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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논평 ** 화요논평 (2011년 2월 16일) 소조-김영하 논쟁을 보고 든 생각 두 가닥
김남시 추천 0 조회 1,011 11.02.16 01:07 댓글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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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2.16 08:53

    첫댓글 사실 전 두 사람의 논쟁글을 읽던 와중에 이번 일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주장 모두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고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
    더랬지요. 이번 논란에서 제가 가장 강렬하게 느낀 것은 표현에 대한 자구적
    해석 부분이었습니다. 소설가가 '영악하게 살아남자'고 말할 때, 우리는 혹은
    저는 그 배면에 숨겨진 반어적 여백을 읽습니다. 모처럼 물꼬가 트인 논쟁이
    중단되었지만 나중에라도 시간을 내어 마저 읽을 생각입니다.

  • 작성자 11.02.16 17:13

    ^^; .....

  • 11.02.16 05:45

    참 쓸쓸한, 씁씁한, 이야기 입니다. 그 작가를 모르지만 참으로 팍팍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동물"이 쓰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지?, 참으로 막막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다가 우리가 여기까지 왔나 알 수 없는, 알 수 있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작가는 "희생"이란 말을 어디에 써야하는 말인지를 좀처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의 행위가 전혀 그것과 상관없는, 아니 그것과 정 반대의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 11.02.16 17:12

    aurore님! 어떤 맥락에서 '그 작가'를 '동물'이라고까지 부르시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가 오늘날 한국에서 아이 갖기를 포기하고 있는 많은,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 처럼 행동했기 때문인가요? 아내나 부모에게 생활과 양육을 맡겨야 하는, 아이를 가진 이 땅의 문학/인문학자들보다는, 그의 선택은 더 문학과 인문학의 본령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 11.02.17 07:59

    그가 쉽게 말하는 희생이 저는 동물적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즉 내가 갖을 수 있는 먹을 수 있는 것을, 어떤 좋은 것을 누군가를 위해 나를 희생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아이에게 부어야 할 시간과 노력과 돈을 희생하기를 거부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이를 갖기를 포기하는 많은 부부들이 있습니다. 다만 그들 둘만의 시간을 더 오래 가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이것을 희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를 위한 한 선택, 더 좋은 삶을 위한 이기적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문학의 빈약함을 빌어서 그것이 하나의 희생이 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 11.02.17 08:05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무엇을 위한 나의 희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래 길게 살아남기 위해 시간을 주어야할, 아무 조건 없이, 전혀 상호적이지 않은 줌을 줘야하는 귀찮은 존재를 포기한 것일 뿐입니다. 오래 길게 살아남기 위해,,,이 말은 더 이으면 오래 길게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말로 저는 들립니다. 여기에는 어떤 나의 희생도 없다는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 작성자 11.02.18 12:13

    "오래 길게 살아남기 위해" '시간을 주어야 할, 아무 조건없이, 전혀 상호적이지 않은 줌을 줘야하는 귀찮은 존재를 포기'하는 것. 그것이 '자기를 위한 이기적 선택'이 아니라 '문학'과 '예술'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입장도 있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들어 에피쿠르스의 다음의 말을 저는 그렇게 이해합니다. "영혼을 몰아치는 사유를 방해하는 가족 생활의 괴로움. 결혼한 사람은 그의 “사적인 의무”를 돌보아야 한다. 그는 솥을 불 위에 올려놓아야 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리고 가야하며, 장인에게 손을 내밀고, 부인에게는 옷과 기름, 침대와 물통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그 집안의 일들이 그를 장악하고 있다면, 그는 인류

  • 작성자 11.02.18 12:15

    전체를 포괄하는 과제를 맡을만한 여유가 없을 것이다. 철학자로서 그가 인류 전체와 관계 맺는다는 사실에서부터 자신의 사적인 관계에 대한 포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에게 가족이 없는 이유는 인류가 그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이가 없는 이유는 어떤 점에서는 그가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들을 산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 작성자 11.02.18 12:32

    에피쿠르스에게 '아이'는 인류 전체의 문제를 돌보아야 할 철학자를 '사적인 의무'에로 묶어두는, 그러한 점에서 인류 전체에 대한 무책임함입니다. 그 철학자는 인류를 위해 '오래 길게 살아남아'야 마땅할테니, 사적인 의무에 그를 구속시키는 아이는 어울리지 않겠지요. 인류 전체를 아이로 갖기 위해 개인의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이 당당함에 비교해보면 오늘날 문학/인문학자들에게 아이의 문제는 다만 사적인 결단의 문제로만 환원되어 버렸습니다. 문학/철학/인문학이 '인류전체'의 문제와 관련된 활동이라는 보편성의 요구는 진작에 붕괴되었고, 아이는 단지 한 가족의 사적 용무로만 축소되어버린 조건 속에서만, 바로 그 조건 속에서

  • 작성자 11.02.18 12:39

    오늘날 작가/인문학자에게 '아이'의 문제가 다가오고 있기에, 우리는 '오래 길게 살아남아 문학/인문학을 하기위해' 아이를 갖지 않는다는 사람을 '도덕적'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문제가 '참 쓸쓸하고 씁씁한' 이유는 저에게는, 오늘날의 문학/예술/인문학이 처한 이러한 조건에서 생겨납니다.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작가/인문학자에 대한 이러한 종류의 도덕화하는 시선도, 또 아이를 키우면서 - 아니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서 - 힘겹게 문학/인문학을하는 사람들에 대한 씁쓸한 시선도 모두 이 동일한 조건의 소산물이지 않을까요? 김영하라는 개인 작가를 '동물적'이라고 비난하기 보다 그렇게 동물적으로 보이는

  • 작성자 11.02.18 12:42

    선택을 하면서 자신을 위로해야 하는, 작가/인문학자들이 처해있는 조건과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제가 보기에 더 생산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 11.02.18 18:08

    김남시님의 위의 글의 논조를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님의 오래된 표현을 빌면 "오죽 했으면" 소위 인문학을 하는 작가가, 삶의 중심에서 삶을 말해야 하는 작가가 하나의 삶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 삶을 포기할 수 있는가? 따라서 그를 비난하고 판단하기에 앞서서 하나의 삶을 위해 다른 삶을 포기하는 이런 상황을 만든 사회적 조건, 우리의 지난한 현실을 반성하는 것이 더 유용하지 않은가? 이러한 논지 안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인문학을 하는 자가 사회의 단순한 희생자인지 아니면 그 자신이 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하는 주체인지의 문제입니다. 님은 전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경우 그가 계속해서 희생자의 자리에서

  • 11.02.18 18:29

    그를 희생자로 만든 이 자본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서 자신을 변명한다면, 우리의 조건은 솜털하나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울한 변명만을 그것에 대한 반복을 대대로 물려줄 것입니다. 순종과 저항에서 어디에 작가가 서야하는지는 작가의 선택일 것입니다. 저는 다만 그 선택이 어떤 위로를 지지를 받을 만한 것이 전혀아니라, 오래살아남기위한 자기이기적 진술일 뿐이라는 것을,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을 따른 것일뿐이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원환의 논리를 벗어나는 길은 그를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연쇄를 끊는 것이 님의 언어를 빌리면 더 "생산적인 "담론"이 아닌지 묻을 수 있을 겁니다.

  • 11.02.18 18:58

    그리고 앞서서 말한 두 삶, 한 삶을 위해 삶을 포기하는 이 모순에 직면해야하는 것은 바로 인문학을 하는 인문학자 자신일 것입니다. 문학과 예술(삶)을 "위해" 삶을 포기하는 그런 문학과 예술로서의 삶은 이미 죽은 삶일 것입니다. 이런 죽음의 논리 앞에서 저는 쓸쓸하고 씁씁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삶은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닐 겁니다. 거짓된 대의 속에서 상실되는 삶을 우리는 많은 곳에서 봅니다. 위의 작가도 그 예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오죽하면"의 논리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논리로 넘어가는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삶의 분리를 중단하는 것일 겁니다.

  • 작성자 11.02.22 19:33

    네, aurore 님의 말씀에는, 김영하-소조 논쟁에서 등장한 쟁점이 한발 더 나아간 차원에서 반영되어 있는 듯 합니다. 현재의 사회적 조건 하에서 개인이 행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패배주의적으로 포기하면서, 구조와 사회의 '탓' 혹은 '비판'을 행하는 입장과,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그러니까 삶을 살아가려는 입장... 나 자신은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을까 많이 생각하게 합니다. 고맙습니다.

  • 11.02.16 06:55

    조영일 비평가와 김영하 소설가의 논쟁이 소설가 쪽에서 나온 석연치 않은 사과발표로 무산되어 독자의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를 잃어버렸어요. 작가가 예술을 위하여 아이를 포기해야했다는 예술가의 짠한 사정을 어떻게 수용해야할지 저는 모르겠더군요. 생리에 가까운 문제를 사리를 따져봐야 할 글에서 언급하는 일이 사건에 어떤 도움을 야기할 거라고 그분은 생각하신 걸까요. 저도 그걸 읽을 때 놀랐어요. 논쟁 당사자가 말 붙이기 어려워할 팩트이고 그래서 그것은 논쟁 당사자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더 진지하게 말할 수 없게 만들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 작성자 11.02.16 17:02

    오늘날 작가/예술가의 삶의 문제가 주제가 된다면 '예술을 위하여 아이를 포기했다'는 고백은, 저는 '사리를 따져봐야 할 글'에는 어울리지 않는 '생리에 가까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작가/예술가의 실존적 현실을 이야기할때 '반드시' 함께 이야기해야 할 주제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오히려 그런 논쟁에서 '아이'의 문제, 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가 괄호쳐지고, 이야기되지 않고, 거의 '생리적 수준'에 해당되는 사적인 문제로만 취급되는 것이야말로, 징후적인 현상이지요.

  • 11.02.24 04:52

    김남시님 말씀 내용,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겠어요.

  • 11.02.16 07:15

    독자 위치는 더더욱 없어져버렸고요. 독자로선 귀한 기회라서 배워갈 게 많다 생각하고 읽고있었는데 말이죠. 원래 특정 분야의 예술가가 비평을 안 읽는다고해요. 그린버그라고, 현대미술 비평가가 잭슨 폴록에게서 이런 사실을 들었죠. 잭슨 폴록은 비평가의 비평은 단 한줄도 안 읽었다고 말합니다. 김영하 작가에게 그가 예술가인 이상 이같은 예술가의 성질이 없을 리 없고, 그렇다면 조영일 비평가가 처음 자기 글에 반론을 제기했을 때 상당한 고민이 있었을 테고, 그에 응하게 되었을 때는 목적이 없지 않았을 것이거든요. 자기 주장만 하려했을 리가요. 기회가 아쉽네요.

  • 작성자 11.02.16 17:06

    독자로서, 또는 인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배우고, 생각할 많은 꺼리들을 던져주는 논쟁이었는데, 그것이 이렇게 귀결되어버려 저도 아쉽습니다. 오늘자 (2월16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김영하는 '한국 작가 가운데서는 거의 처음으로 1997년에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마련'했던 인물이면서도, 인터넷 공간의 소통을 견뎌낼만한 상응하는 감수성을 훈련시키지 못한 때문이겠지요.

  • 11.02.16 15:35

    지금 이곳에서 무슨 글을 쓸 것인지 또 어떻게 자신의 의견을 펼쳐나갈지를 선택하는 데는 수많은 우연성이 개입하기 마련입니다. 그렇듯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도 수많은 우연성의 축적을 통해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렇기에 문학을 위하여 아이를 포기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늘 그렇듯 말은 본심과 어긋나기 일쑤입니다. 김영하씨에게 있어 아이는 문학인 것입니다. 말인즉, 무엇을 무엇을 위하여 포기하였다는 판단은 삶의 우연성 앞에 영원히 오류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어떤 상황이 몰려오든 그 일체를 안고 밀고 나가면 되는 것일뿐, 자책과 회한은 자신의 멋진 삶에 큰 도움으로 작용하진 못하겠지요.

  • 작성자 11.02.16 16:57

    문학을 위하여 아이를 포기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이상과는 무관하게 오늘날 우리 주위에 문학/인문학을 위해 아이를 포기하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또한 '현실'입니다. 김영하는 그렇게 결심하고 실행하는 많은 현실적인 문학/인문학자들 중 하나일 뿐이고요. 저는 그 이유로 김영하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다만 문학/인문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일 뿐.

  • 11.02.17 00:33

    글쎄....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것,

    그게 그렇게 중요한 함의를 지닌 것인줄 모르겠네요

    표면적으로 그것은 참으로 중대한 선언(?)이자 고백 혹은 토로일 수 있지만

    그런 언사를 지금 여기에서 옮기는 것은 조금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그들 사이의 논쟁에서 이런 이야기는 글쎄...뭔가 아구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

  • 작성자 11.02.18 12:46

    아이의 문제는, 말씀하셨듯, 김영하-조영일 논쟁의 중심은 당연,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 '와중에' 슬쩍 지나쳐간, 그것도 김영하에게서만 언급된, 사안에 불과했지요.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땅에서 작가/예술가의 삶, 생존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그들의 아이의 문제는, 어느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영하가 아이 이야기를 꺼낸 건, 제 생각에, 그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후 논쟁에서는 전혀 주제화되지는 못했지만 말이죠.

  • 11.02.17 13:42

    논쟁의 전반적 맥락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글만 보고 생각하기로는 김남시님은 규범적인 문학/예술/인문학을 이야기하고 김영하 씨는 지금의 현실에서의 그 것들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김영하 씨에게 그 것들의 이상의 실현보다는 김영하 씨 그 자신의 삶이 문제이고, 제 삼자들에겐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이상이나 규범을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러한 것의 실현, 삶을 살기는 힘들거나 불가능한 것이다. 인용된 글로만 보아서는 나도 김영하 씨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카프카나 스피노자나 누구나 글쓰기나 사유를 전문직업으로 가진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 작성자 11.02.18 12:57

    이 문제는 현 사회에서 글쓰기나 사유하기를 어디에, 어떻게 위치지우는가 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글을쓸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작가나 인문학자는 도대체 어떤 사회적 의의를 갖는 존재인지, 전업 작가나 전업 인문학자가 아니면서도 글을쓰고 사유할 수 있다면 도대체 그들은 왜 필요한 것인지 등의 질문말이지요. 카프카나 스피노자 처럼 글쓰기나 사유를 전문직업으로 갖지 않은 이들도 많지요. 하지만 이 땅에는 화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지만 전업 작가를 꿈꾸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규범적인 문학/예술/인문학이, 눈 앞의 구체적인 삶/생존 보다 더 중요할수도...

  • 11.02.19 02:38

    <문학을 위해 아이를 포기했다> 이와 똑같은 말은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가 오래 전에 한 적이 있는데요. 그는 정말 소설만 쓰기 위해 아이를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비가 적게 드는 시골로 이사해 그곳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영하님의 경우 그렇게까지 경제적인 여유가 없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른 작가들에 비하여 부유(?)하다고 할 수 있지요. 비교적 이른 나이에 문단의 인정도 받고 책도 팔았고요. 그래서 그가 문학을 위해 아이를 포기했다는 발언은 현실적인 경제적 어려움과는 거리가 먼 발언이 아닌가 합니다. 문학을 위해 아이를 포기하다니요?

  • 11.02.19 02:49

    물론 하루키의 경우도 결혼할 때부터 아이를 갖지 않기도 했다고 하는데, 김영하와는 이유가 조금 다릅니다. 그는 아버지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아서, 자신이 아버지 역할을 한다는 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고 합니다. 부인도 똑같이 부모와 사이가 안 좋았답니다. 즉 그는 무언가를 위해 포기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실 하루키 쪽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학문)을 위해 아기를 포기한다는 발상은, 기본적으로 아이를 <포기할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할 때 가능한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은 실은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더구나 그것이 <희생>이라뇨.

  • 작성자 11.02.22 19:29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포기'함으로써, 무언가를 행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제가 기차를 타고서 소나무를 심었다고 말하는 기차역 광고에서 읽은 논리였습니다.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하는 것, 그것을 다른 무엇인가를 위한 적극적인 포기 혹은 희생이라고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김영하는, 위의 철도역 광고와도 유사한 사유를 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유는 어떤 사회적 영향을 낳을까요?

  • 11.02.23 09:31

    저는 생각의 중심이 무엇인가에 관심이 가네요. 지젝이 아이를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사유를 쏟아내는 것과, 김영하작가가 아이를 갖지 않고 이루려는 무언가가 많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것이 왠지 저는 급속하게 보급되었던 인터넷과 아이폰 스마트폰과 같은 유희산업과 맞물려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어느 순간 우리는 고급문화를 저급하게 받아들여서 보게 되었고, 그 어떤 나라보다 빠르게 그 유행을 따르고 있습니다. 유행에 민감하면서도 자신의 감성을 유지하면서 한 작가가 자신의 개성을 지키면서 소설을 써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당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지점이라 생각됩니다. 김영하작가가 처한 입장과 조

  • 11.02.23 09:37

    영일 평론가의 입장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고, 아무래도 생각이 많고 작품으로 보여줘야 하는 작가의 입장이 훨씬 수세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는 늘 자신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존재이니까요. 거기에 마루야마 겐지나 하루키나 지젝의 예를 들어 김영하 작가의 어떤 발언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부당함을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김영하 작가가 포즈로 그랬든 정말 자신이 없어서 그랬든 글을 잘 써보겠다는 똥폼으로 그랬든 거기엔 일정정도의 그의 진실성이 있었을테고, 그 나름의 타당한 근거가 있었을 것이고, 저는 그 지점에 가슴아픈 동의를 하는 사람으로서 쉽게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없네요. 소설가가 어떤 발언으로 비평의 중

  • 11.02.23 09:40

    심으로 밀려오기보다 그의 작품으로 밀려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말 소조님의 말처럼 이제 그를 그만 건드리는 것이 좋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조님께서 논쟁을 마무리한다고 해놓고 계속해서 글을 올리는 것을 보니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소조님께선 아직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던가 봅니다.

  • 11.03.10 21:01

    그러면 아이를 가지고 나서 포기해야 하나요? 그럼 아이를 고아원에 버려야 한다는 겁니까? 충분히 미래적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경제적 어려움만이 포기의 원인이라고 보지는 않는데, 아이를 가짐으로써 가지게 될 여러가지 생활 차원의 정신적 부담도 포함되지 않을까요?

  • 11.03.10 21:04

    저도 개인적으로 아이를 희생하면서까지 문학에 목 매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가지는 것과 문학을 하는 것은 좀 별개의 차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생활의 차원과 생각의 차원은 섞여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오히려 저는 아이를 가지게 되면 더욱더 문학적으로 성숙?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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