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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 윤동주, 「참회록」
1942년 1월,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합니다.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가 윤동주의 새 이름이 되었습니다. 일본 유학을 위해 배를 타려면 부득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창씨개명을 하기 직전에, 쓴 시가 ‘참회록’이었습니다.
창씨개명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부끄런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중에도 순정한 결기가 살아있습니다.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겠다 합니다. 운석은 먼 우주에서 지구별에 떨어진 돌덩어리지요.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하는 것을 윤동주는 운석 밑으로 걸어가는 것이라 표현했지 싶습니다. 그 운석 밑으로 걸어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다는 겁니다. 윤동주의 일본 유학은 운석 밑으로 걸어가는 것 같은 위험한 행보였던 거지요.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도 창씨개명을 했습니다.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단1:7) 다니엘은 ‘하나님은 재판관이다’, 하나냐는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신다’, 미사엘은 ‘누가, 무엇이 하나님이신가?’ 아사랴는 ‘여호와께서 도우신다’는 뜻이어서, 각 이름마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이 녹아있었건만, 개명된 이름에는 ‘아코’와 ‘나부스’라는 수메르의 신 이름이 담겨있습니다.
창씨개명 하였지만,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는 원래 자기 이름대로 삽니다. ‘금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진다는 느부갓네살의 어명이 내려졌음에도 불복종합니다. 윤동주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도 ‘운석 밑으로 홀로 걸거가’듯 위험한 길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드락이 아니라 하나냐이기 때문입니다. 메삭이 아니라 미사엘이기 때문입니다. 아벳느고가 아니라 아사랴이기 때문입니다. 환관장 따위가 지어준 이름이 내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의 왕을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하지 말라”(렘42:11)
내 이름을 바꿀만한 권세가 있는 왕이 명령하여도, 공부를 하기 위해 부득이 이름을 바꿀 수밖에 없다 해도, 사람은 뜻 없이 무릎 꿇지 않습니다.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는 바벨론 왕을 겁내지 않습니다.
바벨론 왕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십니다. 우뚝한 마르둑이 통치하는 게 아니라, 무너진 성전처럼 폐허가 된 사람들 속에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진실을 알기에 사람은 독재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현실 너머 진실이 있기에 사람은 자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현실보다 더 강한 진실이 흐르기에 사람은 시대의 조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아 불복종한 대가를 치러 위험에 빠진다 해도, 진실한 사람은 위험을 감수합니다.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야 하는 위험한 상황이 닥치는 때에 하나님께서 참으로 진실한 사람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혹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 아닌 것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형상 새겨진 사람은 느부갓네살 따위에게 비굴하지 않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사람으로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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