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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버슴새
*악마적 버슴새 김용배
버슴새는 가락의 신명이 극도에 도달했을때에 연주자가 지닌모습으로 선인(善人)의 모습을 갖기도 하고
악인(惡人)의 모습을 갖기도 한다.
김용배는 악마적버슴새에 속한다.
김용배는 꽹과리를 두드리고 소리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고통스럽고 흉악한 형태로 드러냈다.
김용배에게 있어서 꽹과리는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괴로운것이었고,번뇌의 뿌리를 벗어나야 할 것이었다.
그 괴로움을 소리로써 극복해야 하겠기에 터무니없고 영문모를 자기와의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던 셈이다.
김용배가 꽹과리를 치고있는 모습을 묘사한 글이다.
"숨 쉴 겨를없이 몰아가는 장단속에서도 자신의 타법자세가 결코흐트러지지 않을 뿐만아니라,
더욱 격렬하고 빨라질수록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해지며 가라앉아 차분해지는 모습이 감명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이 흥미로운점은
고요한 그의 태도와 몸짓 가운데서도 얼굴은 사뭇 일그러지고,이글이글 잉걸불이 타듯 벌겋게 상기된 모습에서
그 어떠한 사람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섬뜻할 정도의 신기와 광기를 읽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진중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꽹과리에서 두드려져 나는 소리를 공교로울 정도로 섬세할 뿐만 아니라,
격렬하게 두드려져 바셔져 나 올수록 차근하게 담어져 간추려진 울음을 내는 것이었다.
김용배의 태도가 고틍스럽게 이지러질수록 꽹과리 소리는 더욱 청명하고 맑은 속삭임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선인적 버슴새 김덕수
버슴새는 가락의 신명이 극도에 도달되었을때에 연주자가 지닌 모습으로 선인의 모습을 갖기도 하고 악인의 모습을 갖기도 한다
김덕수는 선인적 버슴새에 속한다.
김덕수는 장고에 있어서 만큼은 하늘이 낸 재인이다.어떠한 가락을 연주하든 자신이 스스로 몰입하는 경지에 이르곤 한다.
아무리 느린 가락을 치더라도 자신의 긴호흡으로 가락을 쥐고 있고,
아무리 빠른 가락을 연주하더라도 자신의 차분한 호흡은 점차로 편안한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버슴새가 김덕수는 보살에 가깝다.
안으로 부터 용출하는 결렬한 힘을 자주 어루만져 부드러운 소리로 변화시키는 그의 가락은 갈수록 진가를 더한다.
김덕수가 꽹과리를 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글이다.
"선천적으로 안정된 버슴새를 갖고 있는 김덕수의 장고소리는,
하늘로 치켜 올라가듯 품겨져 나오는 쇳소리를 하염없이 밀고 당기며 감싸안고 달아나면서
종국에는 장구소리로 부드럽게 쇳소리를 감싸안는다."
2.맞수 *김용배
(1)성장과정
1955년 충청남도 논산군에서 출생(한국전쟁으로 인해 호적에 뒤늦게 올린것으로 실제는 1952년생).
김용배가 일곱살무렵 집근처의 관음사란 절에 머물러있던 남사당패의 뜬쇠가
그의 집에와서 김용배를 남사당일원이 되기를 간청하여 남사당패에 들게됨.이곳에서 여러 쇳가락을 전수받음.
김용배의 가락 전수과정을 보면,
요즘처럼 특정 가락을 가르쳐 주는것이 아니라,
판제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스승이 치면 배우는이는 이를 온전히 쳐야한다.
못받아 칠경우 두드려 패기 일쑤이고 겹가락을 주어 못따라치면 얻어맞기 십상있었다.
이렇게 통째로 가락을 전수받은 김용배는 판제와 가름새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특정부분이 어떠한 명칭을 가지는지 몰라도 가락을 처음부터 다스려가며 신명나게 플어내게되면
단순한 가락만 외고 있는 이들과는 다른 풍성함과 살아있는 생명력의 가락을 숨쉬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수방식은 치는 가락의 토막을 모르고,명칭도 모르고 특정부문을 물었을때 무엇인지 모르는 일장일단이 있기도 하다.
이러한 김용배는 여러 소리를 사사받다가 '공간사랑'이라는 무대에서 김덕수,이광수.최종실등과 모여서 연습을 하게 된다.
1978년 충물굿의 내력이나 역사로 보아 잊을 수 없는 공연을 공간사랑에 올렸다.
처음올린 '웃다리픙물'을 시작으로'호남우도'가락을 발표하고 정식으로 四物놀이패를 결성한다.
*김덕수
김덕수는 1952년 대전에서 출생하였다.
김덕수는 남사당패의 뼈대를 지닌 가문의 후예이다.
따라서 어려서 부터 남사당패의 일에 참여했다.
풍물굿에 관한한 천동이었던 김덕수는 여러 명인들로부터 가락을 전수받고
전국 농악 경연대회에 불과 일곱살의 나이로 참여하게 된다.
이때에 함께 참여한 인물이 있었는데 후에 '공간사랑'에서 만나게된 김용배,이광수등이다.
이 대회에서 그는 뒤에 동료가 되었던 인물들을 제치고 대통령상을 차지한다.
이후 김덕수는 서울 국악 예술학교에 진학하여 실기 뿐만이 아니라 이론적인 교육도 배웠다.
1971년에 국악 예술학교를 졸업한 김덕수는 리틀엔젤스단에서 활약한다.
우리나라의 예술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예술집단인 이곳에서의 활동은 그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부유한 가정형편의 자제들로 구성된 이들은,
자신들은 고급예술을 한다고 생각하며 꽹과리나 장구를 두드리는 천한 아이들을 멸시하고 폄시했다.
그러나 정작 세계무대에 나가서는,서양인들이 자신의 음악이나 예술을 유사하게 흉내내는 이들보다,
장고나 상모를 돌리는 전통예술의 이들에게 박수와 환대를 보냈다.
김덕수가 동료로부터는 철저하게 냉대받으면서 외국인에게는 환대받는 기현상을 겪은 것이다.
이런 경험이 국내에서는 우리것의 소중함을 알리고 세계로는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사물놀이 결성을 알리게 되는 서곡이 된다.
이후 여러 활동 후 스물예닐곱의 젊은이들이었던 김용배,이광수,최종실등의 친구들을 만나 사물놀이를 결성하게 된다.
(2)음악적 갈등
* 김용배
김용배는 김덕수와 사물놀이 활동을 같이 하였으나 서로간의 경쟁,음악적견해 등으로 많은 갈등을 빚었다.
우선 김용배는 김덕수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이상하게도 김용배는 김덕수에게 재주나 기량이 그에 못지 않으면서도 뒤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전국농악 경연대회 개인부문에서도 항시 1등은 김덕수 2등은 김용배 순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또 음악적 견해 또한 크게 달랐었다.
김덕수나 김용배가 공히 전통적인 가락을 재창조 하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시세나 대중을 두고, 견해는 사뭇 달랐다.
김덕수는 대중에게 영입하는 곡을 연주하면서 전통적인 가락을 연주하자는 쪽이었다.김용배는 전통을 완벽하게 재창조하고 그다음 대중을 생각하자는 쪽이었다.
이와같은 여러 마찰에 의해 김용배는 1984년 1월에 국립국악원 수석상쇠로 자리를 옮겨 사물놀이패를 떠나게 된다.
사물놀이패가 구성된지 6년만의 일이었다.
*김덕수
어려서부터 남사당패로서 장고를 만지며 여러 기예자에게서 가락을 배운 천동이었던 김덕수이지만,
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전통적인 국악인들로 부터 다양한 국악이론과 실기를 사사받아
국악 이론에 대한 분위기를 익히고 터득한 김덕수는,
이런 이론과 실기의 습득을 통해 이후의 자신의 예술을 다지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이런 점에서 국악 이론에 대해 거의 무지하지만
소리를 듣고 그것을 자신의 음악세계로 승화시킨 재인인 김용배와는 사물놀이의 접근방법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김덕수는 "조상의 전통적 사물을 현대화하고 대중의 구미에 맞게 영합하는 곡을 연주하자"고 주장했고,
김용배는 "조상의 전통적 풍물 가락은 매우 소중한 것이므로 체계적으로 이를 찾고 정리하자.
그리고 나서 나중에 대중을 생각하자"고 주장했다.
이 두 주장 가운데 어느쪽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런 예술관의 차이와 함께 서로의 기술을 다투는데서도 갈등의 요점이 드러난다.
즉 "내 밑에 너를 두지,내 위에 결코 너를 둘 수 없다'는 기술다툼이 표면에 드러나 많은 갈등을 일으켰다.
(3)감탄
* 김용배
김덕수와의 갈등은 결국 둘을 갈라 놓았지만, 서로 연주하는 동안만큼은 상호간에 지려 하지 않아 보다 멋진 가락을 만들어 내었다.
둘의 공연을 지켜보았던 전문가에 의하면,
'김덕수와 김용배가 신들린 듯 장단을 몰아가게 되는 때에 서로가 지지 않으려고 피튀기는 싸움을 벌이는 것이 매번 공연마다 보였다.
선천적으로 안정된 버슴새를 갖고 있는 김덕수의 장고소리와
하늘로 치켜 올라가듯 품겨져 나오는 김용배의 쇳소리는 하염없이 밀고 당기며 감싸안고 달아나면서 운우풍뢰의 조화를 낳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종국에는 장구소리에 의해 부드럽게 쇳소리가 감싸안아 진다.'
김용배와 김덕수의 소리 다툼은 보는 사람을 숨 죽이게 하였고
그래서 마침내는 치열한 존재 증명에 관한 몸부림으로 귀결되곤 했다는 것이다.
* 김덕수
개성이 특출하고 각자의 개성이 만나는 초기 사물놀이 단원은 실제 생활에서 불협화음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불협화음이 사물놀이 음악자체를 훼손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진술은 적어도 초창기 사물놀이 구성원 사이에서는 참된 값어치를 지닌다.
서로 언짢아도 사물만 잡으면 그들의 신명이 어울려 개성이 강한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내기 때문에 청중들은 전율하곤 했다.
또한 사물놀이의 음악을 통해서 자신의 기와 존재를 증명하는 피 튀기는 싸움을 벌여 혼신의 힘을 다했으므로
사물놀이의 음색은 더욱 강력하고 자극적인 소리를 자아냈다.
일본의 세계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야마시타 요스케'가 이들의 '판굿'과 '앉음반'공연을 보고 묘사한 글이다.
"일어서서 춤을 추며 북을 두드릴때 그들의 몸은 분명히 땅에서 10센티미터나 떠올라 있다.
앉아서 두드리고 있을때도 잘 보면 책상다리를 한채 바닥에서 5센티터 쯤 떠있다.
커다랗고 검은 서양악기와 함께 의자에 앉아있는 나로서는 아직 그 흉내를 낼 수 없다.
다만, 만약 다음에 저 비밀의 통로가 열린다면 그때 한순간만이라도 그처럼 공중에 튀어오를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3.결별
(1)결별후
* 김용배
결별후 국립국악원 사물놀이 리더로 갔던 김용배는 점점 외면적 호사와는 다르게 고통스러워 졌다.
타고난 유랑기질에 공무원의 신분은 어울리지 않는 격식이었고,
더구나 김용배의 재기와 나머지 사람들의 재기가 너무나 현격한 차이를 보인것도 커다란 문제였다.
같은 맴버였던 박은하의 증언이 이를 잘 입증해 주는 것이다.
"...보통 연습 때도 잘 맞지 않는 듯 하면 아무 말없이 쉬자고 해요,
이렇다 저렇다 얘기라도 하면 좋겠는데...성격이려니 했고,또 연주실력차이가 엄연 했으니까요..."
김용배가 마포사물놀이를 떠난 것은 커다란 손실이었다.
자기자신의 본디 예술을 튼튼한 울따리로 떠받들여 주었기 때문이다.
겉가락만 함께한다고 해서 소리가 이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속가락에 깊이 배여있는 장단의 노른자위를 함께 굴려야 이른바 음악이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데에 김덕수,이광수,최종실은 아주 적격의 치배들이었고 잠시도 떨어질수 없었던 든든한 잽이였다.
이러한 터전을 버리고 새로이 패를 만들어서 소리를 내니 쇳소리야 제대로 나지만,
너무 높고 결렬해서 미처 나머지 악기가 뒤를 못대고 버그러지기 일쑤이다.
그러자니 예전의 터전을 마땅히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용배는 '국립국악원 생활이 양에 차지 않는다.
김덕수네 패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생전에 자주 언급하곤했다.
* 김덕수
김용배와 김덕수와의 여러갈등은 결국 김용배를 국립국악원 사물놀이 수석 상쇠의 자리로 옮기게 만들었다.
김덕수 사물놀이로 봐서는 김용배의 이적은 치명적 타격이었다.
게다가 많은 해외 공연을 앞둔 김덕수네 사물놀이로서는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된다.
김덕수는 김용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질 못해서 여러 경로를 통하거나 본인이 직접 김용배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김용배는 한사코 "절대로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김덕수는 국립극장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던 김용배를 찾아가서 두 번 만났는데, 김용배는 다시 합치기를 부정하였다.
무엇인가 서로 넘을 수 없는 깊은 부분이 있음을 실감한 것이다.
김덕수네 사물놀이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재결합을 기원한 것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들은 결별하고 말았다.
결별하고 1986년 이후부터 김덕수는 지속적인 작업을 꾸준하게 전개한다.
그 작업은 우리의 사물놀이를 전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김덕수패는 신식 남사당패여서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가서 이역만리의 타국에서 우리 소리를 꾸준히 전하였다.
그와 더불어서 세계적인 타악기 그룹과 만나 사물놀이의 음악을 함께 연주하는 기이한 일들을 하게 된다.
또한 세계의 저명한 타악기 그룹과 만나서 신명을 전하고 우리 소리의 우수성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시대의 남사당이자 세계적인 뮤지션 내지 아티스트로 대접 받기에 이르렀다.
(2)生과死
* 김용배
1986년 4월23일 새벽두시경에 남기수(김용배제자)를 찾아온 김용배는
'국립국악원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다'
'나의 예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기수 너 밖에 없다.'
'새로운 것 새로운 것을 자꾸만 요구하지만 우리 민속가락의 복원이 앞서야한다.'
'혼이 깃든 민속악을 콩나물대가리로 표현하려면 이론하는사람들이 먼저 실기를 익혀야 한다.'
'한가락에서 다음가락으로 넘어가려면 어느정도 시강이 걸려야 하는데
3분만에 혹은 5분만에 사물놀이를 끝내라는 주문은 역겹다.'등의 말을 하며 오전 10시까지 함께 있었다고 한다.
남기수를 떠나기전 김용배는 국립국악원에 전화를 걸어 '병가'를 신청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날 오후 다시 남기수 등을 만나 '술이 먹고 싶다'면서 무척 화가나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독한술을 안주나 잔도 없이 마시고 집으로 돌아 갔다.
4월24일 여러사람이 김용배의 집인 공무원 독신자 아파트에 갔으나 안에서 문이 안열리고
경비실서 비상열쇠를 허락하지 않으므로 남기수는 우편함에 '궁금하다.기수한테 연락해 달라'는 사연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 이후에는 심신이 피로해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그냥 지냈으나
너무 시일이 지체되고 여러 행사들의 진행위원들이 궁금해 하여 남기수는 아파트 경비실 비상열쇠를 가까스로 얻어내 들어갔다
그것은 1986년 5월1일 오후 였다.
문을 열자,악취가 심하게 났고,넥타이로 목을 매단 김용배가 심하게 부폐한채 맞은 편 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無'자만 열 다섯개가 주먹만한 크기에서 콩알만한 크기로 점차 작게 쓴 액자 한 폭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아파트 베란다에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꽹과리가 깨어져 있었다.
이 꽹과리는 신춘국악대전 지방공연 때 늘상 정성스럽게 광약으로 닦아두었던 것이었다.
*김덕수
김덕수는 남사당의 후예이다.
남사당은 예전에 조선팔도를 떠돌면서 재주와 기예를 팔았던 유랑 예인집단이다.
김덕수는 선조 남사당패의 자취를 고스란히 따르면서도 무대는 사뭇다르다.
조선팔도를 능가해서 세계곳곳을 샅샅이 다니고 있다.
우리의 소리가 전세계에 퍼지는 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단지 예전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소리를 농축시켜 문화 상품으로 만들어서 세계에 널리 두드려 알린다.
진실로 '우리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실천을 몸소 구현했다.
그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은 쾌거이니 더욱 기려도 무방하다.
김덕수는 이제 우리 소리와 문화를 후손에게 이어줄 사명감으로 충만해 있다.
우리소리를 짜임새 있게 전수해서 온전히 지키고 가꿀수 있도록 그 터전을 이룩하고자 한다.
사단법인 한울림을 결성해서 사물놀이의 보급,교육,세계화에 힘쓰고 있다.
김덕수는 언제나 새롭다.
전통적인 풍물놀이를 밑천삼아 이땅에 참답게 자리잡아야 할 사물놀이로 거듭나게 했던 점에서
그는 조상들이 이룩한 슬기를 정면에서 계승했다.
그래서 풍물놀이에 대한 뭇사람의 관심을 끌어 모은 장본인이 되었다.
김덕수는 미래를 보는 식견도 가지고 있다.
우리소리가 고식적인 전통에 매달려 있기를 단호히 거절한다.
때로는 재즈와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아프리카와 브라질의 토속 음악과 절묘하게 만나기도 한다.
파격적이면서도 대단히 창조적인 우리 소리의 가능성을 진맥하면서 미래의 심장박동으로 잇고자 한다.
그 외(外)
*김용배에 관한 기사자료
'신들린 사물놀이'리더 김용배는 왜 죽었나?' -'예술갈등'못이겨 숨진 34세의 모든 것-(주간조선 86.5.25)
...그의 죽음에 대해 경찰은 자살로 추정했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그러나 그의 아파트에는 평소 그가 애지중지 아끼던 꽹과리가 깨어진 채 베란다에서 발견됐다
.이 꽹과리는 김씨가 신춘국악대전 지방공연에서 쉴때마다 광약으로 정성스레 닦았던 것
.꽹과리의 파괴는 그의 죽음이 자살이란 추정을 짙게 풍긴다.
자살의 가능성에 대해 그를 아는 동료 국악인들은 국립국악원의 분위기를 우선 꼽았다.
"김씨는 움악이론에는 백지상태다. 한 마디가 어디서 끊어지고,한소절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소리를 듣고 그것을 자신의 음악세계로 승화시킨 재인이다.
이런 김씨에게 이론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직장은 화합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정악과 민속악의 차별도 한 원인이다.
국립국악원이 비좁은 것은 할 수 없지만 사물놀이팀의 연습실마저 없었다는 점은 문제였다.
무용단 연습실을 창고로 개조,그 한쪽에 커튼을 치고 연습을 한다든가,
지하실에 있는 4평남짓한 소극장 분장실을 사용했다는 점은 재고를 했어야 했다.
방음도 안된 협소한 장소에서 사물을 두드려 난청이 안된것이 놀랍다.
김용배는 특히 음색에 민감하다.
상쇠로서 4개의 소리가 '대화'를 이루게끔 이끌어야 하는데 그게 안될때 갈등이 많았을 것이다."...
아무튼 여러가지 복잡한 주변 사정이 그로 하여금 자살까지 생각하게 만든 것인지 모른다...
김씨가 죽은 날짜로 추정되는 4월 23일,김씨가 생전에 마지막 남긴 풍물가락이 레코드로 출반됐다.
85년 12말 경기도 벽제에 있는 지구레코드에서 국립국악원 사물놀이패들과 녹음한 것이다.
호남우도굿,웃다리풍물,영남농악 등 3곡 위입을 끝내고 이들은 힘이 빠져 모두 스튜디오 바닥에 쓰러져 헐떡거렸다고 한다.
혼신의 힘을 쏟아 제작한 것이다.
벽제화장터 부근에서 마지막 녹음을 하고,레코드가 나온 그날 김씨는 죽었다.우연의 일치 치고는 너무 묘하다.
*김용배를 기리며...
자네 먼저 갈라는가?
쨍거랑 맑은 소리 맑고도 맑은 소리 자네 먼저 갈라는가?
우리 모두 소리찾아 몸고생 마음고생 같이도 하였거늘
어찌 진정 자네 먼저 갈라는가?
쨍거랑,쨍거랑 맑고도 맑은 소리
그 소리 소리 찾아 만주도 밟아 보고
실크로드 거슬러가 선조님네 소리 한번 같이 찾아 보자더니
어허 자네 혼자 먼저 갈라는가?
마하무드라 노랠찾아 진정 먼저 갈라는가?
자네겪은 마음고생 어찌 우리 모르겠나?
그래 그러해도 홀로 앞서 갈라는가?
가슴에 심긴 소리 쨍거랑 맑은 소리
그대로 남겨두고 무심히도 갈라는가?
정히 가려거든 소리나마 심지말지
쨍거랑 맑은 소리 그마저도 가져가지
어허, 자네 홀로 그리 떠나는가?
그래 먼저 가게 쨍거랑 먼저 가게
맑고도 맑은 소리 뎅그라니 놓고 가게
이승에 못다한 연 저승이면 어떨라고
어허 두고가게 뎅그라니 두고 가게
이세상 흙탕 세상 그 안에 던져 지어
구르고 또 구르며 자네 할일 해왔는데
뎅그러니 놓고 간들 누구 어찌 붙잡을까?
그래 먼저 가게 휘휘 먼저 가게
쨍거랑 맑은 소리 소리따라 먼저 가게
-1986년 5월 -
고(故) 김용배를 기리며
四物놀이와 친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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