좋은 삶을 위한 이기적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문학의 빈약함을 빌어서 그것이 하나의 희생이 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무엇을 위한 나의 희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래 길게 살아남기 위해 시간을 주어야할, 아무 조건 없이, 전혀 상호적이지 않은 줌을 줘야하는 귀찮은 존재를 포기한 것일 뿐입니다. 오래 길게 살아남기 위해,,,이 말은 더 이으면 오래 길게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로 저는 들립니다. 여기에는 어떤 나의 희생도 없다는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오래 길게 살아남기 위해" '시간을 주어야 할, 아무 조건없이, 전혀 상호적이지 않은 줌을 줘야하는 귀찮은 존재를 포기'하는 것. 그것이 '자기를 위한 이기적 선택'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입장도 있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들어 에피쿠르스의 다음의 말을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영혼을 몰아치는 사유를 방해하는 가족 생활의 괴로움. 결혼한 사람은 그의 “사적인 의무”를 돌보아야 한다. 그는 솥을 불 위에 올려놓아야 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리고 가야하며, 장인에게 손을 내밀고, 부인에게는 옷과 기름, 침대와 물통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그 집안의 일들이 그를 장악하고 있다면, 그는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과제를 맡을만한 여유가 없을 것이다. 철학자로서 그가 인류 전체와 관계 맺는다는 사실에서부터 자신의 사적인 관계에 대한 포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에게 가족이 없는 이유는 인류가 그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이가 없는 이유는 어떤 점에서는 그가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들을 산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르스에게 '아이'는 인류 전체의 문제를 돌보아야 할 철학자를 '사적인 의무'에로 묶어두는, 그러한 점에서 인류 전체에 대한 무책임함입니다. 그 철학자는 인류를 위해 '오래 길게 살아남아'야 마땅할테니, 사적인 의무에 그를 구속시키는 아이는 어울리지 않겠지요. 인류 전체를 아이로 갖기 위해 개인의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이 당당함에 비교해보면 오늘날 문학/인문학자들에게 아이의 문제는 다만 사적인 결단의 문제로만 환원되어 버렸습니다. 문학/철학/인문학이 '인류전체'의 문제와 관련된 활동이라는 보편성의 요구는 진작에 붕괴되었고, 아이는 단지 한 가족의 사적 용무로만 축소되어버린 조건 속에서만, 바로 그 조건 속에서
오늘날 작가/인문학자에게 '아이'의 문제가 다가오고 있기에, 우리는 '오래 길게 살아남아 문학/인문학을 하기위해'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사람을 '도덕적'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문제가 '참 쓸쓸하고 씁씁한' 이유는 저에게는, 오늘날의 문학/예술/인문학이 처한 이러한 조건에서 생겨납니다.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작가/인문학자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도덕화하는 시선도, 또 아이를 키우면서 - 아니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서 - 힘겹게 문학/인문학을하는 사람들에 대한 씁쓸한 시선도 모두 이 동일한 조건의 소산물이지 않을까요? 김영하라는 개인 작가를 '동물적'이라고 비난하기 보다 그렇게 동물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하면서 자신을 위로해야 하는, 작가/인문학자들이 처해있는 조건과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제가 보기에 더 생산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김남시님의 위의 글의 논조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님의 오래된 표현을 빌면 "오죽 했으면" 소위 인문학을 하는 작가가, 삶의 중심에서 삶을 말해야 하는 작가가 하나의 삶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 삶을 포기할 수 있는가? 따라서 그를 비난하고 판단하기에 앞서서 하나의 삶을 위해 다른 삶을 포기하는 이런 상황을 만든 사회적 조건, 우리의 지난한 현실을 반성하는 것이 더 유용하지 않은가? 이러한 논지 안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인문학을 하는 자가 사회의 단순한 희생자인지 아니면 그 자신이 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하는 주체인지의 문제입니다. 님은 전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경우 그가 계속해서 희생자의 자리에서
그를 희생자로 만든 이 자본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서 자신을 변명한다면, 우리의 조건은 솜털하나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울한 변명만을 그것에 대한 반복을 대대로 물려줄 것입니다. 순종과 저항에서 어디에 작가가 서야하는지는 작가의 선택일 것입니다. 저는 다만 그 선택이 어떤 위로를 지지를 받을 만한 것이 전혀아니라, 오래살아남기위한 자기이기적 진술일 뿐이라는 것을,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을 따른 것일뿐이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원환의 논리를 벗어나는 길은 그를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연쇄를 끊는 것이 님의 언어를 빌리면 더 "생산적인 "담론"이 아닌지 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앞서서 말한 두 삶, 한 삶을 위해 삶을 포기하는 이 모순에 직면해야하는 것은 바로 인문학을 하는 인문학자 자신일 것입니다. 문학과 예술(삶)을 "위해" 삶을 포기하는 그런 문학과 예술로서의 삶은 이미 죽은 삶일 것입니다. 이런 죽음의 논리 앞에서 저는 쓸쓸하고 씁씁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삶은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닐 겁니다. 거짓된 대의 속에서 상실되는 삶을 우리는 많은 곳에서 봅니다. 위의 작가도 그 예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오죽하면"의 논리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논리로 넘어가는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삶의 분리를 중단하는 것일 겁니다.
네, aurore 님의 말씀에는, 김영하-소조 논쟁에서 등장한 쟁점이 한발 더 나아간 차원에서 반영되어 있는 듯 합니다. 현재의 사회적 조건 하에서 개인이 행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패배주의적으로 포기하면서, 구조와 사회의 '탓' 혹은 '비판'을 행하는 입장과,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그러니까 삶을 살아가려는 입장... 나 자신은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을까 많이 생각하게 합니다. 고맙습니다.
조영일 비평가와 김영하 소설가의 논쟁이 소설가 쪽에서 나온 석연치 않은 사과발표로 무산되어 독자의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를 잃어버렸어요. 작가가 예술을 위하여 아이를 포기해야했다는 예술가의 짠한 사정을 어떻게 수용해야할지 저는 모르겠더군요. 생리에 가까운 문제를 사리를 따져봐야 할 글에서 언급하는 일이 사건에 어떤 도움을 야기할 거라고 그분은 생각하신 걸까요. 저도 그걸 읽을 때 놀랐어요. 논쟁 당사자가 말 붙이기 어려워할 팩트이고 그래서 그것은 논쟁 당사자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더 진지하게 말할 수 없게 만들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오늘날 작가/예술가의 삶의 문제가 주제가 된다면 '예술을 위하여 아이를 포기했다'는 고백은, 저는 '사리를 따져봐야 할 글'에는 어울리지 않는 '생리에 가까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작가/예술가의 실존적 현실을 이야기할때 '반드시' 함께 이야기해야 할 주제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오히려 그런 논쟁에서 '아이'의 문제, 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가 괄호쳐지고, 이야기되지 않고, 거의 '생리적 수준'에 해당되는 사적인 문제로만 취급되는 것이야말로, 징후적인 현상이지요.
김남시님 말씀 내용,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겠어요.
독자 위치는 더더욱 없어져버렸고요. 독자로선 귀한 기회라서 배워갈 게 많다 생각하고 읽고있었는데 말이죠. 원래 특정 분야의 예술가가 비평을 안 읽는다고해요. 그린버그라고, 현대미술 비평가가 잭슨 폴록에게서 이런 사실을 들었죠. 잭슨 폴록은 비평가의 비평은 단 한줄도 안 읽었다고 말합니다. 김영하 작가에게 그가 예술가인 이상 이같은 예술가의 성질이 없을 리 없고, 그렇다면 조영일 비평가가 처음 자기 글에 반론을 제기했을 때 상당한 고민이 있었을 테고, 그에 응하게 되었을 때는 목적이 없지 않았을 것이거든요. 자기 주장만 하려했을 리가요. 기회가 아쉽네요.
독자로서, 또는 인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배우고, 생각할 많은 꺼리들을 던져주는 논쟁이었는데, 그것이 이렇게 귀결되어버려 저도 아쉽습니다. 오늘자 (2월16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김영하는 '한국 작가 가운데서는 거의 처음으로 1997년에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마련'했던 인물이면서도, 인터넷 공간의 소통을 견뎌낼만한 상응하는 감수성을 훈련시키지 못한 때문이겠지요.
지금 이곳에서 무슨 글을 쓸 것인지 또 어떻게 자신의 의견을 펼쳐나갈지를 선택하는 데는 수많은 우연성이 개입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듯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도 수많은 우연성의 축적을 통해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렇기에 문학을 위하여 아이를 포기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늘 그렇듯 말은 본심과 어긋나기 일쑤입니다. 김영하씨에게 있어 아이는 문학인 것입니다. 말인즉, 무엇을 무엇을 위하여 포기하였다는 판단은 삶의 우연성 앞에 영원히 오류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어떤 상황이 몰려오든 그 일체를 안고 밀고 나가면 되는 것일뿐, 자책과 회한은 자신의 멋진 삶에 큰 도움으로 작용하진 못하겠지요.
문학을 위하여 아이를 포기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이상과는 무관하게 오늘날 우리 주위에 문학/인문학을 위해 아이를 포기하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또한 '현실'입니다. 김영하는 그렇게 결심하고 실행하는 많은 현실적인 문학/인문학자들 중 하나일 뿐이고요. 저는 그 이유로 김영하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다만 문학/인문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일 뿐.
글쎄....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것,
그게 그렇게 중요한 함의를 지닌 것인줄 모르겠네요
표면적으로 그것은 참으로 중대한 선언(?)이자 고백 혹은 토로일 수 있지만
그런 언사를 지금 여기에서 옮기는 것은 조금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그들 사이의 논쟁에서 이런 이야기는 글쎄...뭔가 아구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
아이의 문제는, 말씀하셨듯, 김영하-조영일 논쟁의 중심은 당연,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 '와중에' 슬쩍 지나쳐간, 그것도 김영하에게서만 언급된, 사안에 불과했지요.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땅에서 작가/예술가의 삶, 생존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그들의 아이의 문제는, 어느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영하가 아이 이야기를 꺼낸 건, 제 생각에, 그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후 논쟁에서는 전혀 주제화되지는 못했지만 말이죠.
논쟁의 전반적 맥락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글만 보고 생각하기로는 김남시님은 규범적인 문학/예술/인문학을 이야기하고 김영하 씨는 지금의 현실에서의 그 것들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김영하 씨에게 그 것들의 이상의 실현보다는 김영하 씨 그 자신의 삶이 문제이고, 제 삼자들에겐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이상이나 규범을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러한 것의 실현, 삶을 살기는 힘들거나 불가능한 것이다. 인용된 글로만 보아서는 나도 김영하 씨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카프카나 스피노자나 누구나 글쓰기나 사유를 전문직업으로 가진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현 사회에서 글쓰기나 사유하기를 어디에, 어떻게 위치지우는가 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글을쓸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작가나 인문학자는 도대체 어떤 사회적 의의를 갖는 존재인지, 전업 작가나 전업 인문학자가 아니면서도 글을쓰고 사유할 수 있다면 도대체 그들은 왜 필요한 것인지 등의 질문말이지요. 카프카나 스피노자 처럼 글쓰기나 사유를 전문직업으로 갖지 않은 이들도 많지요. 하지만 이 땅에는 화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지만 전업 작가를 꿈꾸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규범적인 문학/예술/인문학이, 눈 앞의 구체적인 삶/생존 보다 더 중요할수도...
<문학을 위해 아이를 포기했다> 이와 똑같은 말은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가 오래 전에 한 적이 있는데요. 그는 정말 소설만 쓰기 위해 아이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비가 적게 드는 시골로 이사해 그곳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영하님의 경우 그렇게까지 경제적인 여유가 없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른 작가들에 비하여 부유(?)하다고 할 수 있지요. 비교적 이른 나이에 문단의 인정도 받고 책도 팔았고요. 그래서 그가 문학을 위해 아이를 포기했다는 발언은 현실적인 경제적 어려움과는 거리가 먼 발언이 아닌가 합니다. 문학을 위해 아이를 포기하다니요?
물론 하루키의 경우도 결혼할 때부터 아이를 갖지 않기도 했다고 하는데, 김영하와는 이유가 조금 다릅니다.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아서, 자신이 아버지 역할을 한다는 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고 합니다. 부인도 똑같이 부모와 사이가 안 좋았답니다. 즉 그는 무언가를 위해 포기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실 하루키 쪽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학문)을 위해 아기를 포기한다는 발상은, 기본적으로 아이를 <포기할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할 때 가능한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은 실은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더구나 그것이 <희생>이라뇨.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포기'함으로써, 무언가를 행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제가 기차를 타고서 소나무를 심었다고 말하는 기차역 광고에서 읽은 논리였습니다.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하는 것, 그것을 다른 무엇인가를 위한 적극적인 포기 혹은 희생이라고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김영하는, 위의 철도역 광고와도 유사한 사유를 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유는 어떤 사회적 영향을 낳을까요?
저는 생각의 중심이 무엇인가에 관심이 가네요. 지젝이 아이를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사유를 쏟아내는 것과, 김영하작가가 아이를 갖지 않고 이루려는 무언가가 많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왠지 저는 급속하게 보급되었던 인터넷과 아이폰 스마트폰과 같은 유희산업과 맞물려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어느 순간 우리는 고급문화를 저급하게 받아들여서 보게 되었고, 그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그 유행을 따르고 있습니다. 유행에 민감하면서도 자신의 감성을 유지하면서 한 작가가 자신의 개성을 지키면서 소설을 써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당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지점이라 생각됩니다. 김영하작가가 처한 입장과 조
영일 평론가의 입장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고, 아무래도 생각이 많고 작품으로 보여줘야 하는 작가의 입장이 훨씬 수세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는 늘 자신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존재이니까요. 거기에 마루야마 겐지나 하루키나 지젝의 예를 들어 김영하 작가의 어떤 발언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부당함을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김영하 작가가 포즈로 그랬든 정말 자신이 없어서 그랬든 글을 잘 써보겠다는 똥폼으로 그랬든 거기엔 일정정도의 그의 진실성이 있었을테고, 그 나름의 타당한 근거가 있었을 것이고, 저는 그 지점에 가슴아픈 동의를 하는 사람으로서 쉽게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없네요. 소설가가 어떤 발언으로 비평의 중
심으로 밀려오기보다 그의 작품으로 밀려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말 소조님의 말처럼 이제 그를 그만 건드리는 것이 좋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조님께서 논쟁을 마무리한다고 해놓고 계속해서 글을 올리는 것을 보니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소조님께선 아직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던가 봅니다.
그러면 아이를 가지고 나서 포기해야 하나요? 그럼 아이를 고아원에 버려야 한다는 겁니까? 충분히 미래적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경제적 어려움만이 포기의 원인이라고 보지는 않는데, 아이를 가짐으로써 가지게 될 여러가지 생활 차원의 정신적 부담도 포함되지 않을까요?
저도 개인적으로 아이를 희생하면서까지 문학에 목 매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가지는 것과 문학을 하는 것은 좀 별개의 차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생활의 차원과 생각의 차원은 섞여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오히려 저는 아이를 가지게 되면 더욱더 문학적으로 성숙?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