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와 물은 결국 不一不二 관계” 제43칙 수산죽비(首山竹) 〈끝〉- 수산의 죽비
(가) 본칙(本則)
수산성념(首山省念) 큰스님이 대중들에게 죽비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대들이여, 만약 이것을 죽비라고 부르면 이름에 떨어지는 것이요, 죽비라고 하지 않아도 어긋나는 것이 된다. 그대들이여! 자아, 말해 보라.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것인가?”
(나) 평창(評唱) 및 송(頌)
죽비라고 불러도 저촉되는 것이 되고 죽비라고 부르지 않아도 어긋나는 것이 된다. 말을 할 수도 없고,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자아, 빨리 말하라! 빨리 말하라!
무문 스님이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다.
“죽비를 들어 올려, 죽고 살리는 영을 내리는구나. 자칫하면 어긋나고 저촉되니, 여기서는 부처도 조사도 목숨을 구걸할 판.”
파도는 물이 있음으로 가능하고 물은 파도로써 자기 모양 나타내
(다) 설명(說明)
본칙의 주제는 아주 흔하다. 비록 소재는 다르지만 유사한 공안이 많다는 말이다.
무문관의 40칙인 위산영우 스님의 정병을 차버린 이야기와 제44칙인 파초의 주장자 이야기는 그 맥락이 거의 같다.
여기서 문제는 촉(觸)과 배(背)이다. 촉은 저촉된다는 뜻으로 특질(特質)에 떨어지는 것을 말하며 배는 위배된다는 뜻으로 본질(本質)에 어긋남을 말한다. 즉, 이름에 떨어지지도 말고 용도에도 어긋나지 않으려면 그놈의 죽비를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가가 문제의 주안점이다.
특질과 본질의 논리로 예를 들자면 파도는 물이 있음으로 가능하고 물은 파도를 통하여 자기 모양을 나타낸다. 파도와 물은 결국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이다.
색즉공(色卽空)으로 설명하여도 그 원리는 비슷하다. 색(色)이란 현상 즉, 특질이고 공(空)이란 내용 즉, 본질인 점에서는 색(色), 공(空)은 표리일체(表裏一體)이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색을 떠난 공은 존재가치가 없으며 공을 떠난 색은 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점에서 색, 공은 언제나 보완의 인연 속에 있어야 한다.
어느 하나로 기울어지면 한쪽만이라도 건질 것 같으나 사실 둘 다 잃어버린다. 그저 피상적으로 보면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일뿐이다. 즉, 현상은 현상이고 본질은 본질이다. 그러나 지혜의 안목으로 보면 색, 공은 손등과 손바닥처럼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전체적이고도 균형 잡힌 통찰의 요구는 불교사상의 가장 기본 바탕을 형성하고 있는데, 근본 교리의 8정도(八正道)에서 정견(正見)이 맨 먼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화두, ‘수산의 죽비’는 물론 이거니와 모든 화두의 처음과 끝은 정견의 확립이다. 여기에서는 입만 열면 그르친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하지 않으면 답을 얻을 수 없다.
개념화된 언어는 극히 한부분만을 드러낸다. 죽비라고 해버리면 본질을 잃고 죽비가 아니라고 해버리면 특질을 잃는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모순이 합리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특단의 길을 찾으려면 끊임없이 궁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양변(兩邊)을 취하거나 또는 양변을 취하지 않아도 다 문제가 생기니 모순일 수밖에 없다.
숭산에서 찾아온 남악회양을 그의 스승 육조는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고 다그친다. 제자 회양은 8년의 세월을 보내고서야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다’ 고 대답하였다.
중도(中道)의 핵심을 낚아챈다는 것이 얼마나 험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살펴 볼 수 있는 일화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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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학스님 통도사에서 성타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복지법인 영남불교대학을 설립한데 이어, 참좋은 어린이집, 유치원, 국내외 10여 곳의 도량을 건립했다. 저술로는 <저거는 맨날 고기 묵고> <부처되는 공부> 등이 있다.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무일선원 회주. 현재 한국불교대학 학장과 무문관 무일선원 원장 | |