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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12 - 왕위 쟁탈 내란인 장미 전쟁을 끝낸 튜더 왕조의 헨리 7세!
"잔다르크" 로 인해 수세에 몰린 영국은 1453년에 보르도가 함락되면서 백년전쟁이 끝났으니
패배해 철수하면서 프랑스에 영지를 갖고있던 잉글랜드 영주들은 영지를 잃게 되었는데...
그들은 생존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잉글랜드 왕가의 두 가문 곁으로 모여들었으니 요크공은
헨리 6세 랭카스트 왕조에 대항해서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이들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장미 전쟁" 은 1455년 부터 1485년까지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에 벌어진 내전으로 1455년 요크공작 리처드가 랭커스터 왕조에 반기
를 들었으며 1461년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 4세가 즉위했고 1483년 리처드 3세
의 찬탈 이후 부터 1485년 튜더 가문의 헨리 7세가 즉위하기 까지의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튜더 왕조는 1485년에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인 튜더 가문의 헨리 튜더가 장미 전쟁을
끝내고 헨리 7세로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가 엘리자베스 1세 이후로는 직계 후손
이 없어 단절되었으며 뒤를 이은 스튜어트 왕조의 시조 제임스 1세가 모계로는 헨리
튜더의 피를 잇고 있는 탓에 현재 영국 왕실에 까지 튜더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튜더 가문은 웨일스의 귀족 가문이었으니 헨리 7세의 조부 오웬 튜더가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국왕
샤를 6세의 딸로 랭커스터 왕조의 헨리 5세의 왕비이자 헨리 6세의 어머니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재혼하면서 에드먼드 튜더가 태어났고 랭커스터 방계인 보퍼트 가문의 마거릿과 결혼해 헨리 튜더
를 낳았으니 헨리 7세인데 이부형 헨리 6세에게 형제임을 인정받아 리치먼드 백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무엇보다 헨리 7세가 왕위를 주장한 근거는 '넓게 보면 나도 플랜태저넷의 혈통이다' 였다지만
모계로 봐도 플랜태저넷과는 거리가 있는 상태라 헨리 7세는 요크 왕조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여 요크와 랭커스터간의 융합을 이뤘는데 이때는 플랜태저넷
의 혈통들이 서로 죽이는 동족 상잔을 벌이는 바람에 후손들이 모두 도륙된 상황이었습니다.
기존에 외국과 전쟁을 벌이는 경우 병력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는 귀족외에 후방에서 군수
물자를 지원하는 귀족이 있어서 전장에 나선 귀족이 전사해도 후방에 귀족들이
남아있고 돈이 많기 때문에 질 좋은 장비로 무장하고 있어 전사자는 적었으며 또
귀족이 포로로 잡히면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기 때문에 귀족의 생환률은 매우 높았습니다.
반면에 장미 전쟁 내란의 경우는 영국의 모든 귀족이 참전하는 싸움이다 보니 사상자 비율이
높았고 포로로 잡아 살려보내면 또 싸워야 하는 적수가 되기 때문에 포로로 잡지않고
죽이니 귀족의 생환률이 떨어졌으니 장미 전쟁이 종료되어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으로 즉위할 때 살아남은 귀족 가문은 전쟁전의 3할에 불과했습니다.
자연스레 세습직인 의원들도 숫자도 줄어 불과 29명 밖에 남지 않았으니 국정을 논의하기엔 너무 적은
수였고 왕권을 견제할수 있는 힘도 약해지게 되어 잉글랜드에서 왕의 권력이 아주 강력해지기
시작했으니... 장미전쟁 후에 헨리 7세는 잉글랜드에서 유일한 절대 왕정인 튜더 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귀족은 고등교육을 받아 사회운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고급인력이었기 때문에 귀족의
수 감소는 사회운영의 어려움으로 이어졌고 결국 사회를 운영할 인재 수를 메우기 위해 요먼,
젠트리와 같은 평민 출신의 실력자를 많이 등용하니 후일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바탕이
되고 영국의 왕가 역시 프랑스 혁명과 같은 대규모의 혁명을 피해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한편 이 전쟁은 랭커스터 가문 방계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에 랭커스터 공작(Duke of Lancaster)
이라는 칭호는 잉글랜드 국왕이 보유한 비공식 칭호중 하나로 랭커스터 공작령은 왕실 자산을
관리하는 기관처럼 되었고 국왕(여왕)을 랭커스터 공작이라고도 부르는 등 관례가 남아 있습니다.
헨리 7세의 이름은 제2대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인데, 섭정이었던 요크 공작 리처드가 어린 조카
에드워드 5세를 폐하고 리처드 3세가 되자, 리치먼드 백작이 궐기해 군대를 이끌고 2년 만에 반정
에 성공하고 요크 왕조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하면서 튜더 왕조를 개창합니다.
동족상잔으로 귀족들의 70%가 사라진 상태여서 잉글랜드 어느 역대 왕조보다 강력한 왕권
을 휘둘렀으니 잉글랜드는 아들 헨리 8세와 손녀 엘리자베스 1세 대에 제 1의 전성기
를 열고 대영 제국의 토대를 놓게되는데 당대에는 음험하고 인색한 성품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후대에는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고를 충실히 한 왕으로 재평가됩니다.
튜더는 요크 가문이 번성할때는 부각되지 않은채 프랑스를 떠돌며 살았으나 리처드 3세가 즉위해
조카 에드워드 5세를 살해하며 요크 가문이 분열되고 왕의 신망이 추락하면서 기회를 포착,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잉글랜드에 상륙한 뒤 리처드가 신망을 잃은 것을 이용해 망설이던
주요 대귀족들의 방관과 자기세력 규합을 이루어냈고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죽입니다.
튜더 가문의 헨리 7세는 정통성이 다소 떨어지긴 하지만 랭커스터 가문의 핏줄을 이어받았고
혼인을 통해 에드워드 4세의 딸과 결혼하여 요크 가문과 결합했으니 헨리 7세의 후계자인
헨리 8세는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핏줄을 모두 이은 셈이라서 정통성을 갖추게 됩니다.
헨리 7세 초기에는 혈통으로 정통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치세 내내 반란시도에 시달려야
했으니 요크가의 리처드 3세와 에드워드 4세의 조카인 링컨 백작 존 드라폴, 워릭
백작 에드워드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링컨 백작은 10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위협은 안되지만 힘으로 왕위를 차지한 헨리에게 잠재적인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즉위 후에 정통성을 강화하고 반대파인 요크 지지자들을 누그려뜨리고자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으며, 에드워드 5세를 죽여서 민심을 잃은
리처드 3세의 전철을 밟지 않기위해 워릭백작 에드워드는 죽이지 않고 런던탑에
감금했는데 결혼하고 다음 해에 적장자 아서가 태어나자..... 권력기반은 탄탄해 졌습니다.
요크 가문의 공주 사이에서 적장자가 태어나긴 했지만 헨리 7세는 10여년간 리처드
3세의 잔당들에게 시달리게 되는데 이들은 런던탑에 갇힌 워릭 백작을 가짜라
주장하고 램버트 심넬이라는 10살 소년을 허수아비로 만들어서 왕으로 선언합니다.
잔당들은 이후 리처드 3세의 누이 부르고뉴 공작의 미망인에게 자금을 지원받아
아일랜드에서 6천명의 병력을 구하고 2천명의 독일용병을 잉글랜드에 상륙
시키기까지 했으니 헨리 7세는 이 반란을 막기 위해 직접 런던탑에서 워릭백작
을 꺼내서 시민들에게 보여주며 인증(?) 까지 여러번 하는 헤프닝까지 벌였습니다.
어쨌든 당시의 잉글랜드는 내전으로 지쳐있는데다가 워릭 백작의 정체도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호응이 적었고 요크셔 부근 스토크에서 가볍게 격파하며 수괴(?) 램버트
심넬까지 사로 잡았는데 심넬은 가짜 워릭 백작임을 인증하기 위해 죽이지 않고
궁전의 부엌데기로 삼았다고하며 링컨 백작 존 드라폴은 전투중에 사망했습니다.
리처드 3세에게 형 에드워드 5세와 같이 살해당한 에드워드 4세의 차남 요크공이 살아있다며
퍼킨 워백이라는 야심가를 내세웠는데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반란의 규모는 더
컸으니 가짜 워릭백작을 지원한 부르고뉴 공작부인 뿐만아니라 잉글랜드가 시끄러울수록
좋아하는 스코틀랜드왕 제임스 4세와 프랑스왕 샤를 8세의 지원까지 같이 받아냈기 때문입니다.
가짜 요크 공작의 무리는 세차례에 걸쳐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는데 모두
격퇴당했지만 가짜 요크공은 도주하여 아일랜드를 거쳐서 스코틀랜드로
도망쳐서 제임스 4세의 보호를 받으면서 호시탐탐 헨리 7세의 영국 왕위를 탐냈습니다.
1497년 콘월에서 가혹한 징세에 항의하는 농민반란이 일어났는데 불만을 가진 귀족들까지 합세해
1만 5천의 반란군이 런던으로 진격했으나 진압당하는데 그 와중에 가짜 요크공 워벡은 이를 기회
로 여겨 4,000명의 병력을 콘월에 상륙시키고 스스로를 리처드 4세로 선포하지만 소식이 늦게
갔는지 이미 오합지졸 병력들이 진압당한지 세달이 넘어서였으니 워백은 사로잡혀서 처형당합니다.
이후로 소소한 음모들은 있었어도 직접적인 무력 반란은 잦아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헨리 7세
는 귀족과 군대를 통솔하며 통치력을 인정받았고 반대파들에겐 가혹한 진압 보다는 관대한
회유책을 쓰면서 귀족들에게 환심을 샀으니 덕분에 얼마 못 갈 것 같던 왕위는 탄탄해 졌습니다.
헨리 7세는 무력으로 왕관을 얻고, 즉위후 10여년간 반란에 시달렸지만 군인이라기 보단 장사꾼
기질이 농후했으니 아들 헨리 8세와 대비되게 극도로 절약을 했으며 재정문제를 최우선으로
생각할 정도였다는데, 당시 잉글랜드에서 프랑스 보르도 지방 포도주 수입을 하는 선박을
잉글랜드 국적 선박으로만 강제하는 항해조례를 발표해 장사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재정도 확보하고 민심도 얻는 꿩먹고 알먹고 계책이라 "항해조례" 는 잉글랜드의 기본적
인 입장이 되었으니 이렇게 해서 상인들에게 환심을 샀기에 신하들은 의회에서
통치의 기반이 되는 턴세와 파운드세를 치세 내내 국왕이 마음대로 걷을수
있도록 보장해주기 이르니 이는 스튜어트 왕조 시대까지 국왕의 주 수입원이 됩니다.
하지만 헨리 7세는 워낙 인색한 사람인지라 에드워드 4세의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
하고서도 돈이 아까워 대관식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요크 지지자들의 엄청난 반발을
샀으니 결국엔 대관식을 치뤘으며 또한 장남 아서와 약혼한 아라곤의 캐서린은
장남이 죽고서도 20만 크라운이나 되는 지참금을 반환하기 싫어 과부를 잡아 두었습니다.
나중엔 캐서린을 차남인 헨리와 결혼시키려고 사돈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에게 지참금을 새로
요구했지만 주지않는 바람에 결혼을 미루며 캐서린을 가난하게 살 정도로 푸대접했는데.....
그래도 나중에는 페르난도 2세로 부터 지참금을 받게되어 차남 헨리는 형수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장남 아서가 죽은지 2년이 지났는데도 죽은 장남의 기사 서임세를 백성들에게서
거두기도 하고 과거 사문화된 선박세를 해군 재건 명목으로 부활시켰으며... 의회
에서 가결한 전쟁을 위해 거둔 세금을 그냥 자기 주머니에 넣어버리는 강심장을 보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법학자들을 동원하여 연구를 거듭(?)해서 이미 없어진지 오래된 여러
봉건의무를 세금으로 발굴(?) 하고 징세관들을 임명하여 강제적으로 과세하자 귀족들
과 백성들로 부터 해도해도 너무한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는데, 이런 행위는 오랜
내전으로 재정여력이 없던 잉글랜드 왕실을 지탱하게 했고 후임자들이 잘 쓰게 됩니다?
사실 헨리 7세의 재정은 장미전쟁으로 플랜태저넷 혈통 대귀족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랭커스터
영지를 차지했고, 전쟁 중에 요크 가문 영지도 몰수한데다가....... 그 밑의 귀족들도 전쟁에서
죽거나 헨리 7세에게 추방, 몰수되면서 왕실 토지가 엄청나게 늘어났기에 풍족했다고 여겨집니다.
1501년에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한 장남 아서는 이듬해에 죽고, 1503년에는 왕비인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8번째 아이 캐서린을 낳다가 아이와 같이 죽는 악재가 겹치자 이후 새장가
를 가고 싶어했으나 지참금만 밝히는 결혼이었기 때문에 나폴리 왕비에겐 퇴짜 맞았고
죽은 맏아들의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의 언니 카스티야의 후아나에게 청혼해 웃기기도 합니다.
카스티야(스페인) 에서는 후아나는 심각한 정신병으로 이미 유폐된 상태였고, 근친혼이
잦은 당시에도 아버지와 아들이 동서지간이 되는 결혼에, 신랑(헨리 7세) 이 지참금
액수만 밝히는지라 거부하는데.... 이때 우울증에 걸렸는지 궁정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골방에 틀어박혀 유일한 "취미생활(돈 세기?)" 에만 몰두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1509년 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하는데 말년까지 세금 징수를 잘해서 헨리 7세에게 총애받은 두 신하
들인 에드먼드 더들리와 리처드 엠프슨은 역으로 백성들에게 증오를 받았으니 이 두사람은 헨리
7세가 죽자마자 민심 안정과 정의 구현을 구실로... 아들 헨리 8세에 의해 처형되니 토사구팽이라?
종교적으로는 헨리 8세가 가톨릭-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 청교도의 삼자 구도가 되면서
피곤한 시기였고 경제적으로는 젠트리와 요크 세력이 성장하면서 상업이 발달하여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네덜란드와 스페인 세력을 물리쳐
해상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니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대영제국이 시작됩니다.
문화적으로는 토마스 모어, 존 던 등 지금도 영국에서 손꼽히는 문학가들이 활동했으며, 무엇보다도
영문학계의 아버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이 시기 사람이니 활발하고 진취적인 분위기의 튜더
왕조의 문화는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탄(Elizabethan)' 문화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영국 역사에서 '드라마틱한 시기'로 꼽히니 헨리 8세는 막강한 왕권을 제멋대로 휘둘렀으나 복잡한
사생활과 결혼을 6번이나 한 덕에 대중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고있고 오늘날까지도 대중매체의
인기 소재로 자주 다뤄지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경우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왕 중 한 명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왕이 의회를 권력으로 찍어누른 시대였으니 장미 전쟁은 오랫
동안 권세를 누린 귀족간의 내전이었으니 전쟁후 귀족이 줄어 왕권은 강해졌으니 헨리 7세
부터 엘리자베스 여왕까지의 권력은 튜더왕조 이전에도 이후에도 꿈도 못꿀 정도로 막강했습니다.
헨리7세와 헨리8세 그리고 엘리자베스여왕 시대에는 의회는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이렇게 강력했던 절대왕권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된 후인 제임스 1세
시대의 중기 부터였으며 그리고 완전히 사라진 건 의회에게 완벽하게 패한 찰스 1세 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