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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6b 울산강의-창세기47장
(강의:이근호 목사)
창세기 45장 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애굽 전체가 어디 속해 있느냐? 요셉이 받고 있는 계시 안에 다 포함돼있습니다. 여기서 만약에 요셉이 ‘내가 애굽의 주가 되신다’는 이 말은 애굽에서 앞으로 일어나는 상황, 애굽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 약속에 의해서 주의 위치, 임무, 역할, 하는 일, 은혜 이런 것들이 무엇인가를 애굽 전체에서 요셉이 있는 동안에 벌어지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 안에 ‘주’라는 분이 도대체 어떤 위치에 있으며, 하는 일은 무엇이며, 뭘 어떻게 한다 말인가가 여기에 나오게 돼있어요.
그게 창세기 47장 14절부터 끝까지 돼있습니다. 이 내용이 길기 때문에 간단히 줄이면 이렇습니다. 여기에 ‘주’가 누구냐 하면, 요셉이 주가 됩니다. 주가 뭐 하느냐? 모든 소유가 주가 되는 이쪽 영역에 다 소속이 돼버려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20절,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 전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드리니” 바로라는 위치가 바로는 그냥 가만있으면 돼요. 주가 되는 요셉이 애굽 땅 전체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마지막 때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모든 걸 바칠 때”라고 나오죠.
‘주’가 된다는 말은 이 땅에서의 모든 하나님의 계시대로 말씀대로 성취해서 그 성취된 공로와 업적에 의해서 전 세계를 하나님 소유로 전환시키는 그러한 일에 종사하시는 분이 ‘주’다 이 말이죠. 하나님하고 주가 다르죠. 하나님은 그냥 팔짱 끼고 계신 분이고, 주라는 분은 이 땅에 내려와서 부지런히 일하시는 분이고. 몽땅 다 누구 것으로?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것으로 삼아서 갖다 안기고 바치는 역할을 한 그분이 바로 우리 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이런 말씀 나오죠.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아버지 뜻을 행하려 함이라 아버지 뜻은 이것이니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 살리는 그것이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제가 한 십 몇 년 전에 대구 서문교회라고, 대구에서 제일 유서 깊고 합동측에서 최고 본산이라 할 수 있는 큰 교회 가서 설교를 했어요. 하필 전도 집회를 하는데서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이미 전도는 주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전도 이런 것 때문에 걱정하시지 마세요.’ 이렇게 설교했어요. 목회자가 전도 때문에 걱정한다는 자체가 믿음이 없는 겁니다. 교회가 되고, 안 되고, 교인이 왜 빠져 나가느냐, 왜 헌금이 안 나오느냐? 이것 쓸데없는 걱정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주 아닙니까. 주님은 부지런히 일해서 몽땅 전 세계, 우주를 아버지한테 바치는 분주하신 분이 계신데 우리가 왜 걱정합니까? 고넬료와 베드로 만나는 것도 주선을 누가 했느냐 하면 주님이 하셨어요. 주님이 고넬료에게 천사 보내고, 베드로에게 천사 보내서 둘이 만나서 복음 듣고, 고넬료가 세례 받고,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래서 오늘 제목이 [만남] 아닙니까. 불신앙의 세계라는 것이 그냥 ‘에이, 지옥 가거라’ 아닙니다. 불신앙의 세계 속에서 주님이 어떻게 그 가운데서도 ‘주가 되시는가’를 보라 이 말이죠. 봅시다. 보라 했으니까 봐야 될 것 아닙니까.
창세기 47장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계속해서 기근이 이어집니다. 13절에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식물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쇠약하니” 자, 굶어 죽게 되었을 때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누구한테 찾아옵니까? 소위 양식이 있다는 요셉한테 찾아오겠지요.
그게 바로 주님께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일이 이겁니다. 영생 복음은 누구한데 있다? 주님한테 있으니까 우리로 하여금 경제적인 파탄과 기근에 빠지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살 길은 누구밖에 없다? 주님밖에 없는 줄 알고 모이게 한다 이 말이죠. 이러한 신약시대의 주님의 역할을 애굽이라는 환경을 설정해서 무대를 만들어서 그 무대 안에서 하나님의 꿈을 받은 요셉이 주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47장 내용 나온다 말이죠.
우리는 성경 볼 때 ‘아이고, 더러운 세상. 지옥 가거라. 하나님 우리만 천당 보내주세요’ 이러는데 그게 아니에요. 우리가 지옥 같은 세상에 있어봐야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우리는 결코 이 땅에서 구원받는 것은 내 뜻이 아니고 우리 구원은 주님의 자기 숙제이지 우리 숙제 아니에요. 답답해도 주님이 답답하지 우리는 안 답답해요. 주님께서 우리를 데려가려고 하시는 거예요. 왜? 우리는 나가고 싶어도 나갈 방법이 없어요. 우리는 이 세상이 좋아. 못 살아도 저승보다도 이승이 좋다고. 습관적으로 익숙해졌으니까. 만사가 여기서 울고불고 하는 가운데서도 행복을 느끼니까 이 세상이 좋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삼층천을 봤잖아요. 사도 바울에게 이 세상은 같잖다. 이 뭐 좋아.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주여, 할 수만 있거든 저를 죽여서 제가 본 저 나라에 빨리 가게 하옵소서. 하지만 내가 있는 것은 너희를 위함이니.’ 똑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주님께서 기근으로 압박을 가해서 이 사람들이 양식 얻으러 온다 이 말이죠. 15절에 보니까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진한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가로되 돈이 진하였사오니 우리에게 식물을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진하다’는 말은 없는 거예요. 돈 없는데 양식 얻으려니까 뭐 해야 됩니까? 노예, 품꾼이 돼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오늘날 성도 아닙니까. ‘주여, 주님 앞에 양식 얻으려니까 돈이 없는데요?’ ‘그럼 내 종이 되어라.’ 그래서 우린 주의 종이 되는 겁니다.
이게 주라는 위치가 할 일이에요. 우리는 그런 일을 하시는 분을 인정하고 그냥 예수가 아니고, ‘주 예수’에요. 앞에 ‘주’자를 붙이잖아요. 앞에 ‘주’자를 붙였다는 이 말은, ‘나는 주님 없이는 항상 죽은 놈이다. 주님 아니면 항상 지금 지옥 갈 놈이다. 나는 주님의 공로 때문에 구원받지 내 힘으로 구원 못 받는다’ 이걸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 주를 주답게 제대로 이해한 사람입니다.
그걸 어떻게 느끼느냐? 그건 바로 애굽 같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이 얼마나 내 중심이며 내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나의 정복, 나의 탐욕 이런 것은 아침에 눈을 뜨면 내 욕심, 내 기대가 이것밖에 모르고 그리고 ‘아이고, 눈 감으면 하나님도 없어지지’ 이렇게 항상 내가 믿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없어지면 하나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나는 나다’라는 것 거기에 충실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렇다면 이제부터 네가 내 종이 되어라. 여기 18절에 보니까 우리에게는 몸과 전지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종자 줄게. 온 천지를 다 사서 20%는 바로가 먹고, 오분의 사는 농사짓는 사람들이 먹고. 이렇게 해서 임대차계약에 들어간 겁니다. 온 천지가 바로의 종이 된 거예요. 왜? 기근 때문에. 근데 기근은 누구에게서 났어요? 요셉이 받았던 꿈에 칠 년 풍년, 칠 년 흉년이 나왔다 이 말이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풍년 들 때 좀 저축해놓지. 하지만 사람이 풍년 되면 계속 풍년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펀드 보세요. 된다, 된다 하니까 다 되는 줄 알지요. 이런 날 있을 줄 몰랐지요. 1달러에 천 원 할 때 천오백 원 할 줄 알았으면 좀 사놓을 걸. 누가 알았어요. 세상만사가 내 중심이 아닙니다. 고맙게도. 복음 중심이고, 십자가 중심이고, 우리 주님 중심으로 돌아가요.
그래서 진짜 성도는 이런 어려울 때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 겁니다. 환란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협이나 칼이나 아무리 와도 주님의 사랑에서 안 끊어지게 돼있어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질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환난과 기근과 핍박을 주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정말 우리가 누구 세계 안에, 어떤 세계 안에 말씀이 춤추는 말씀이 요동하는 그 세계 안에 놓여있는 겁니다.
분명히 성경은 이 세상이 말씀으로 출렁이고 약속의 출렁이는데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는 우리 집에서 내가 돗대야. 내가 주관자고. 내 생각으로 출렁이고. 내 마음대로 거리에 나가면 내 차가 중심이야. 딴 놈은 나보다 늦게 가야 돼. 내 차가 완전히 카우보이라. 다 돌아다니면서. 전부다 내 중심이다.
얼마 전에 전국적으로 비가 왔거든요. 한 10미리 왔는가. 방송에 나오데요.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비 10미리 오는데 뭐가 무심해. 보니까 기근이 심한 태백시에 2미리 왔다는 거예요. 참 줘도 문제라. 왜 세상이 태백시 중심입니까? 거기 도박장있다고? 세상은 말씀 중심입니다. 그래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왔잖아요. 엘리야 시대 때. 뭐 때문에? 세상은 말씀 중심이라는 그걸 이루기 위해서.
애굽 나라에 주어진 모든 메뚜기와 파리재앙, 우박, 바로의 사람들은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아이고, 요새 날씨가 왜 이러지’ 이렇지요. 애굽 나라 사람들은 바로 왕은 내 나라가 왜 이 모양이야 하지만, 모세 입장에서는 원래 애굽이 네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 되심을 보여주기 위한 주님의 나라인데 바로 왕은 자기 나라인줄 알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자기 백성을 번성하기 위한 인큐베이터에요. 칠십 명 들어갔던 이스라엘을 번창케 하기 위해서 하나의 비닐하우스처럼 만들어놓은 게 애굽 나라 이 말입니다. 대구고 울산이고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이고.
여기 47장 27절에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하며 거기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며 번성하였더라” 거기서 야곱은 십칠 년을 더 삽니다. 그래서 백사십칠 세가 되는 겁니다. 하고 난 뒤에 드디어 자기가 생각하기에 죽을 날이 된 거예요. 치매가 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 뭐라 합니까?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여기에 환도뼈라 하는 것은, 이런 게 참 어려운데요. 울산강의 때 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이해 못해요. 인간이 있으면 인간에서 저주가 나오고 축복이 나옵니다. 그런데 인간에서 나오는 축복과 저주가 여기서 또 축복이 나오고 또 저주가 나와요. 그런데 인간이 생각하는 내가 생각하는 축복과 저주는 이쪽 검은 글자로 써있는 축복과 저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냐? 이 축복과 저주는 몰라요. 우리는 모르게 돼있습니다. 근데 나그네 인생을 살면서 깨닫게 하면서 이 저주가 저주가 아니고, 이 축복이 축복이 아닌 것을 아는 순간에 하나님이 따로 주신 축복과 따로 주신 저주가 있다는 걸 알아요. 그게 뭐냐 하면, 제가 아까 했지요. 하나님이 예비하신 성에, 더 나은 본향, 거기에 들어가면 축복이고, 거기에 못 들어가면 저주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누가 있습니까? 선배들이 있어요. 여기는 조상이라 돼있지만 선배가 누굽니까? 아버지 이삭, 할아버지 아브라함. 여기까지 이해되시죠. 그 다음에 어려운 게 뭐냐 하면, 그렇다면 야곱을 두고 두 개의 핏줄이 나와요. 이 두 개의 핏줄 이야기한 것이 마태복음 1장 족보입니다.
반드시 둘이 나와서 하나가 제거되죠. 하나가 배제된다니까. 여러분 ‘선택’이란 말은 그냥 선택이 등장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버림’이 없는 선택은 없어요. 반드시 에서를 버려야 야곱이 선택돼요. 우리 생각에는 ‘야곱, 너 올라와. 에서, 너는 모르겠다’ 이게 아니고 야곱과 에서를 생겨남과 반드시 버리는 쪽을 통해서 선택의 의미를 이야기해줘요.
그리고 그 버리는 쪽이 에서만 있는 게 아니고 야곱에게도 있어요.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버려야 될 것은 안 버리고 꼭 쥐고 있고,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버리는 그런 경향이 있거든요. 그건 우리의 일방적인 나의 선택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인간은 두 종류가 있어요. 육이 나오고, 영이 나오고. 둘 다 나와야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영만 나오는 게 아니고 다 나와요. 죄가 나오고 은혜가 나옵니다. 용서가 나오고. ‘아, 이건 죄구나. 이건 용서구나.’ 이게 둘 다 나와 줘야 성도입니다. 이걸 울산강의 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하여튼 인간 속에는 축복과 저주가 다 나와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주가 되셔서 예수님이 저주하시고, 예수님이 축복하시고. 이 이야기는 지난 주일날 낮 설교에 무화과나무 설교하면서 예수님인 축복하면 축복한 거고, 예수님이 저주하면 저주한 건데, 그 무화과나무 설교하면서 제일 은혜 받은 게 뭐냐 하면, 무화과나무가 ‘나무’란 점이에요.
나무라는 점에 왜 은혜 받았느냐 하면, 나무는 그 다음날 가도 그 자리에 서 있고, 그 다음날 가도 그 자리에 서 있잖아요. 우리가 나무가 아니라면 고양이나 사람 같으면 ‘아, 기분 나쁘다’ 하고 그 자리를 떠날 거잖아요. ‘나, 오늘 교회 안 나온다’ 이러면 되는데 무화과나무가 나무란 점에서 이거는 저주 안 받고 싶어도 그대로 다 받는 거예요. 그래서 무화과나무가 말라비틀어졌습니다.
인간은 나무다. 그걸 배웠어요. 인간은 주님 앞에 도망을 칠 수 없습니다. 도저히 주님에서 못 빠져나와요. 꼭 나무같이. 주님이 저주하면 저주받는 거예요. ‘제가 뭘 잘못됐습니까’ 묻지를 마라. 왜 저주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선택이 이유가 없어요. 선이나 악을 행해서 선택받은 게 아닙니다. 그냥 선택하면 선택하는 거고, 저주하면 저주받는 거예요. 그건 오야 마음대로에요. 그 일을 주님이 하셨다 이 말입니다.
야곱에게서 두 개가 나와요. 하나는 축복이 나오고 저주가 나온다. 분명히 야곱은 누구 은혜 때문에? 아들 요셉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에 대해서 약속을 하지 않고 야곱에게 약속한 거예요. 그러면 요셉이 받은 축복도 결국 야곱에게 나왔다는 걸 야곱이 알아요. 그래서 죽기 전에 축복과 저주를 이야기해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49장 봅시다. 야곱이 아들을 다 불러놓고, 거기에 요셉의 두 아들도 포함되죠. 첫 번째, 49장 4절. “물의 끊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르우벤이 물의 끊음 같이 한 것은 자기가 끊고 싶어서 끊은 겁니까, 속에서 끊으니 끊은 겁니까? 자기가 성질이 그런데 우에 합니까? 이 성격 어디서 나와요? 르우벤 누구 닮았어요? 자기 아비 닮았지요. 그 아비가 누굽니가? 야곱이죠.
그러니까 야곱이 축복과 저주를 하지만 축복과 저주의 양상은 어디에 소급된다? 야곱 본인에게 되돌아오죠. 야곱 안에 축복과 저주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야곱은 누구의 모델이 되느냐 하면,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예수를 안 믿으면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고, 예수를 사랑하면 복 받고. 이 온 우주에 영원한 운명의 축복과 저주는 누구한테 달렸다? ‘주님 되시는 예수님에게만 달렸다’를 미리 야곱은 보여줄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내가 잘하면 복 받는다는 말이 완전히 거짓말이죠. 내가 못하면 저주받는다는 완전히 거짓말이에요. 축복과 저주는 본인의 행함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한테 어떤 요소를 부여받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천국이고, 주님에게서 미움 받으면 지옥입니다. 참 이 이야기하려고 제가 신학을 수십 년 보낸 것 같아요 신학교 다닐 땐 몰랐어요. 저주 안 받으려고 교회 봉사 많이 했습니다. 성경을 보니까 그게 아닌 걸.
르우벤은 얼마나 불쌍한지 보세요. 물끊는 성질 누구한테 왔습니까? DNA가 누구 겁니까? 울산 강의할 때 [증식]이란 말 했지요. 야곱에게 뭐가 있다? 하나는 영적인 것이 있고, 육적이다. 야곱의 육적인 것이 저주로 이어지고, 야곱의 영적인 것은 축복으로 이어지고. 결국 축복, 저주는 누구 소관이고? 야곱의 소관이고. 야곱은 누구 소관이고? 이삭 소관이고. 이삭은 누구 소관이고? 아브라함 소관이고. 아브라함은 누구 소관이고? 멜기세덱 소관이고. 그 멜기세덱의 반열을 좇은 게 누굽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그래서 사랑이란 말이 헌금 드리고, 알랑방구 뀌고, 주여, 주여 한다고 사랑이 아니라 뭐가 사랑이냐 하면, ‘내 모든 운명은 내 팔자는 주님한테 달려 있습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주님께서 원하는 게 사랑이라. 네가 사랑을 아니까 형제를 위해서 목숨 바쳐도 마땅하니라. 까짓것 주님께서 바치라 하면 바쳐야지 우에 합니까?
그걸 나라는 걸 지워버리는 사랑, 주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나라는 운명은 나한테 안 달렸다는 사실을 믿는 것, 그게 주님의 사랑이고, 저주는 뭡니까? 바로 왕 아닙니까. 내 나라는 내 것, 내 팔자는 내 거야. 내 운명은 내 거야. 난 교회 올 때 나의 성취욕을 위해 왔어. 전부다 내 거야. 그렇게 되면 그게 바로 저주가 되는 겁니다.
복음이란 이렇습니다. 출발점을 주가 그리스도냐, 아니면 네가 주냐? 그 싸움이에요.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바로 이러한 바로 왕적인 애굽적인 요소가 가득해요. 육적인 것이 가득 야곱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이삭이 자기가 먹고 싶은, 탕수육 먹고 싶다고 탕수육 해달라는 게 말이 됩니까? 탕수육 해주면 복 줄게.
하나님께서 그런 자기 성깔 다 부리게 해놓고는 그걸 헷가닥하고 바꿔치잖아요. 그걸 야곱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불러놓고 복 줄 사람은 오른편에 종속된 사람은 이쪽에 두는데 자리 안 바꾸고 일부러 어긋맞게 하죠. 그리고 평생 백삼십 년 동안 거꾸로 배운 거예요.
그림 그려봅시다. 야곱의 맘속에 A라는 마음 있고, B라는 마음 있는데 하나님의 축복은 A인데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육적으로 이게 축복이다. 자기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이게 축복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 은혜는 밑바닥에 이렇게 들어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진짜 축복은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죄고, 죄가 밑에 들어가고 그 죄를 하나님 축복이 어떻게 한다? 요셉을 통해서 죽은 자, 아들을 통해서 용서해주고 은혜 주는 쪽이 이게 바로 축복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축복이란 말은 뭐냐? ‘나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죄인을 거꾸로 뒤집어서 구원받게 하시는 것은 주님의 약속된 말씀의 은혜입니다.’ 이걸 아는 것이 축복이라 말이죠. 그러니까 그걸 손자한테 이래서는 모르잖아요. ‘자리 바꿔.’ 이래서 이렇게 해줘야 아는 거예요. 이들이. 평생 내가 안 것은 이게 아니고 거꾸로 어긋맞게 사는 것, 역으로 사는 것.
예수님이 그렇게 살았잖아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은 위로 올라가려하는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위에서 밑으로 내려와서 구원으로 통하는 길이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에 밑바닥에 배출구에 하수구에 천국 문이 거기 있는 겁니다.
아까도 오면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요즘 막장 드라마가 유행이랍니다. 요즘 교회가 막 가요. 뭐냐 하면, 좁은 길로 가야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교인들을 목사가 넓은 길로 못 보내서 환장을 했어. 장로 기도도 넓은 길이고, 모든 교인들로 하여금 아예 전도사님 집 앞에 교회 이름이 ‘번성하는 교회’ 안 넓어서 환장했어. 좁은 길로 가려고 사람들이 마음부터 먹질 않아.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받아버려요. ‘주여, 주님 목회 못 합니다. 내가 내 식대로 해야 됩니다. 좁은 길로 해서 안 먹힙니다. 넓은 길로 해야 옵니다.’ 목사들이 넓은 길을 위하여 통성기도하고 철야하고 이럽니다. 좁은 길 찾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까 말씀대로 되는 거예요. “찾는 이가 적으니라”
결국 내가 보기에는 오늘날 교회가 막 가자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고 나발이고 예수고 하나님이고 치우자. 밥 먹고 살아야 되지. 좁은 길 성경에 있지 어느 놈 믿나? 안 믿는 걸 내가 왜 해.’ 바로 이러한 애굽적인 방식이 여전히 우리 속에도 나온다는 거예요. 그것도 매일같이. 그래서 제가 했잖아요. 매일같이 새로 시작해야 돼요.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선택’이란 것이 반드시 버려지는 자들을 봐라 이 말이죠. 나사로로 하여금 지옥 가는 부자를 보게 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천국 가 있죠. 벌건 불구덩이 속에 부자가 있죠. 쳐다보죠. 쳐다보는데 죽었을 때 쳐다보지 말고 같이 둘이 살아있을 때도 옆에 나란히 있을 때도 거지 나사로는 수직적으로 봤고, 부자는 거지를 자기보다 못한 인간으로 본 거예요. 근데 부자는 버림 받았고, 거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천국 이야기한 것은 천국 가서 이렇게 산다는 것도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이 땅에 모세의 글과 선지자의 글이 있는 이 세상에 있을 때 우리는 세상에서 내가 보는 것과 성경 안에 모세와 선지자 안에서는 세상을 반대로 뒤집어서 봐야 한다는 것을 나사로 이야기가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너희들은 그러지 말고, 사람에게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 미움 받는다는 것, 누가복음 16장에 나오잖아요. 뭐든지 반대로 생각할 줄 아는 그런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봐야 제대로 성경의 의미를 본다 이 말입니다. 반대고 거꾸로 뒤집어서.
개척 교회하는 목사님들 설교하면 반대로 볼 줄 모르고, 손님들이 원하는 대로 해요. 뭔가 성취하고 싶습니까? 기대한 것이 잘 안 이뤄지십니까? 처방을 내려요. 30일만 새벽기도 나오시면 이뤄질 것입니다. 이런 것. 아스피린 두 알 잡수시고. 이런 것처럼. 30분 후에 하루에 세 번 먹는 것 잊지 마세요. 꼭 이런 것처럼. 성경 두 장 보시고 새벽기도 하시면 됩니다. 처방전 내리면 되는 줄 알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교인들이 됩니까? 되지요. 점쟁이가 해석하는 게 아니고 점치러 온 사람, 자기가 해석 다 해버려요. ‘세 개 중에 한 개 맞았다.’ 우리가 성취하려는 게 뭐예요? 그 성취하려는 것은 이런 축복이 아닙니다. 그냥 이 세상에서 안 빠져나가려고, 나그네 안 되려고. 이생이 좋다는 식으로 눌러앉으려고 그렇게 시도하는 겁니다.
47장에서 봅시다. 그래서 요셉이 주가 되서 모든 것을 상납했죠.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이 성경이 나옵니까? 바로 말고 진짜 주님이 이런 상황을 맞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주의할 것은 딴 것은 다 바로의 땅이 되지만 제사장 땅은 빠졌지요. 이 상황이 에스겔 48장에 나옵니다.
에스겔 48장 13절, 14절. 거기에 보면 모든 땅이 하나님 땅인데 단 제사장 땅은 따로 구분돼있습니다. 마치 그걸 보여주는 것처럼 창세기 47장 여기에도 요셉이 행정을 하는데 제사장만큼은 바로의 땅이 아니고 나머지 땅은 바로의 땅이 되었습니다. 26절에 보면,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까지 이르니라” 제사장만은 따로 빼돌리죠.
이것은 바로 뭐냐 하면, 제사장의 땅이라 하는 것은 ‘도피성’이 돼요. 그러니까 세상에 땅이 있는데 이게 만약에 중간에 제사장 땅이 있다면 나머진 바로의 땅이 되지만 제사장이 하는 일이 신에게 제사하잖아요. 신의 땅이에요. 하나님 땅이죠. 그래서 하나님 땅과 나머지 세상의 땅과 차이성을 보게 되면, 여기에서는 법이 통하지만 여기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있는 곳이죠. 이거는 법에서 저촉된 죄인도 여기선 용서받는 특별한 신의 혜택을 입는 땅을 따로 집어넣었다 이 말이죠.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세상을 이런 식으로 다스리는 겁니다. 나중에 제사장은 누구냐? 바로 이스라엘이 제사장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이건 바로가 아무리 소유해도 이 땅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제사장이 차지한 구멍에서 나옵니다. 제사장 하는 일이 제사 드리는 것 아닙니까. 물론 여기는 이방신이죠. 여호와 아닙니다. 애굽의 제사장이기 때문에.
하지만 장차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 모델이 되기 때문에 여기는 사실 요셉이 주가 되는 거예요. 요셉이 이방나라를 가지고 장차 자기 하늘나라의 모델을 미리 앞당겨서 지금 행사하고 있는 겁니다. 이 제사장 되는 이것을 위하여 다른 땅이 존재하는 겁니다. 땅을 위해서 제사장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47장 넘어가고 48장 봅시다. 요셉의 부친이 병들어서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렀다. 그것 하기 전에 47장 마지막에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선영’이라 하는 것은 뭔가 선배들끼리 합류하는 미팅 장소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게 카페인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특징이 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특징이 뭐냐? 다 ‘산 자’가 돼요. 그 산 자라 할 때 목숨 길어지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부활의 하나님이에요. 부활의 나라에서는 아브라함도 살아있고, 이삭도 살아있고, 야곱도 살아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에 넣어주는 거예요. 이 땅에서 목숨이 연장되는 게 아니고, 부활이라는 영역에 들어갈 때 비로소 이걸 산 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땅 구십사는 게 산 자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열네 살 산 자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산 자라 할 때는 이 땅에서 벗어나서 부활의 세계에 가야 사는 거고 이 땅에선 그냥 죽은 자에요. 부활의 세계가 산 자기 때문에 이 땅에서는 우리는 죽은 자가 돼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죽었습니다’ 하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부활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래서 여기 막벨라 굴에 모이라 하는 선배들 갔던 그 길 따라 간다 이 말이에요. 그 길이 뭐냐? 바로 말씀, 하나님의 약속 그것이 주어지는 그걸 따라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마련한 새 성에 본향에 도착한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남은 게 뭐냐? 야곱이 갔던 그 나라에 어떻게 합류하느냐 그 문제 있잖아요. 합류할 때 어떻게 합류해야 됩니까? 누가 축복해야 돼요? 요셉이 축복해야 됩니까? 소용없습니다. 야곱이 축복해야 돼요. 왜냐하면 야곱은 누가 축복해야 됩니까? 이삭이 축복해야 되고, 이삭은 누가 축복해야 됩니까? 아브라함이 축복해야 돼요.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뭐가 나오기 때문에? 육도 있지만 영이 나오거든요.
오늘날 복음을 누가 전합니까? 성도가 전하죠. 성도가 메시아란 뜻 아닙니다. 성도 안에 누가 계셔서? 주님이 계셔서 성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잖아요. 믿음은 어디서 나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 하죠. 그 들음은 어디서 나오고? 하나님 말씀이 잉태하죠. 하나님이 말씀을 줘서 그 말씀을 외치면 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자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그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복음을 들어야 되고, 복음을 들으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들으리요. 보냄을 입지 아니하면 누가 전하리요. 목사님들에게 제일 애로사항이 있다면, 사모가 목사를 사람취급도 안한다는 사실. 우리 집에만 그런가. 왜? 돈을 못 버니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세요. 돈은 버는 것은 애굽에서 그냥 살기 위한 돈이지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못 나간 사람까지 빼내는 힘을 갖고 있잖아요. 그 얼마나 귀중한 사명입니까. 현재 저주스런 지옥 불에 집어넣는 그게 좋은 사명입니까, 거기서 빼내주는 게 중요한 사명입니까? 빼내주는 사명이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안 그래요?
그래서 집에 가끔 복음 전하려하면 ‘또 한다, 또 한다. 다 안다, 다 안다. 그건 당신 전공분야고. 내 전공분야는 따로 있는데 당신 전공분야는 당신 교인들에게 하고 나한테는 하지 마라. 난 내 전공 따로 있다.’ 근데 아내의 전공분야는 절대로 사람을 살리지 못해요. 목사의 전공분야, 복음이 사람 살립니다. 사모님 힘들죠. 정말 힘들 거예요. 그래서 사모의 소망은 뭐냐 하면, 복음도 전하고 돈도 많이 버는. 그런데 기근을 더 당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요새 교회마다 기근 심합니다.
그래서 축복을 해줘야 되는데 축복 없으면 안 되니까. 왜냐하면 축복을 해줘야 축복이 말씀이잖아요. 그 말씀이 요셉에게 주어진 능력처럼 그 말씀이 죽어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능력이 되셔서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아까 르우벤 이야기하면서 르우벤이 저주받았다 하잖아요. 사실은 저주가 아니죠. 뭐냐 하면, 너한테 그런 성질이 있어서 너는 남보다 못할 것이다. 이게 저주가 아니고 사실은 창세기 49장 앞에 보면, 야곱이 열두 아들 모두에게 축복했다. 그 축복 중에 뭐가 들어 있느냐? 너는 이러니까 남보다 밑져야 된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게 축복입니다.
참 어렵지요. 축복하면 우린 잘되는 게 축복인데 그게 아니고, ‘너는 네 주제파악해라.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성격을 더럽게 받았기 때문에 더럽게 살아야 돼.’ 이게 축복이에요. ‘아멘’ 하면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르우벤이 ‘미쳤나’ 이러면 르우벤이 저주받는 겁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멘’ 하면 구원받는데, ‘내가 왜 죄인입니까’라면 저주받는 거예요.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 보고 축복하지요.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몰라요. 13절에 보면,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우수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좌수를 향하게 하고 좌수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우수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둘째 아들, 첫째 아들을 어긋맞게 하니까 요셉이 보고 말렸지요. ‘아버지여 손의 자세가 잘못됐습니다.’ 그때 야곱이 하는 말이 눈이 어두운데 ‘나도 안다’ 해요.
15절에 봅시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옵소서” 그러니까 복이란 내용이 뭡니까? 야곱에게 주어진 그 상황이 되풀이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주신 축복,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에 이르게 하옵소서’라는 그 축복이 오늘날 새순교회 여러분에게 그대로 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 못한 것, 기대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것. 우리의 선택사항에서 빠져있으니까. 만날 우리는 선택해봐야 나를 위한 선택이잖아요. 저나 여러분이 걱정할 필요 없는 것이, 우리는 매일같이 나를 위한 선택을 해요. 애 공부는 이렇게 시키고, 집은 어느 아파트가 좋고, 어디 땅 사면 땅값 오르고. 맨 나를 위한 선택을 하는데 그대로 선택을 하게 하되 주시는 것은 십자가는 따로 알게 챙기는 것. 그것 아니다.
그러면 뭐가 아닙니까? 안 가르쳐줘요. 왜? 가르쳐주면 또 내 것 만들기 때문에. 우리가 예상 못한, 안 가르쳐주는 다른 것을 계속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내 것만 챙기면서 나그네 인생을 뺑뺑이 돌게 만들어요. 환난과 어려움을 당하며.
부자한테 물어보세요. ‘당신 우에 살았습니까?’ ‘참 어렵게 살았습니다.’ 어느 부자치고 어렵게 안 산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이건희 회장 딸 자살해 죽었잖아요. 정주영 회장 아들 자살했잖아요. 어느 가정치고 자식을 가슴에 묻는 그런 불행사가 흔히 있는 일이 아닌데 그렇게 죽었다 이 말이죠.
검사되면 좋을 줄 아는데 아침에 출근해 보세요. 직원들이 서류 이만큼 가져옵니다. 드라마에서나 검사되어서 뛰어다니고 애인 만나러 돌아다니고 에덴동산에서 그렇게 하지. 에덴동산이 아니라 동쪽에서 하는 거고. 실제로 검사들 보면 검사들 불쌍해서 못 보는 거예요. ‘너, 그래서 나보다 월급 얼마나 받나?’ 아침에 보면 서류가 이만큼 되서 그걸 처리 못해서 집에 갖고 가는 거예요. 집에 가면 마누라는 검사 남편 만났다고 동창한테 자랑하지요. 서류 들고 와서 집에서 애하고 이야기도 안 하고 안방에서 처리하는 것 보면 마누라가 기가 막힌 거예요. 너는 돈 벌어라, 난 골프나 칠게.
그래서 검사하다가 때가 되면 변호사 하잖아요. 월급은 적고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냥 외부에서 볼 땐 멋있지요. 어떤 직업이든 승진돼보세요. 그만큼 누적이 됩니다. 교감, 뭐 좋습니까? 안 좋아요. 평교사가 최고에요. 우리 최종훈 장로님이 이야기한 겁니다. 교장, 교감 그거는 월급 약간 더 많고 멋있어 보이지 평교사가 최고라. 내 배 째라 하면서.
여기 이근호 있으면 이 안에 나오느냐 하면, 그냥 육이 나와요. 그리고 모든 걸 나 좋아라고 해요. 그런데 여기에 또 뭐가 나오는가? 그걸 용서하시는 우리 주님의 용서가 또 나와요. 같이 나와요. 이게 죄가 나와 줘야 용서를 알게 아닙니까. 그럼 이 죄는 뭐냐? 뭐든지 날 위하여. 아침에 눈 뜨면 또 하나의 공상과 상상과 모든 기대를 총동원해서 ‘주님이여, 오늘은 이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해놓고 그건 내 육이고.
그래서 누구 좋으라고? 저 좋으라고요. 누구 좋으라고? 우리 가정 좋으라고. 전부다 내 중심. 우리 애가 멀리 갔는데 거기서 공부 일등하게 해주세요.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오늘 한국대표팀 야구하는데 대만 이기고, 일본 이기고 우승하게. 누구 좋으라고? 우리나라 좋으라고. 전부 자기밖에 몰라. 이게 평생 계속 돼요.
그런데 이거는 축복이 아니고 이거는 나그네 인생이고 이걸 용서해준다는 것. 이 용서 어디서 나오느냐? 나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주님이 창세전에 사랑받기로 된 자에게는 주님께서 내 대신 죽으심으로 용서가 주어질 때 우리는 내 죄도 증거하고(참 목사들 자기 자랑하면 안 돼요) 그 다음에 주님의 용서를 증거하면 이 둘이 합해서 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복음이 성립되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머리 위에 주께서 축복해주옵소서. 우리가 예상했던 것, 세상에서 기대했던 것 다 무시해주시고 그것이 죄인 줄 아오니 그 죄를 용서하는 축복을 해주옵소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고 사랑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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