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기능 개념에 대한 아래 글을 읽어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능론: 목적론과 인과론」
http://cafe.daum.net/Psychoanalyse/NSiD/400
Schwartz는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해 기능론적 주장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Marx says that religion is “the sigh
of the oppressed creature, the feeling of a heartless world, and the soul of
soulless circumstances” (Marx and Engels 1975-,
vol. 3, 175); that is, it arises from the situation of subordinate groups and
not from ruling class intentions. Then
he adds the functional claim, “It is the opium of the
people” (ibid.). (「Functional Explanation and Metaphysical
Individualism」, Justin Schwartz, http://www.jstor.org/pss/188355,
http://theacro.com/zbxe/413065)
해당 구절을 좀 길게 인용해 보자.
게다가 종교는, 자기 자신을 아직 획득하지 못했거나 혹은 이미 자기 자신을 다시 상실해 버린 인간의 자기 의식이고 자기 감정이다. 그러나 인간, 그는 결코 세계 바깥에 웅크리고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 그는 인간의 세계이며 국가이며
세간世間이다. 이 국가, 이 세간은 전도된 세계이므로 종교, 즉
전도된 세계 의식을 생산한다. 종교는
이 세계의 일반 이론이요, 이 세계의 백과 사전적 개요이며, 통속적
형태로 된 이 세계의 논리학이요, 이 세계의 유심론의 명예가 걸린 문제Point-d’honneur이며, 이 세계의 열광이요, 이 세계의 도덕적 재가載可이며, 이 세계의 장엄한 보충이요, 이 세계의 일반적 위안 근거이자 정당화
근거이다. 종교는, 인간적 본질이 아무런 진정한 현실성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인간적 본질의 환상적 현실화인 것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그 정신적 향료가 종교인 저 세계에 대한 투쟁이다.
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칼 마르크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1~2쪽, 김세균 감수, 박종철
출판사)
말장난에 심취해서 도무지 종잡기 어렵게 쓴 이 글에서 마르크스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현실의 삶에서 낙을
찾기 어려우니까 종교(자신을 지지해주는 든든한 신, 내세의
지복)에서 낙을 찾게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리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문장을 덧붙였다. 일종의 쾌락을 주는 아편에 중독된 사람이 무기력해지듯이 종교라는 쾌락 또는 거짓 희망에 빠진 사람이 현실에서
지배 계급에 저항하지 않고 안주하게 된다고 이 문장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계급 체제의 유지에 도움이
된다. 요컨대 종교는 현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된다.
마르크스가 “종교의 기능은 현 체제 유지다”라는 명제를 암시했다는
것이 Schwartz의 해석인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서 인용한 구절만 보아서는 마르크스가 기능론적 주장을 펼쳤다고 보기 힘들다. 마르크스는 종교의 효과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가난한
사람에게 현실이 힘드니까 종교를 믿게 된다는 식으로 종교의 번성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것은 아편의
한 측면 즉 쾌락을 주는 측면에 대한 이야기다. 아편의 다른 측면 즉 무기력하게 만드는 효과 때문에
종교가 번성한다고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 같지는 않다.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해 한 말을 몽땅 추적해 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해 기능론적 주장을 펼쳤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구절만 보고 기능론이라고 이야기하는 Schwartz의
말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그리고 현실의 불행 때문에 종교를 더 믿게 된다는 마르크스의 이야기도 잘 입증된 이론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이 명제를 잘 입증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종교가 번성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온갖 가설들도 가능하다.
첫째, 인간의 마음 이론 모듈(Theory
of Mind Module, ToMM)이 행위자(agent)를 과도하게 탐지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신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쉽다.
둘째,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사람들을 속인다.
셋째, 일단 종교가 대세가 되면 그냥 관성 때문에 계속 유지된다.
넷째, 편두통의 일종, 트랜스
상태(유최면 상태), 망상증 등이 종교를 부추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종교를 열심히 믿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도
실증적으로 검증해야 할 문제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종교를 더 열심히 믿지만 다른 문화권에서는
오히려 부자가 종교를 더 열심히 믿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사 가난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더 종교적이라는 것이 실증적으로 확인했다 하더라도 그 원인이 가난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통계학 교과서에서 늘 강조하듯이 상관 관계가 곧 인과 관계인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종교적인 이유는 단지 그들이 지능이 낮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종교가 주로 위안을 준다는 주장도 의심스럽다. 때에 따라서 종교는
엄청난 공포를 줄 수도 있다. 특히 중세 시대에 그랬던 것 같다. 천국의
약속에는 지옥의 형벌이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의 신은 사랑하는 신이기도 하지만 질투하는 신이기도
하다.
인간이 위안을 준다고 무작정 믿도록 설계되었을 것 같지도 않다. 예컨대
자식이 실종되었을 때 “자식은 아주 안전하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믿게 되면 위안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부모는 자식을 찾아 헤매지 않고 집에서 늘어지게 낮잠이나 잘 가능성이 크다.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제대로 번식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