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읽고 곧바로 놀랍다고 생각한 것이 있다. 그 놀라움은 이 소설을 루치노 비스콘티의 영화로도 본 사람들이 미소년 안데르센의 미모에 매혹되곤 한다는 흥미롭지 못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놀랍다고 본 것은, 유럽의 바로 그 예술가인 아센바하가 미 그 자체와의 조우를 통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아센바하는 미소년을 "미 자체"로 보며 이는 정확하다.
이 사실이 놀라운 것은 우리가 예술가를 미를 다루는 사람이라고 본다고 해서 예술가를 부당하게 다루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를 다루는 것이 본업인 어떤 사람이 바로 그 미와의 조우를 통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소설의 설정이 놀라우며, 더 정확하게는 추문적이다. 여기서 토마스 만은 정확히 예술가의 타락을 겨냥하고 있으며,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
나는 근래에 아름다움과 사랑을 다루는 문헌들에 집중하고 있다. 가령 나는 플라톤의 <향연>이나 <파이드로스>, 라캉의 <세미나 7> 등에 집중하고 있다. 내가 이러한 문헌들에 집중하는 것은 청년기의 삶의 원동력을 새롭게 발굴하기 위해서다. 나는 최근에 그 원동력이 전쟁보다는 사랑과 아름다움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울고 있다. 그런데 사랑과 아름다움의 문제를 플라톤이나 라캉보다 더 근본적으로 과감하게 파고든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는 않다. 사실 라캉 이전에, 플라톤의 방식으로 에로스를 다루고 있는 것이 자신임을 주장한 것은 다름아닌 프로이트다.
아센바하의 운명이 보여주는 사실은 오늘날 아름다움과 직면하는 것이 손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서 동시에 진정한 사랑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움은 치명적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아름다움에는 어떤 정교한 심층구조가 있다고 보아야 하며, 그것을 다루어야 하는 예술가들은 이점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예술 운동의 전제조건이다.
아름다움에는 본질적으로 광채가 귀속된다는 점을 여기에 첨가하자.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와 라캉의 <세미나 7>은 모두가 아름다움을 광채에 연결시킨다. 가령 플라톤은 이데아계 직접 체험과 관련해서 "거기서 본 아름다움은 보기에 찬란한 빛을 가진 것이었지"라고 말한다. 다른 이데아들과는 달리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광채를 발하며 이로 인해 아름다움은 그것만의 독특한 윤리적 기능을 갖게 된다. 라캉 역시 안티고네의 아름다움과 관련해서 광채에 주목한다. 사실 <안티고네>에 대한 주해를 시작하는 <세미나 7> 19장 제목은, 라캉의 제자이며 세미나 편집자인 자크-알랭 밀레가 붙인 제목은 “안티고네의 광채”다. 그것은 그 여주인공의 아름다움이 발하는 광채다.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세미나 7>에 대한 지젝의 독해는 전적으로 요점을 놓치고 있다.) 라캉은 그 광채를 "아름다움에 대해서 가치 있는 말을 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의 정의에서 결코 빠뜨리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에 대해서 가치 있는 말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분명 플라톤이 포함되며, 플라톤은 광채를 정의의 수준에서 아름다움에 귀속시켰다.
빛은 우리를 이끌어주기도 하고 우리 눈을 멀게도 한다. 어떤 특정한 빛을 다루는 일이 흥미로우면서도 유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얼마전 나는 우리를 이끌지 못하는 좌우명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알튀세르는 그것을 정확히 우리를 현혹시키는 빛이라고 보았다.
알튀세르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맑스의 테제들이 어떤 특정한 빛을 발한다고 생각했다. 그 테제들은 1845년의 맑스가―즉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제 막 청년기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성숙기에 진입하지 못한 단절기의 맑스가―비망록에 적어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들은 오래도록 청년기를 강렬하게 고무해왔을 테제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강렬한 빛을 발하는 마지막 11번 테제만을 생각해보자.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테제가 청년기를 고무할 때 우리는 그것을―청년기가 생을 지탱하는 한에서―생의 추동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알튀세르는 이 테제가 어떤 빛을 발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빛을 특정하게는 섬광으로 보았다. "그것들의 짧은 섬광들은 그것들에 접근하는 모든 철학자를 빛으로 강타하지만, 섬광이란 환하게 하기 보다는 눈부시게 하는 것이며, 밤의 공간 속에서 그 공간을 깨뜨리는 빛의 눈부심보다 더 위치시키기 어려운 것은 없다. 이 허위적으로 투명한 열한 개 테제들의 수수께끼를 언젠가는 밝혀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알튀세르는 맑스의 테제를 분명 현혹적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하지만 아직 그 현혹의 정체를 확인하고 있지는 않다.
첫댓글 빛으로서의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생각하면서 저는 어떤 종류의 파토스가 아닌 그 아름다움이 과연 무엇인지 상상 할 수가 없군요. 언급하신 토마스 만의 소설과 영화를 보았고, 그 당시 그러한 아름다움을 상상했던 적이 있었던거 같은데 말이죠. 아름다움이라고 하면 그저 어떤 선물의 포장지만 연상되는군요.
근대에 아름다움의 개념이 타락한 것은 사실입니다. 에스테틱은 오늘날 성형외과나 피부과 같은 곳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과 정신분석의 전통을 참조하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타락하지 않은 미 개념이 살아 남아 있습니다.
비스콘티의 영화는 1971년에 나왔네요. 이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토마스 만 자신은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부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런 갑작스러운 상기로 인해 얼마 전 비스콘티의 라이프워크였던(그러나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연잖게 문제의 시나리오도 입수했고요. 음음...
영화를 보면 결국은 그가 영화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본 것은 언뜻 잘한 일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에는 소설과 영화가 그렇게도 다른 것일까, 라는 의혹이 자꾸만 일어서요.... 그건 그렇고 비스콘티의 취향 같은 것이 있는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